메뉴 건너뛰기

close

1910년 나라가 망했다
  
- 일본의 최고 권력자 메이지 천황 아래에 고종은 이태왕, 순종은 이왕으로 표기했다. 상단 좌우에는 조선침략에 앞장선 일본인 인물들과 병합의 공로가 있는 조선의 인물 사진을 실었다. 외국인으로 유일한 사람은 친일 미국 외교관 스티븐스이다. 하단에는 일본의 한반도 정벌과 침략사를 기술하고, 1909년 12월 말 통계조사에 따른 ‘조선국세일람’으로 조선의 면적, 인구, 재정 현황, 중요 생산액 등의 정보를 실었다.
▲ 한국병합기념화보 - 일본의 최고 권력자 메이지 천황 아래에 고종은 이태왕, 순종은 이왕으로 표기했다. 상단 좌우에는 조선침략에 앞장선 일본인 인물들과 병합의 공로가 있는 조선의 인물 사진을 실었다. 외국인으로 유일한 사람은 친일 미국 외교관 스티븐스이다. 하단에는 일본의 한반도 정벌과 침략사를 기술하고, 1909년 12월 말 통계조사에 따른 ‘조선국세일람’으로 조선의 면적, 인구, 재정 현황, 중요 생산액 등의 정보를 실었다.
ⓒ 오사카신보(大阪新報, 1910.09.28)

관련사진보기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망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많은 신민이 울고 죽음으로 항거한 것에 비해 비교적 조용했다. 올 것이 온 것뿐이었다. 경술국치의 날, 일제는 한국병합을 축하하기 위해 집마다 일장기를 게양하고 시내 거리에는 오색등이 설치하고 저녁에는 등불행렬을 하였다. 약 6만 명이 동원되어 만세 삼창을 하며 '대한제국'이 '조선'으로 바뀐 이 날을 축하했다.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정부의 정치를 개선하고자 했던 일진회는 을사늑약 이후 매국 단체가 되었다. 그들은 의병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10만 회원 단체인 일진회는 합방을 스스로 청원했다. 그들은 합방이 국가의 발전과 인민의 행복을 위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병합 이후 강제로 해산되었다. 일제에 이용만 당한 것이다. 일본인 샤쿠오(釋尾旭邦)는 동경에서 "조선 합병은 한인이 세계가 경모(輕侮, 남을 업신여겨 모욕함)하는 열 등 국민의 반열에서 벗어나, 세계 일등국인 일본 제국민의 명예 아래 걷는 행복한 국민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국인을 열강의 경제적 침탈을 견딜만한 능력이 없고, 문명을 건설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개돼지 같은 백의인(白衣人)'이라고 멸시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국인 안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

일제는 안중근의 이토 처단을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이토는 한국병합을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토의 죽음으로 한국병합이 서둘러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합병의 원인이 일본이라는 외인(外因)이 아니라, 조선이 자초한 내인(內因)에 있다는 것이다. 윤치호도 그런 입장이었다.

"조선인이 전쟁으로 나라를 뺏겼단 말인가, 조선은 전쟁 한번 못하고 도장으로 합병되었다. 합병 되었을 때 국민이 일어서서 일제와 싸울 생각을 안 했다. 이씨 왕조보다는 일제의 품 안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중근은 정치적으로 이토를 암살하여 강건파의 좋은 빌미를 제공하여 한일합병을 앞당기지 않았나."

하지만 이토는 일본내에서 보호통치의 실적이 미비하다는 여론에 부담을 느끼고 4월10일 경 병합 단행에 이의가 없음의 견해를 표명한 적이있다. 문제는 그 시기였을 뿐이다.

이토가 사라지자 무단파이자 즉각 병합파인 데라우치가 병합을 밀어붙였다. 현역 육군대장으로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1910년 5월 30일 조선 3대 통감으로 부임한 후, 7월 전국을 계엄상태로 만들었다. 헌병과 순사를 30미터마다 배치해 경계를 강화하고 기마대에게 순찰를 돌게 했다. 『대한민보(大韓民報)』 발행을 정지시키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판매금지시켰다.

