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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 죽성포(째보선창), 옹기전, 공설시장(구시장), 역전새벽시장(도깨비시장), 팔마재쌀시장, 감독(감도가), 약전골목, 농방골목, 모시전 거리, 싸전거리, 객주거리, 주막거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지역 주민의 삶과 문화, 역사가 오롯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기자말]
경포천 입구(2007년 촬영) 서래장터와 경장시는 경포천을 끼고 장시가 열렸다
 경포천 입구(2007년 촬영) 서래장터와 경장시는 경포천을 끼고 장시가 열렸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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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장터와 경장시(경장시장)는 어떻게 다른가요?"
"이음동의어라고 할까. 발음은 다르지만 군산 지역의 대표적인 '오일장'이었죠. 둘 다 경포천을 끼고 정기적으로 장시가 섰던 곳이니 함께 사용해도 될 듯합니다."
 

군산 지역 향토사 강의나 대화할 때 가끔 받는 질문이다. 두 장시(場市) 위치가 한 마장쯤 떨어져 있어 필자도 궁금하게 여겼던 적이 있었다. 서래장터는 지금의 중동로터리(서래포구) 부근에, 경장시는 경장리(송경교) 중심으로 장이 섰던 것으로 전해진다. 두 장시는 400년 역사를 지닌 오일장이었으나 일제강점기 거치면서 모두 사라졌다.

그중 경장시가 먼저 기능을 상실한다. 서래장터(서래포구)는 30~40년대에도 생선장은 매일 열렸다. 광복 후에도 고깃배가 드나들었으나 1960년대 후반 해망로 개설공사 때 매립된다. 이후 경포천 물길도 직선으로 흐르게 된다. 서래포구는 지금도 짭조름한 갯내음이 물씬 풍긴다. 물때에 맞춰 소형 선박들이 드나들고, 꽃새우 가공공장도 가동되고 있어 옛 포구의 여운을 느끼게 한다.

경포천(京浦川)은 군산시 옥산면 금성산(125m) 산록에서 발원, 북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후 장군봉(86m) 남쪽 기슭으로 낮게 흐르면서 개정뜰, 미장뜰을 촉촉하게 적신다. 하류는 경장동 시가지를 관통하며 도심 하천의 모습을 보여준다. 유역에 석교뜰을 이루고 무명천 물을 받아 송경교(아흔아홉다리)를 지나 경암동 군산경찰서 부근에서 금강으로 유입된다.

경장시, 일제강점기에 장시 기능 상실
 
군산 장날(1905년)
 군산 장날(1905년)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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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고려 시대 조운·조창의 중심지였다. 조선 시대에는 서래장터와 경장시 중심으로 민간 무역이 이뤄졌다. 개항(1899) 전후에는 금강 수운을 이용한 무역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상권도 강경 너머까지 확장된다. 그중 경장시의 상품은 옥구 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비롯해 쌀·대두·깨·녹두·면화(목화)·마포(麻布)·어패류·건어물 등.

화폐가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 경장시는 더욱 활기를 띤다. 임피, 회현, 지경, 옥산, 미면 지역에서 생산된 각종 농작물과 생활 용품이 거래됐다. 옷감, 육류, 술과 같은 식품을 비롯해 낫, 가래, 괭이, 부엌칼 같은 농기구와 생활도구, 수공업 제품도 장에 나왔다. 농민들은 장에 내다 팔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여러 종류의 공산품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충남 한산 모시와 나포면 숫골(마촌) 특산품인 삼배도 경장시를 거쳤다. 조선 시대 한양으로 올려보낼 모시와 삼배를 삼학동 야산에 삼막(창고)을 짓고 건조했다는 기록에서도 잘 나타난다. 모시와 삼배 말리는 모습이 3천 마리 학이 춤추는 것처럼 장관을 이뤄 '삼학동(三鶴洞)'이라 하였고, 야산도 '모시산'으로 부르게 됐다는 유래가 그것이다.

일본 제품도 상당량 거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항(1899) 이듬해 일본과 직항로(군산-오사카)가 열리고, 빈 선박 화물 운임이 30% 내외여서 일본 상품이 대량으로 수입돼서다. 주요 품목은 당목(옥양목)을 비롯해 성냥, 석유, 남포(燈), 도기, 방적사, 각종 주물류 및 농기구 등이었다. 조선 후기 옥구·임피(군산시) 인구가 4만에 달했다는 기록도 무시할 수 없겠다.

