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줘먹 쥔 김원웅 광복회장 김원웅 광복회장이 24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친일비호 세력과 결별하지 않는 미래통합당은 토착왜구와 한 몸이라는 국민들의 인식이 심화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원웅 광복회장. 사진은 지난 8월 24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친일비호 세력과 결별하지 않는 미래통합당은 토착왜구와 한 몸이라는 국민들의 인식이 심화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모습.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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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시대정신이 담기고, 부르면 부를수록 우리 국민의 애국심과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국가(國歌) 제정'을 위한 국민적 공감대를 광복회가 조성해 나가겠다."

김원웅 광복회장의 2021년 새해 신년사 중 일부다. 새 애국가 제정에 대한 의지를 피력함과 동시에 김 회장은 "표절과 친일·친나치 행위로 얼룩진 애국가 작곡가(안익태)에 대한 역사적 심판"도 이뤄내겠다고 천명했다.

이에 발맞춰 지난해 12월에는 25개 독립운동가 선양단체로 구성된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회장 함세웅) 역시 "애국가 작곡가로 알려진 안익태가 일제강점기 친일에 부역한 행적이 밝혀지고 있다"라면서 서훈 박탈을 주장해 김 회장의 행보에 힘이 실리고 있는 모양새다.

안익태가 작곡한 현행 애국가를 폐지하고자 하는 김 회장의 의지는 강력하다. 김 회장은 지나해 8월에 열린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 행사에서 "민족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한 나라 뿐"이라며 성토했었다.

역사인식은 동의한다, 하지만

"친일 미청산은 한국 사회의 기저질환"이라며 늦었지만 이제야말로 친일 잔재들을 뿌리뽑겠다는 김 회장의 의지와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적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당연히 서훈 박탈과 현충원에서의 이장 등 조치들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설사 안익태의 그러한 전력이 사실로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안익태 개인에 대한 '단죄'가 이뤄져야 할지라도, 애국가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힘들다.

안익태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대한민국 국가(國歌)로서의 애국가의 가치는 결코 폄훼돼선 안 된다. 애국가는 더 이상 안익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채택하고 광복군이 부르던 노래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행한 <한국애국가>(韓國愛國歌) 악보를 보면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는 애국가의 유래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처음에는 서양의 명곡(名曲)을 가져다 가사를 붙여 노래하였으나, 그 후 한국 인사들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여겼다. 이에 10년 전 한 한국 청년음악가가 이 새 곡을 만든 것이 곧 한국의 광복운동 중에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 <한국애국가고사>(韓國愛國歌故事) 중

여기서 '한 한국 청년음악가'란 안익태를 말한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한 때가 1935년이므로 시기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1945년 11월 12일 중국 충칭에서 발행된 <한국애국가> 악보
 1945년 11월 12일 중국 충칭에서 발행된 <한국애국가> 악보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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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애국가는 초창기에 우리 곡조가 따로 없어, 서양 민요인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의 곡조에 맞춰 불러야만 했다. 당연히 우리 곡조에 대한 갈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1935년 안익태가 애국가의 새 곡조를 작곡하자 해외 한인사회와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적극 수용하려 한 것이다.

1941년 2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표한 <공보 제69호>에는 '애국가 신곡보 사용 허가'라는 의결 사항이 등장한다.

"북미(北美)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집행위원회(中央執行委員會)로부터 안익태(安益泰)가 작곡한 애국가(愛國歌) 신곡보(新曲譜)의 사용 허가를 요구하였음으로 대한민국 22년(1940년) 12월 20일 국무회의에서 내무부로서 그의 사용을 허가하기로 의결하다."

즉 주석 김구를 비롯하여 조완구, 조소앙, 조성환, 박찬익, 이시영, 차리석 등 국무위원들이 모두 배석한 국무회의에서 북미 지역 한인단체의 안익태 곡조 애국가 사용을 공식 허가한 것이다.

이후 임시정부에서도 자연스레 안익태 곡조의 노래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1944년 8월 일본군을 탈출한 장준하 등 학병들은 안휘성(安徽省) 푸양(阜陽)에 위치한 한국광복군훈련반(아래 한광반)에 도착했다. 장준하는 이날 저녁에 열린 환영회 당시 안익태 곡조의 애국가를 불렀다고 회고했다.