1910년 8월 16일, 통감은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고, 일본국 황제 폐하는 양여를 수락하고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민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조약체결을 숨긴 채, 사회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 이를 반포하였다.

8월 29일 조용한 결정적 이유는 일제가 강제 병합 진행을 은폐하였고, 애국 인사들을 사전에 투옥하고 언론과 집회 자체를 통제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한국인들은 경악과 분노로 땅을 치고 통곡하였다. 망국은 온 강토를 슬픔에 빠지게 했다. 의병 투쟁이 지속되었다. 개화 지식인과 관료들은 망국의 한을 품고 순국하였다. 매천 황현은 종사(宗社)가 망하는 날 국민이면 누구나 죽어야 옳다고 여겼다. 사대부들이 염치를 중히 하지 못하고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종사를 망쳐 놓고도 자책할 줄 모른다고 통탄하였다. "새짐승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찡기는 듯/무궁화 삼천리가 다 영락하다니/가을밤 등불 아래 곰곰 생각하니/이승에서 식자인 구실하기 정히 어렵네(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라고 「절명시」를 남기고 순국하였다.

한일강제 병합 문서(한국병합조약)는 순종의 거부와 저항 때문에 제대로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 결정적인 것은 주권자인 황제의 친필 서명이 빠져있다. 조약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가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중대한 결함이다. 조약은 불법이요, 무효이다. 1905년 을사늑약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적 문서에 황제는 거부한 것이다. 그것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이었다. 1926년 융희 황제는 승하 직전에 유언을 남긴다. 민족 앞에 생생하게 그 부당성을 밝히고 죽었다.

1926년 6월 10일 융희 황제(순종)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유언조칙」은 『신한민보』 7월 28일 자로 보도되었다. 융희 황제가 자신의 곁을 끝까지 지키고 있었던 조정구(趙鼎九)라는 사람에게 '병합조약을 자신이 승인하지 않았고, 양국의 조칙 즉 나라를 내주는 조칙도 자신이 한 것이 아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내용의 보도였다.

"한 목숨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 일본)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박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요. 나, 구차히 살며 죽지 못한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에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生民)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는지라. 깊은 곳에 갇힌 몸이 되어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지금 한 병이 위중하니 한마디 말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지금 나 경에게 위탁하노니 경은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認准)과 양국(讓國)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여러분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들을 도우리라. (조정구에게 조칙을 나리우심)"

정공단 아이들, 부산진보통학교를 다니다

대한제국이 사라진 자리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다. 조선 총독은 일왕으로부터 조선 통치의 전권을 부여받았다. 삼권이 그의 손에 있었다. 집회와 결사, 언론의 자유가 사라지고 일상의 모든 것이 헌병 경찰에 의해 통제되고 감시를 받았다. 일진회와 같은 친일 매국 단체를 포함한 모든 단체를 해산하였다. 일본 헌병이 칼을 차고 말 위에서 한국인을 깔보고 내려보며 일상적 폭력으로 지배하였다. 일상의 모든 것이 감시와 통제의 사회였다. 철장 없는 감옥이었다. 한국인은 문명 수준이 낮기 때문에 "조선사람은 명태처럼 두들겨 패야 말귀를 알아듣는다."라며 태형을 합법화하였다. 일본 순사는 한국인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망국의 소식은 이내 알려졌다. 오택은 이 날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슬프고 슬프다. 우리 국민이 잊을 수 없는 국치일(國恥日)이다. 이 날부터 데라우치(寺內) 총독이 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니 명치 43년이다." 또 최천택은 "15세 때인 1910년 8월 소위 일한 합방이라는 흉보를 듣고, 천지가 진동하는 듯하여 인심은 극도로 흥분되고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그리하여 자진하여 '광복단(光復團)'에 입단하고, 암암리에 동지 규합에 힘을 기울여 박재혁, 김인태, 김병태, 김영주, 장지형(장건상의 조카), 오택(전부 좌천동인左川洞人) 친구들과 매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전도(前途)를 모의하면서 부산제2상업학교에 통학했다." 최천택은 1910년에 부산진공립보통학교 2학년 학생이었기에 이 기록은 일부 기억의 오류가 있다. 부산공립상업학교는 1923년 4월 1일 부산제2공립상업학교로 개칭하였다.
 
