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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 죽성포(째보선창), 옹기전, 공설시장(구시장), 역전새벽시장(도깨비시장), 팔마재쌀시장, 감독(감도가), 약전골목, 농방골목, 모시전 거리, 싸전거리, 객주거리, 주막거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지역 주민의 삶과 문화, 역사가 오롯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 [기자말]
개항 전 군산. 지금의 영화동을 제외한 장미동, 신영동, 죽성동 일대는 간석지로 나타난다.  세 개의 구릉지 역시 항만 공사 때 모두 사라졌다.
 개항 전 군산. 지금의 영화동을 제외한 장미동, 신영동, 죽성동 일대는 간석지로 나타난다. 세 개의 구릉지 역시 항만 공사 때 모두 사라졌다.
ⓒ 군산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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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1899년 5월 1일 개항하였다. 이어 개항장 사무 관리기관인 일본 영사관과 옥구 감리서가 설치된다. 1906년 2월에는 통감부령에 의해 옥구 감리서가 폐지되고 이사청(理事廳)이 들어선다. 이후 국권피탈(1910)까지 5년 동안 두 관청(이사청, 옥구부청)이 양립하는 행정을 집행한다. 그러나 실제는 일제가 지방 행정까지 강점해가는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개항 전 군산지역 사진을 보면 각국조계지(현 영화동, 장미동 일부)는 물론 외곽 지역(죽성동, 신영동, 금암동, 중동, 경암동 등)도 대부분 바닷물이 드나드는 간석지였다. 금강으로 유입되는 하천도 3~4개 확인된다. 일제는 외곽 지역을 매립하여 상가 및 주택단지, 운동장, 시장 등을 조성했으며, 호안공사를 대대적으로 벌여 도로를 내고 철도를 가설하였다.

기시감 느껴지는 111년 전 조선인 마을
 
1909년 군산 조선인 마을 모습(지금의 중앙로 2가, 평화동, 대명동, 신영동, 금암동, 중동 일대)
 1909년 군산 조선인 마을 모습(지금의 중앙로 2가, 평화동, 대명동, 신영동, 금암동, 중동 일대)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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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1909년 5월 군산 '천엽상점'이 발행한 <군산 부근 풍경사진첩>에 실린 사진이다. 군산 개항 10주년을 기념해 일본인이 만든 사진첩이다. 사진 원본에는 옥구관아(옥구부청), 군산재무서, 구 재판소, 군산보통학교(중앙초등학교) 등이 담겨 있으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선인 마을, 군산 진입로, 서래산, 서래장터 부분만 트리밍하였다.

사진첩이 만들어진 1909년은 대한제국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경각에 달려 있을 무렵이다. 주권을 잃은 암흑의 시대임에도 사진 속 풍경은 고향 동네처럼 고즈넉하게 느껴진다. 한적한 농촌을 떠오르게 하는 초가마을, 흰옷 차림의 행인들, 소나무가 울창한 서래산, 선으로 나타나는 도로와 전신주 하나까지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다.

기와 얹은 가옥과 초가집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랫부분이 조선인 마을이다. 지금의 중앙로 2가, 평화동, 신영동, 대명동 지역이다. 좌우로 길게 그어진 도로는 국내 최초 신작로(전군가도, 1908년 완공)와 연결되는 군산 진입로다. 그해 9월 시외전화(군산-전주)도 개통되는데, 도로를 따라 세워진 3개의 기둥이 그 전신주로 추정된다.

군산 진입로 위쪽 하천(현 세느강)은 죽성포로 유입되는 금강 지류이고, 그 너머 구릉지가 서래산이다. 산자락에 가려 보이지 않는데, 소나무 숲 아래 지역이 서래장터(오일장)다. 이 장터는 '경장시장'으로도 불렸으며 경포천 물길을 따라 조성되어 있었다. 지금의 '구암 3·1로(서래장터~구암리 군산영명학교 구간)' 도로가 가는 선으로 그어져 있어 흥미를 더한다.

사진 찍은 위치는 군산보통학교 부근으로 추정된다. 이 학교는 월명산 줄기 끝자락을 깎아내고 교사를 신축하였다. 이곳에서 서래산까지 거리는 한 마장 남짓. 초가집이 오밀조밀 엎드려있는 서래포구마을(경포마을)도 희미하게나마 나타나 상상력을 부추긴다. 지금의 중동 지역으로 훗날 인근(현 공설시장 뒤)에 내항선 철도가 가설되고 공설운동장이 들어선다.
 