"작은 질그릇에 들기름을 바르고, 목화 심지에 불을 당겨, 불을 밝힌 것을 등이라 하여 매어놓고, 그 밑에 늘어앉아 식순에 따라 환영회가 진행되었다. 격식대로 대표가 환영회 개최사를 해주었다. 애국가 봉창이 있은 후 몇 동지들의 환영사와 격려사에 이어 우리 모두가 한 사람씩 답사를 했다.

아직도 감격스러운 그 불로하 강변의 애국가가 우리들 귓전에서 맴돌건만 이곳서 부르는 애국가는 그 곡이 달랐다. 우리가 알던 애란의 민요곡이 아니라 지금의 안익태씨 작곡의 곡이었다. 우리는 따라 부르지 못하고 그 경건하고 장엄한 분위기에 고개를 숙였다." - 장준하, <돌베개>, 돌베개, 127~128쪽


1944년 당시 전선의 광복군들이 안익태 곡조의 애국가를 불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미 임시정부에서도 안익태 곡조의 애국가를 채택해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애국가는 해방 전부터 독립운동 진영에서 독립의 의지를 다지며 부르던 민족의 노래였다.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이름 모를 조상들의 한(恨)과 희망이 동시에 담긴 역사적인 노래였던 것이다.

해방 후에는 또 어떠한가.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침에 맞서 싸우던 전선에서, 1980년 5월 광주에서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민주화를 부르짖었던 현장에서, 2002년 월드컵 승리의 현장에서 우리 국민 모두가 어깨동무하며 소리 높여 불렀던 노래가 바로 애국가다. 애국가 4절의 가사처럼 그야말로 우리 민족이 '괴로우나 즐거우나' 항상 불렀던 노래인 것이다.

독립군가도 부르지 말아야 하나

대일항쟁기 당시 우리 독립군이 혈전을 다짐하며 불렀던 노래 중에 <용진가>라는 곡이 있다.

(후렴구)
나가세 전쟁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검수도산 무릅쓰고 나아갈 때에
독립군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삼천만 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삼천만 번 죽더라도 일본과 싸우겠다는 독립군의 결기가 담긴 이 노래는 사실 1908년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하이카라부시>(ハイカラ節)라는 노래의 곡조를 차용한 것이었다.

<용진가>뿐만이 아니다. 그 시절 불리던 독립군가들이 대개 그랬다. 일제 침략의 상징곡으로 국내에서는 금기시되는 <군함행진곡>(軍艦行進曲)의 경우도 김좌진 장군이 해당 곡조에 가사만 바꿔 <승리 행진곡>이라는 독립군가를 작사하기도 했다.

목숨 걸고 독립운동 하던 와중에 노래까지 작곡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지만, 어쨌든 독립군들은 일본 노래라 하여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곡조를 차용하고 개사해서 역으로 일본을 무찌르자는 의지를 담은 독립군가로 재탄생시키는 재치를 보여줬다.

만약 애국가 작곡가의 친일 전력이 문제가 돼 애국가를 폐지해야 한다면, 일본 군가를 개사해서 만든 독립군가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따라서 폐지해야 마땅한가?

작곡가의 전력보다 민중과 함께한 역사에 주목해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안익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친일인명사전 등재된 내용에 따르면 "안익태는 나치 정부의 제국음악원 회원으로 활동하며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만주국 축전곡을 의뢰받아 완성했다.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안익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친일인명사전 등재된 내용에 따르면 "안익태는 나치 정부의 제국음악원 회원으로 활동하며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만주국 축전곡을 의뢰받아 완성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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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청산은 아무리 늦었어도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민족적 숙원이고 과업이다. 그러나 친일 잔재를 청산한다는 명분으로 보전 가치가 있는 유산마저 파괴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의 전력보다도, 애국가가 굴곡의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민중과 함께했던 그 시간에 주목해 그 가치를 다시 판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것이 내가 안익태에 대한 단죄와는 별개로 애국가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이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박원호, 「1945년 重慶임시정부 발행 '한국애국가'의 현대적 의의」,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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