사립부산진보통학교 1회(1909) 졸업명부와 시상대장(1912)으로 사립과 공립 시절의 학생 명단을 확인할 수 있으나, 박재혁 졸업 동기의 명단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 부산진공립보통학교 졸업명부와 시상대장 사립부산진보통학교 1회(1909) 졸업명부와 시상대장(1912)으로 사립과 공립 시절의 학생 명단을 확인할 수 있으나, 박재혁 졸업 동기의 명단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 부산진초등학교 제공

관련사진보기

 
최천택이 가입한 '광복단'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시기적으로는 1910년 이후의 일일 것이다. 최천택이 비밀결사단체인 '광복단'에 가입하고 지속적으로 정공단의 아이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국내의 광복단은 1913년에 결성된 경북 풍기의 광복단이 있다.

이는 훗날 의열단과 연결된다. 또 1915년 울산 출신 박상진의 대한광복회가 있다. 1909년 10월 경에 결성되어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국권 회복을 위하여 군자금을 조달하고 인재를 육성하며, 국내외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할 것을 목적으로 만든 항일 운동을 전개한 비밀 결사로 대동청년단이 있었다. 17세에서 30세 미만의 청년 80명이 모여 만든 단체로 안희제(安熙濟), 서상일(徐相日), 이원식(李元植), 남형우(南亨祐) 등 경상남도 지역의 계몽 지식인이 중심이었다. 1892년생인 윤현진과 1893년생인 곽재기가 있다. 관련 증거는 없지만, 정공단 아이들이 연계되었을 가능성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박재혁과 그 동지들은 일찍부터 비밀결사조직체와 관계를 맺고 항일의식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1910년대 학생 신분으로서 역사책을 읽으면서 항일의식을 키워나가던 박재혁과 그들의 동지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비밀결사체인 구세단을 1913년 조직하기에 이른다.

강제병합 소식에 육영학교 아이들의 벌겋게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손으로 닦고 닦아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아예, 교실 마룻바닥을 치며 통곡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진짜 '시일야방성통곡'의 날이었다. 학교의 선생님들도 다 같이 울었다. 하지만 나라가 망했다고 배움이 멈출 수는 없었다.
 
부산진공보 학생의 학적부(1909년 입학생)로 당시 학생의 가족 상황, 주소, 전적교, 보증인, 교과목 등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 학적부 부산진공보 학생의 학적부(1909년 입학생)로 당시 학생의 가족 상황, 주소, 전적교, 보증인, 교과목 등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 부산진초등학교 제공

관련사진보기

 
"제군들, 비록 대한제국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조선사람입니다. 나라는 분명 독립될 것입니다. 독립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배워서 힘을 길러야 합니다. 힘없는 나라와 힘없는 백성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배움이 곧 힘입니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일제는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된 사립학교를 <제1차 조선교육령> 시행으로 폐교하고, 공립보통학교로 전환하거나 흡수‧통합하였다. 식민교육체제로 편입되었다. 데라우치 총독은 1910년 12월 동경에서 열린 식민학회 주최 환영회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동양의 문명국으로서 상당히 발달한 나라이므로 이론을 아는 독서인이 얼마든지 있었지마는 이씨 왕조가 통치한 뒤로 점차 소극에 빠진 결과 모든 정치가 다 부패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나라이므로 다른 몽매한 땅을 제 마음대로 하려는 것처럼 하여서는 안 된다. 저들의 역사와 저들의 성행(性行)을 잘 고찰하여 보지 않으면 안 된다."
  
- 위에서부터 사립부산진육영학교 여자부 제1회 졸업식(1911), 부산진공립보통학교 제1회 졸업식(1912), 제2회 졸업식(1913) 사진이다. 1회에 최천택, 2회에 백용수?양성봉?김영주가 있지만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다
▲ 부산진보통학교 초기 졸업식 사진 - 위에서부터 사립부산진육영학교 여자부 제1회 졸업식(1911), 부산진공립보통학교 제1회 졸업식(1912), 제2회 졸업식(1913) 사진이다. 1회에 최천택, 2회에 백용수?양성봉?김영주가 있지만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다
ⓒ 부산진초등학교 제공

관련사진보기

 
동화정책을 일제가 실시하다

사립학교는 개화와 구국을 목적으로 설립 운영되었고, 더우기 통감부 시대에는 교육구국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므로, 사립학교는 민족운동의 온상지로 되었다. 따라서 통감부는 사립학교 탄압을 목적으로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였다.