경장시는 조선 중기 물류유통 중심지로 부각됐다. 이후 각지에서 집하된 물화를 수운을 이용해 서울(개성, 한양 등)로 보낸다고 해서 경장시(京場市)라 했단다. 전라·충청 지역 주산물까지 모여들어 성황을 이뤘으나 전군도로(1908)와 군산선(1912)이 개통되고 1927년 경장리에 국제 규격의 경마장이 들어서면서 기능을 서래장터에 내주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예전과 사뭇 달라진 '경포천' 물줄기
 
드론으로 촬영한 팔마광장 주변(중앙의 물길은 경포천)
 드론으로 촬영한 팔마광장 주변(중앙의 물길은 경포천)
ⓒ 아이엠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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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포천(8.9km) 모습이다. 물길이 직선으로 나타난다. 문헌에도 '경포천은 대부분 직강화한 인공하천'이라 기록돼있다. 그러나 본래 물줄기는 수십 차례 굽이치며 흘렀다. 1930년대 지도에서도 물줄기가 20여 차례 'S자'로 굽이치는 게 확인된다. 지역 농어민들과 장꾼들의 애환이 담긴 경포천은 1982년 10월 지방하천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경장시는 경포천(송경교) 중심으로 팔마산 자락 아래에 장시가 섰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지금의 경장동(팔마광장~경장사거리) 부근에 장이 섰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왜냐면 본래 팔마산 자락은 경포천 주변(아흔아홉다리)까지 뻗어 있었으나 철도(군산선·옥구선) 공사 때 대부분 잘려나갔으며 물줄기 형세도 그동안 알려진 것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사진에 담긴 지역은 전주-군산 자동차 전용도로 개통(2000년대 초) 전까지 군산의 관문 역할을 했던 팔마광장 부근이다. 경포천을 가로지르는 철도는 1912년 3월 개통된 군산선(아흔아홉다리)이다. 좌우로 반듯하게 뻗은 4차선 도로(송경교)는 1908년 우리나라 최초로 개설된 신작로(전군도로)이고, 송경교 위로 자그마하게 보이는 다리가 팔마교(八馬橋)다.

국내 최초 공식규격 경마장,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어
 
1965년 경포천 모습(신철균 작품집에서)
 1965년 경포천 모습(신철균 작품집에서)
ⓒ 신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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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1965년, 군산 경포천 모습이다. 촬영 장소는 송경교 난간으로 물줄기가 잔잔히 굽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위쪽 숲이 우거진 지역 왼편은 일제가 세운 송진공장(현 군산경찰서)이고, 오른편은 구암초등학교 자리다.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황량한 논바닥과 울퍽질퍽한 논둑, 볏단을 높게 싸놓은 노적가리 등이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일제강점기 경장리, 둔율리 지역 논들은 대부분 일본인 농장주 미야자키 게이타로 소유였다. 미야자키는 군산 지역 일본인 농장운영 효시로 알려진다. 그는 1903년 군산에 정착, 경장리에 농장을 두고 농민들을 착취, 부를 이룬 대농장주였다. 충남 서천, 서울 등에도 토지를 대량 소유하여 대표적 일본인 지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측 논둑에서 2백여 미터 지점에 일제강점기 조성된 경마장이 있었다. 일제는 1927년 미와자키 농장주로부터 2만 1000평을 기증받아 넓은 트랙과 부속건물을 갖춘 경마장을 조성하였다. 주로(走路)는 1.2km. 전국 최초 공식규격 경마장으로 알려진다. 1932년에는 주로를 1.6km로 늘리고, 부지도 7만 8000평으로 확장한다.
 
1938년 군산경마장 모습
 1938년 군산경마장 모습
ⓒ 군산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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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경마대회는 벚꽃시기와 단풍철, 한해에 두 차례 열렸다. 대회를 앞두고 곳곳에 포스터가 나붙었고, 군산역에 도착한 경주마 수십 마리는 경마장으로 향했다. 이때 악대를 앞세워 시가행진을 벌였는데 대단한 볼거리였단다. 경마장에는 일급 가수와 무희들이 출연하여 춤과 노래로 관객을 모았다. 경마대회는 1941년 가을 경마를 끝으로 중단된다.

경마장은 일본군 무기고로 사용되다가 광복을 맞는다. 그해(1945) 11월 30일은 무척 추웠다고 한다. 이날 미군 헌병들이 모닥불을 피우다 일본군이 매설해놓은 다량의 포탄이 폭발하면서 대형화재로 이어졌고 피해도 엄청났다. <군산시사>에 따르면 미군 23명, 한국소방관 7명, 민간인 3명, 의용소방대원 9명 등 42명이 사망하고, 이재민 650명이 발생하였다.

대형 참사로 폐허가 된 경마장은 마을 주민들이 개간,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경작료를 꼬박꼬박 냈음에도 마사회가 토지 반환을 요구하면서 분쟁이 시작된다. 결국 분쟁은 1954년 농민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후 계속 농사를 지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경마교'만 외롭게 남아 가슴 아픈 그날의 현장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군산경마장 자리에서 시내방향으로 놓인 경마교.
 군산경마장 자리에서 시내방향으로 놓인 경마교.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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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군산문화 13권, 일본인이 발행한 <韓國案內>(1902), 한국학중앙연구원

(* 다음 기사에 계속됩니다)

태그:#경장시(경장시장), #경포천, #군산경마장, #서래장터, #서래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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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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