경포천 입구 모습(2007년 촬영). 옛 노인들은 왼쪽(중동)을 ‘안스래’ 오른쪽(경암동)을 ‘바깥스래’라 하였다
 경포천 입구 모습(2007년 촬영). 옛 노인들은 왼쪽(중동)을 ‘안스래’ 오른쪽(경암동)을 ‘바깥스래’라 하였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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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군산지형도’(붉은색 촌락 표시가 서래포구마을)
 1917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군산지형도’(붉은색 촌락 표시가 서래포구마을)
ⓒ 군산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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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제작된 '군산지형도'는 서래산(35m) 높이와 수문(물문다리), 경포마을, 군산역(1912년 완공) 등의 위치를 정확히 표기해 놓았다. 경포천 입구에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었고, 지금의 '구암 3·1로(6차선)' 도로가 둑길로 나타난다. 서래포구 지세(地勢)와 경포천 물줄기도 그동안 알려진 것과 사뭇 다른 형세임을 확인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군산 동해안 지역(금암동, 중동, 경암동 등) 매축공사는 1920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그런지 서래장터 주변은 물론 경암동, 금암동, 신영동, 경암동 지역도 갈대밭으로 나온다. 특히 철도가 내항 깊숙이까지 뻗어 있고, 경포마을 면적이 '죽성포 촌락'보다 몇 배 넓으며, 경포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을 우물이 표기되어 놀라웠다.

군산에서 가장 번성했던 민간인 포구
 
50~60년대 서래포구(물길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경포교가 있었다.)
 50~60년대 서래포구(물길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경포교가 있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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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50~60년대 서래포구 모습이다.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 옥구군 경포리에 속했으나 1932년 나까마치(仲町)라는 일본식 지명을 얻으면서 군산부에 편입된다. 광복 후 중동(仲洞)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과거 서래포구는 충청, 전라 각지 주민과 보부상이 몰려들었으며, 금강 건너 용당진(용댕이 나루) 오가는 선착장도 존재하였다.

바닷길이 지금의 고속도로 기능을 했던 1900년대 초, 금강 하구(군산~강경)의 어촌(나루) 10여 곳은 일일생활권에 포함돼 있었다. 그중 군산포~장암포, 경포~용당진, 입포(갓개)~제성나루, 웅포(곰개)~신성리나루, 강경~황산나루 순으로 이용객이 많았다고 전한다. 금강 하구에 위치한 나루의 특징은 포구와 함께 운영됐으며 객주가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

군산은 예로부터 어족자원이 풍부했다. 따라서 객주가 상주하는 포구도 많았다. 군산포(관용 포구), 죽성포(째보선창), 경포(서래포구), 궁포(구암포), 월포(달개나루), 서포(서시포), 나포(나리포) 등이 대표적이다. 그중 가장 번성했던 민간인 포구가 경포였다. 이는 경포리 어민들의 왕성한 출어와 상무역이 폭넓게 이뤄졌던 오일장 영향이 컸을 것으로 풀이된다.

19세기 초 발행된 <韓國水産誌·한국수산지>(1권)에 따르면 군산·옥구 근해에 도미, 준치, 민어, 가자미, 조기, 갈치, 삼치, 농어 등의 각종 어장이 철따라 형성됐다. 또한, 경포마을 주민 400여 명은 봄·여름에 칠산 앞바다(위도 근해)와 충남 죽도에 출어, 조기·준치 등을 어획하였다. 당시 경포는 일본 어민 이주지로 거류민 사무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무역 루트였던 '경포천', 째보선창 조성 이후 쇠락
 
115년 전 ‘군산 장날’ 모습.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군산 100년>에 ‘군산 장날(1905년)’로 기록돼있다.
 115년 전 ‘군산 장날’ 모습.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군산 100년>에 ‘군산 장날(1905년)’로 기록돼있다.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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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시장(市場) 역사는 400년 역사를 지닌 서래장터에서 출발한다. 조선 시대 서래장터는 충청·전라도 각지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농산물, 건어물, 직물 등의 집산지였다. 지도에 나타나듯 이 지역은 초가집이 빽빽한 어촌으로 고깃배와 장삿배가 뻔질나게 드나들던 포구였다. 광복 후에도 경포교(물문다리) 부근에 군산어업조합 관할 어판장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전라우도 군산진지도'를 보면 옥구군 경포리에 큰 하천이 흐르고 여기에 긴 다리 하나가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아흔아홉 다리' 부근이다. 이곳과 서래산 아래에 큰 장이 섰다. 조선 시대부터 오일장이 섰던 '설애장터(경장시장)'이다. 경포(京浦)는 호남지방 물화를 이곳에서 서울로 올려보낸 데서 유래한다.

경포는 '서울 京'에 '浦'는 '개'이므로 우리말 발음으로 '서울개'라 했던 것. 이후 설개→설애(슬애)→서래 등으로 어원이 변이되어 오늘에 이른다. 소설 <탁류>에서는 '스래'로 나온다. 옛 노인들은 경포천 서쪽(중동)은 '안스래', 동쪽(경암동)은 '바깥스래'라 하였다. 지금의 중동로터리 부근까지 고깃배가 드나들었으나 1960년대 후반 매립된다.

경포는 서울을 비롯해 강경, 전주, 태인 등 전국 각지로 물화가 오갈 정도로 큰 포구였다. 군산 개항 이후에도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일제가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1918년 장재동에 상설시장을 개설하고 1920년대 중반 째보선창을 조성하면서 쇠락하였다. '무역 루트'로 어선과 장삿배가 꼬리를 물었던 경포천 역시 '깨꼬랑(갯고랑)'으로 전락한다. (계속)

태그:#경포(서래포구), #경포천, #서래장터, #서래포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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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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