1908년 8월에 공포된 「사립학교령」은 사립학교의 민족교육 말살정책을 위해 제정된 것이다. 사립학교는 재정적 기반과 학교시설이 빈약하였다. 검정 교과서의 사용으로 애국교육을 실시할 수 없게 되어 사립학교 교육은 위기에 봉착했다. 통감부는 애국적인 도서 51종 2천여 권을 사용금지시켜 불살라 버렸다. 학부에서 편찬한 창가집에는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의 것이나 항일적인 것이 한 편도 수록되지 않아, 창가를 통한 애국심 고취는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강제 병합 후 일본은 조선에 동화(同化)정책을 실시했다. 동화란 동일화되는 것으로 서로 동등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조선을 일본화시키는 것이다. 일본은 문명국이자 세계적 강국이 되었다. 힘없고 가난하고 당파 싸움으로 독립이 불가능하고 발전의 기미도 없는 조선을 일본처럼 문명화하는 것이 동화정책의 목표였다. 하지만 일제는 조선을 늘 열등민족으로 대하며 차별했다. 그들의 동화정책은 차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나아가 조선민족말살 정책을 펼쳐 일본 천황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기르고자 하였다. 그들은 사상, 언론, 종교, 교육 등의 통제와 무단통치를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1911년 일제는 종래의 「사립학교령」을 개정하여 「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함으로써 사학의 탄압을 일층 강화하였다. 그 내용은 학교설립의 인가 규정을 더욱 엄격하게 하고 교과서 검열을 강화하며, 일어교육과 보급에 치중하여 그들의 황국신민화정책을 확고히 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학억압정책은 1915년 「개정사학규칙」에서 더욱 심화하였다.

「조선교육령(1911)」은 "… 충량한 (일본의)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 보통교육은 … (일본) 국민다운 성격을 함양하고 (일본) 국어를 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하고 있다. 민족의식의 말살과 황민화 동화 교육을 통해 식민통치에 적합한 인간 양육을 시도하였다. 일제는 고등교육보다는 초등교육과 실업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일본인의 초중등 교육 기간이 11년인데 비해 한국인은 7~8년으로 짧았다. 낮은 수준의 교육과 차별 교육이었다. 대학교육은 제공하지 않았다.

1910년대 초의 부산진공립보통학교의 학적부를 보면, 부모의 직업은 농업과 상업이 많았고, 입학 전 남학생들이 다닌 학교는 한문제(漢文霽, 수정동), 학해제(學海霽, 좌천동), 죽림제(竹林霽, 좌1동), 관필제(觀必霽, 좌1동), 좌천학교, 수정제(水晶霽, 수정동), 구명학교(구포), 육영제(育英霽, 범1동) 등이었다. 여학생은 일신학교 출신이 많았다. 배운 과목은 수신, 국어(일본어), 한문 및 조선어, 산술, 이과(3~4년), 도화, 체조, 창가(2~4학년), 농업(4학년) 등을 배웠다. 사립보통학교보다 공립보통학교 시절의 학생 졸업수가 많은 것은 그만큼 교육에 대한 열의와 교육 공간이 넓어졌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수신(修身)과목은 한국인 학생에게 일본식 사고와 태도 등을 주입하려는 의도에서 개설한 과목이다. 일본에 대한 책무와 일본식 예법, 관습을 배움으로 일본식 사고와 행동을 하는 식민지 백성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일본어는 '국어'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한국어는 '제2외국어'가 되었다. '모국어' 일본어는 일본 신민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서 그리고 일제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한 언어 소통 수단이었기에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다. 일본어가 출세의 수단임은 누구나 알았다. 그래서 한국인이 세운 개성학교를 개성일어학교로 바꾸기까지 한 것이다. 일본인이 한국어를 배우기보다 한국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것이 개항 이후부터 식민지 지배에 중요함을 알고 있었다. 한편 일본어는 생업 수단인 동시에 새로운 문명 사조를 배우기 위한 수단이었기에 필수적인 과목이었다.

