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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자령 전투의 유적지 길림성 왕청현. 대전자령 전투는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독립군의 항일전 사상 최대의 승전이었다.
 대전자령 전투의 유적지 길림성 왕청현. 대전자령 전투는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독립군의 항일전 사상 최대의 승전이었다.
ⓒ 독립기념관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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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림과 오패부를 소개한 것은 최운산과 그의 형제들이 이들 군벌진영에서 중국 병사들의 훈련을 맡았고, 한때 전투에서 장작림의 목숨을 구해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친구인 무술 사부로부터 배웠던 각종 훈련이 군사교련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무렵 집총훈련과 사격술을 배운 것은 뒷날 무장독립전쟁에서 크게 활용하였다. '군벌시대'의 구도를 좀 더 살펴보자. 

군벌은 크게 북양군벌과 서남군벌로 갈라지는데, 북양군벌은 주로 북경을 중심으로 하여 원세개 사후 북경정부의 권력을 장악했던 세력이다. 대표적으로 단기서ㆍ풍국장ㆍ오패부ㆍ장작림 등이 있다.

20세기 초에 서남지역을 제외한 중국의 대부분 지역은 원세개의 북양군벌의 세력권에 놓이게 되었고, 원세개의 부하인 단기서ㆍ예사충 등이 각 지역의 도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들이 원세개가 죽은 후 각 지역의 군벌로서 그 지역을 장악한 것이다. (주석 1)


최운산과 그의 형제들은 북양군벌 소속으로 만주에 영향력을 갖게된 오패부ㆍ장작림 부대와 연고를 갖게 되면서 이를 십분 활용하였다.

"최운산은 황무지였던 동북삼성 지역을 민간에 불하하는 중국의 토지정책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왕청현 일대를 모두 소유하게 되었고 집안은 다시 일어섰다." (주석 2)

이 부문과 관련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의 '최운산 장군 연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1908년 경

동삼성 지역 지적(地籍) 정리할 때 최운산이 왕청현 총판(總辦) - 일명 총대(總代)로 활약하면서 10여개 지방(1개 지방은 우리나라의 군(郡) 크기의 단위) 개발 경작하여 봉오동을 위시하여 도문, 석현, 서대파, 십리평, 양수천자를 비롯한 거대한 토지 소유.

최운산은 이에 앞선 1907년 회령 출신의 김성녀와 결혼하였다. 아버지가 러시아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떠났고, 오빠도 아버지에게 간 뒤 돌아오지 않은, 외로운 여성이었다. 김성녀는 어린 나이에도 독립운동가의 핏줄을 타고난 듯, 곧 전개되는 남편과 그 형제들의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돋보이는 만주의 여성독립운동가로 활동한다. 

동삼성의 넓은 땅을 소유하게 된 최운산은 이 지역을 순방하고 1908년 봉오동을 낙점한다. 봉황새가 오동나무에 깃을 사린다는 의미의 봉오동(鳳梧洞)에 터를 잡고 가족이 함께 이주하였다. 그리고 만주 각지에 산재한 친척들과 동포들을 불러들여 이곳에 신한촌을 건설한다.

최운산 일가가 봉오동으로 이주한 것은 장차 이곳에 둔전(屯田)을 만들고 이를 통해 둔병(屯兵)을 양성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둔전이란, 국토의 변경이나 군사요지에 황무지를 개간하여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함으로써 군량운반의 수고를 덜고 국방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 고려 때부터 설치된 제도이다. 
  
최초의 독립전쟁인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의 격전지
▲ 최초의 독립전쟁인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의 격전지 최초의 독립전쟁인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의 격전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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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의 지형은 어떤지, 후대 사가의 답사 기록이다.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 된 봉오동승첩 유적지는 두만강변의 도문(圖們)에서 북쪽으로 불과 10여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연길에서 도문으로 향하는 포장도로를 50km 정도 따라가면 연변의 4대 하천 가운데 하나인 가야허를 만나게 되며, 가야허교를 건너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 곳에서 왕청방면으로 2~3km를 북상하면 봉오골 입구에 도착하게 된다.(……)

봉오동은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길쭉한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으로 된 요새지이고, 남쪽 입구로부터 북쪽까지는 25리가 넘는 긴 골짜기로서 당시 입구로부터 하ㆍ중ㆍ상촌의 한인마을이 30~60호씩 모여 있던 곳이었다. (주석 3)


최운산은 봉오동을 근거지 삼아 대규모 농장과 목장을 운영하는 한편 곡물 및 육우를 러시아군에 식량으로 수출하는 수출업자였다. 또한 만주지역이 점점 산업화하면서 생필품공장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는데 콩기름공장ㆍ국수공장ㆍ메주공장ㆍ성냥공장ㆍ비누공장ㆍ과자공장을 비롯한 여러(미처 기록하지 못한 공장도 많았음) 생필품 기업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최운산「연보」)

큰형 최명록은 중국인 부호 밑에서 일하다 그의 정직함과 성실성을 보고 주인이 양자로 들이고, 넓은 토지를 물려받아 큰 자산가가 되었다. 형제들의 이같은 재산은 둔병과 교육사업 그리고 러시아에서 신식무기를 구입하는데 대부분 투입되었다. 


주석
1> 안정애ㆍ양정현 지음, 『중국사 100장면』, 348~349쪽, 가람기획, 1993.
2> 최성주, 앞의 책, 88쪽.
3> 윤병석, 『간도역사의 연구』, 262~263쪽, 국학 자료원, 2003.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태그:#최운산, #최운산장군평전,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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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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