4년제 보통학교의 주당 26∼27시간 중 일어를 10시간씩 배당함으로써 수업 총시간의 38%나 차지하게 하였다. 이에 반해 국어 및 한문은 주당 6시간에 불과하였다. 이렇듯 한국의 학생들은 보통학교 1학년 때부터 외국어를 학습해야 하는 과중한 부담을 지게 되었으며, 국어 및 한문을 합하게 되면 총수업 시간의 61%를 언어와 문자 학습에 충당하였으니, 이로써 다른 교과 학습이 얼마나 희생되었나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어를 가르친 이유는 일본인 교사가 한국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며 아동을 훈육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일본어를 가르치기 위해 한국어 및 한문을 허용한 것이다. 그에 따라 언문 철자법도 제정하였다. 한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한국인은 한문 없이 의사소통할 수 없었기에 당시 부모들은 아동을 보통학교 입학 전에 서당에 보내 한문을 익히게 하였다. 또 보통학교가 일본인으로 만드는 교육이기에 보통학교 대신에 서당에 보내기도 했다. 실재 1911년 1654개의 서당이 1916년에는 25,486개로 1만여 개가 더 증가되었고, 학생수도 141,604명에서 259,531명으로 증가하였다. 식민지화 교육을 하여도 조선인의 민족의식 자체를 죽일 수는 없었다. 

정공단 아이들, 보통학교를 졸업하다

보통학교의 교원은 훈도와 부훈도라 하였는데, 뒤에 촉탁 교원, 대용 교원도 있었다. 통감부 시대까지는 학교장이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하지만 강제 병합 이후 일본인 교장이 독점하고 교감은 없애고 일본인 교사는 일본 본토에서 채용하여 1~3개월의 강습 후 임지에 배치하였고, 한국인은 관립의 고등 보통학교와 여자 고등 보통학교의 사범과 출신, 그리고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임시 교원 양성소 출신 및 교원 시험 합격자를 채용하였다.

박재혁이 다니던 시절의 교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지만, 1912년 당시 교사로는 훈도(訓導)는 김용세(金容世, 부훈도 1911~1916), 이홍로(李弘魯, 부훈도 1911~1?), 김응규(金應圭, 부훈도 1911~?), 송석무(宋錫武, 부훈도 1912~1913) , 최봉우(崔鳳友, 부훈도 1912~1917),등이 있었다. 대용 교원(代用敎員)은 최진학(崔進鶴, 1911~1912), 평전후쿠(平田フク, 1911~1915)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주목할 사람은 김용세 선생(1873~?)이다. 그는 대한협회 평의원, 동아개진교육회 총무, 부산진청년학회 회장, 부산진양정부인회 감독을 지냈다. 부산진보통학교 교사로 1911년부터 16년까지 근무를 하였다.
 
-1910년 당시 부산 동래지역의 한국인이 다녔던 공?사립학교의 현황을 알 수 있다. 공립 3개교, 사립 15개교 였다.
▲ 부산 동래 학교 현황(1910) -1910년 당시 부산 동래지역의 한국인이 다녔던 공?사립학교의 현황을 알 수 있다. 공립 3개교, 사립 15개교 였다.
ⓒ 출처 : 慶南日報(1910.11.02.)

관련사진보기

 
을사늑약 이후 식민지화의 위기의식에 많은 개화 지식인들은 근대 교육을 추진한다. 국권회복이 의병과 같은 무장투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실력양성을 우선해야 한다고 보았다. 실력양성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본의 한국 지배는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대한협회(大韓協會)는 1907년 11월에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조직되어, 교육의 보급·산업의 개발·민권의 보장·행정의 개선 등을 강령으로 내걸고 대한자강회와 유사한 형태의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했으며, 전국에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하고 수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여 회세를 확장해 갔다. 대한자강회는 부산, 동래 2개소와 대한협회는 동래 1개소의 지회를 설립인가 하였다. 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는 1905년 3월에 교육과 식산흥업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김병세는 당시 부산지역의 교육 운동에 열성적인 인물로 청년과 부인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애국, 민족, 국력을 강조하였다. 당시 사회진화론이 팽배하던 시절이라 약육강식 적자생존에서 벗어나는 문명개화는 실력양성에 있다고 보았다. 김병세는 학동들에게 신채호가 지은 『을지문덕전』과 『이순신전』 등의 위인전과 역사책 읽기를 권유하였을 것이다.

부산육영학교는 1911년 2월 1일 '부산진보통학교'라 이름하였다. 당시 5학급 규모로 아동은 162명이었다. 1911년 3월 25일 제2회 '사립부산진보통학교' 졸업식을 거행한다. 졸업생은 남학생 11명, 여학생 12명으로 총 23명이다. 여학생은 대부분 일신(日新)학교 출신이었다. 박재혁은 사립부산진보통학교 제2회 졸업생이지만, 졸업생 명부가 현재 부산진초등학교에 없다. 아마 그의 친구 김인태도 이 당시 졸업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확인할 수 없다.

박재혁의 학교 기록은 부산진보통학교에도 없지만, 부산상업학교 학적부도 인적 사항 이외에는 어떤 기록도 없다. 화재로 망실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학교 기록은 흔적이 없다. 박재혁은 보통학교를 졸업을 하였지만 기울어진 가정 형편과 부친의 3년상이 끝나지 않아 진학을 하지 않았다. 1년 동안 박재혁은 집에 머물며 책을 읽고 박명진을 돌보며 소일했다. 때론 막노동이나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거나 또는 상점 점원으로 단기간 일했을 가능성이 있다.

1911년 4월 '사립부산진(육영)보통학교'는 공립으로 이관되어 사립좌천학교를 흡수 통합한다. 그리고 1911년 5월 3일 '공립부산진보통학교'라 칭하고 개교하였다. 교장은 일본인 소조암태(穌鳥岩態)이고 5학급 162명이며, 4년제였다. 사립을 공립으로 바꾼 것은 한국인의 자주적인 학교를 없애고 민족 사상을 말살하려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1911년 11월 '부산진공립보통학교'로 다시 교명을 바꾼다.

1912년 3월 23일 제1회 부산진공립보통학교의 졸업식이 있었다. 남학생 13명, 여학생 15명으로 통 28명이다.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많았던 남녀공학이었다. 최천택은 졸업식 때 정근상을 받았다. 4학년 2학기 정근상의 상품은 연필 1본(本), 백지 10장이었다. 졸업 1년 정근상 상품은 잡기장 1책이었다. 다음 해 3월 24일 제2회 졸업식이 있었다. 남학생 20명, 여학생 23명이었다. 백용수(부산진공보 1917~19 촉탁, 해방 후 박재혁 비석 세움), 양성봉(전 부산시장), 장지형(張志亨, 구세단, 장건상 조카), 김영주(부산경찰서 투탄) 등이 2회 졸업생이다.

부산진공립보통학교는 좌천동에서 개교하여 1913년 현 정공단 오른쪽에 부지 191.734㎡[58평]를 확장하였고, 이어 912.4㎡[276평]를 매수하여 여자부를 이전 통합하였으나 교지가 협소하여 1922년 11월에 현재의 범일동 부산진초등학교 자리로 신축 이전하였다

부산진초등학교, 항일 운동에 앞장서다

부산진초등학교 출신 중에서 항일 운동을 한 사람으로는 의열단원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관련자인 최천택(1회), 김영주(2회)가 있다. 3·1 만세운동 관련으로 김귀룡(1898~1975)이 있다. 그는 1919년 동래고 재학 중 3월 13일 동래 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최익수(崔益守, 1901~1978), 1919년 3월 부산 좌천동에서 박성해·김태곤 등과 동래고등보통학교의 학생에게 독립선언서를 내주며 시위를 선동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3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학생운동관련자로는 시인이 박영포(朴永浦, 1913~1939)가 있다. 그는 1927년 부산 제2 상업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사건 주모자로 체포되어 이듬해 폐결핵으로 임시출옥했다. 그 후 부산진육영학원(釜山鎭育英學院) 강사로 봉직하고, 1935년 유치환 등과 함께 동인지 『생리(生理)』를 발간했다. 같은 해 일본 『문예춘추』에 시 <푸른 조끼>가 당선되어 데뷔했다. 그는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친구였던 김성태 역시 1929년 부산상업학교 2학년 때 광주학생항일운동 주모자로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광우(李光雨, 1925~?)는 1942년 5월 17세의 나이로 일본군 군수품 제조공장인 조선방직을 폭파할 목적으로 친우회 조직. 공장 노동자를 상대로 선동을 하고 자갈치 시장 등을 돌며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담은 전단을 살포하다 이듬해인 1943년 3월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을 받고 1년 5월 20일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오연(鄭五然, 1928~1945)은 1943년 만주에서 귀국한 차병곤이 동창인 박정오, 신정호 등과 조직한 독서회에 참여하였다. 이후 동지 규합에 노력하여 1944년 5월 1일 순국당(殉國黨)을 결성하고 강령은 '민족독립·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한다'라고 정하고, 행동 목표를 총독암살, 군사시설 파괴, 일인 집단 거주지 방화 등을 결의하였다. 이는 단순한 학생운동조직이 아니라 독립군적 조직으로 전환해 갔던 면모를 보여준다. 당시 17세로 부산공업학교 2학년에 다니던 그는 폭약연구책을 맡아 활동하며, 차병곤 등과 함께 부산 시내 영도다리에 '대한독립 만세'라고 쓴 벽보를 붙이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서기도 했다. 국내에서 무력투쟁 전개가 여의치 않아 만주에 가서 독립군에 가입키로 하고 출발하던 중 체포되어 고문으로 1945년 5월 9일 옥중 순국하였다. 그의 생가터가 최천택의 집 주소가 같다.

또 양산보통학교에 다니다가 2학년 때 부산진공보로 전학을 와서 3학년을 다니고 다시 양산공보에서 졸업(3회)한 서상건(徐尙鍵, 1899~1960)이 있었다. 그는 1915년 양산공보를 졸업한 후 1919년 3·1운동 직후 경성에서 『혁신공보』를 발행하던 통도사 스님 출신인 박민오(朴玟悟)의 권유로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서상건은 대동단으로부터 제2차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하라는 밀지를 받고 진주·하동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에 양산의 김덕봉(金德峰)·김봉길(金鳳吉) 등과 함께 1921년 5월 12일 진주경찰서에 체포되었다.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원에서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려났다. 그 후 양산청년회, 신간회 활동을 하였다. 그의 아들 서장주(徐璋珠, 1921~1989)는 1942년 일본 동경고등공업학교 재학 중 노무자를 가장하여 일제 군수시설파괴를 도모하다가 1943년 체포되어 2년 형의 옥고를 치렀다.

학생들도 당시의 시대 상황에 저항하며 동맹휴학 운동을 하였다. 1931년 2월 23일 부산진공보 6학년 급장 이순기(李順基)는 9시 조회 시간에 교단에 등단하여 약 1천여 명의 학생에게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동맹휴교를 결행하고 우리들의 요건이 12개 조를 관철하기 위하여 시위 운동을 전개하자."라고 절규하고 동맹휴교를 책동하고 전단 100여 매를 뿌렸다.
 
-부산진공보학생들이 수업료 체납에 따른 퇴학과 정학으로 맹휴, 수업료 감하(減下) 문제로 동맹휴교를 주도하였다.
▲ 부산진공보생 동맹휴교 -부산진공보학생들이 수업료 체납에 따른 퇴학과 정학으로 맹휴, 수업료 감하(減下) 문제로 동맹휴교를 주도하였다.
ⓒ 출처: 조선일보(1931.02.26.)

관련사진보기

 
출동한 경찰은 6학년 이순기, 김영건, 양명수 외 1명과 동래고보 1학년 이연근 외 2명, 총 7명을 검거하여 철야 심문하였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수업료 철폐, 학용품 무상대여, 교원 간 풍기 행위 각성, 교수방침 개선 등이었다. 1925년 부산진 고학생 상조회에 가입한 부산진공보학생들은 겨울 모진 바람 찬 이슬을 무릅쓰고 밤이 이슥하여 만물은 고요히 잠들었을 때 처량한 나어린 목소리로 "고학생 빵이요."하고 외치며 팔러 다녔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학교 다니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 학생들의 학적부가 현재 부산진초등학교에 보이지 않는다.

1931년 1월부터 3월까지 약 3개월 동안 전국 각지에서 맹휴(盟休) 사건이 있었다. 수업료 체납에 따른 퇴학과 정학으로 맹휴, 수업료 감하(減下) 문제로 맹휴 등이 벌어졌다. 학교 수는 중등학교가 7개, 보통학교가 8개소로 총 15개교가 맹휴 혹은 동요에 참여하였는데 학생 수효는 약 1,950여 명에 이르렀다. 동맹휴학의 요구의 8할이 '수업료 감하'였다. 작년에도 이와 같은 맹휴가 있었으니 경제적 문제가 심각하였다. 그런데 부산진공보 학생 집을 수색한 결과 '제3인터네셔널 규약'과 '피오뉠' 규약 외 사회주의에 관한 다수의 '팜플릿'을 압수하였다. 당시 사회주의 사상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

1933년 12월 "조선(朝鮮) 사상(思想) 운동사(運動史) 초유(初有)의 초등교원대적화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호외를 뿌릴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다. 부산진공보의 교사 최명석(崔命錫, 1913~1968)이 경남적색노동조합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 10명이 예심 회부와 동시에 휴직 처분을 당했다. 1934년 4월 신문보도에 따르며, 1933년 3월 조선에서 처음으로 초등교육 적화 공작과 노동자화 공작을 실시하기 위해 공립보통학교 훈도 김두영(金斗榮) 등 9개군 공립보통학교 훈도 13명, 전협(全協)의 김차룡을 비롯한 22명이 '경남적색교육노동자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조직은 언론(言論)·집회(集會)·출판(出版)·결사(結社)의 자유 획득, 제국주의(帝國主義) 교육 타도,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시 등을 목적으로 한다고 정했다. 또한 이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강령으로, 조선인과 일본인의 월급차별 철폐, 의무교육제도 실시, 반전사상(反戰思想) 고취, 교내 일본어(日本語)화 반대 등 35항 안을 정하고 학기 말 휴가를 이용하여 마산(馬山)에서 회합하여 결사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부산진공보 훈도 최명석은 1934년 7월 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보안법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당시 신문 호외에 관련자 인물 얼굴을 지우고 보도하여 보도검열했음을 알 수 있다.
▲ 경남적색교육노동자협의회 당시 신문 호외에 관련자 인물 얼굴을 지우고 보도하여 보도검열했음을 알 수 있다.
ⓒ 동아일보 호외(1933.12.12.)

관련사진보기

 
경남적색교육노동조합사건의 주요 여자운동가인 박보호, 조금순(趙今順), 김말수(金末守), 신현숙(辛玄淑), 김숙향(金淑香) 등은 부산 각 고무공장에 산업별 노동조합의 조직사명을 띠고 각 고무공장에 직공으로 들어가 환대고무공장 파업사건에서부터 각 공장의 파업사건을 지도하였다.

일제강점기 이름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이름을 남기지 않은 항일운동가와 마찬가지로 친일 부왜인들이 있고, 또한 그 삶의 곡절도 있음이 분명하다. 부산진보통학교 출신 중으로 해방 이후 그 이름이 두드러진 사람은 부산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윤인구, 부산일보와 부일장학회를 설립했던 김지태이다.

나라는 망해도 청년들이 배움 속에서 독립운동의 열기를 끊을 수는 없었다. 경술국치(國恥)는 단순히 나라의 수치가 아니라 민족 문화 역사의 말살로 이어지기에 이 날을 목놓아 통곡해야 한다. 망국은 와도 힘을 길러야 하고 힘은 글과 총에서 비롯됨을 기억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울산작가회의, 울산민예총 감사로 활동하고 있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태그:#의열단원 박재혁, #사립부산진보통학교, #부산진공립보통학교, #부산진초등학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