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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는 지리산권 지역에 필요한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과 공익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민간 지원단체로, 아름다운재단과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개소 3년차를 맞아 지리산권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 모임, 공간,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글을 싣습니다.[편집자말]
농한기인 겨울이면 동네마다 서커스단을 떠올리게 하는 커다란 천막이 펼쳐졌다. 약장수가 온 것이다. 약장수는 한 번 오면 열흘 넘게 있다가 가는데, 매일 저녁밥 다 먹을 때쯤 되면 '봉고차'가 마을을 돌면서 동네 사람들을 실어 갔다. 주로 할머니들이었다. 돌아오는 할머니들 손에는 채반이나 미역, 국수 따위가 들려 있었다. 약장수가 공짜로 주는 선물이다.

약장수는 차력쇼 같은 재주를 보이기도 하고, 재치 있는 말솜씨로 할머니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각종 건강보조식품뿐 아니라 이불, 전기장판 같은 살림살이를 아주 비싼 값에 팔곤 한다. 동네 할머니들의 웃음보와 주머니를 싹싹 털어 간 다음, 약장수들은 흔적도 없이 떠난다. 할머니들이 약장수에게 가는 건 자식들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는 일이었단다. 약장수는 할머니 팬(?)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매년 돌아왔다.

그런 약장수도 발 못 붙이는 동네가 있었으니… 바로 '산내놀이단'이 있는 전북 남원시 산내면이다. 약장수를 물리치고 어르신들을 지켜낸(?) 유일한 사례가 아닐까. 그 범상치 않은 '산내놀이단'을 만나고 왔다.

어느 해에 산내면에도 어김없이 약장수가 와서는 노래 재주와 말재주로 어르신들을 꾀어 기가 차도록 비싼 값에 수의를 팔았다는데, 거기 넘어간 어르신도 여럿 된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청년들이 그 현장을 직접 살피러 나갔다.    

"약장수보다 재밌는 놀이판을 벌이자"
 
'살래골 복순씨 생일잔치' 공연 사진
 "살래골 복순씨 생일잔치" 공연 사진
ⓒ 산내놀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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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엔 겨울이면 약장수가 와요. 동네에 젊은 사람 세 명이서 '어른들은 뭐가 좋아서 저렇게 가서 사 오실까' 해서 가봤더니 약장수들을 보고 어르신들이 엄청 재미있어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르신들 약장수한테 안 가시게, 우리가 저렇게 웃겨드리자' 생각하게 된 거죠. 그래서 동네 청년들 모아 놀이단을 만들게 된 거예요." (안오순 단장·용춘란 교육부장)

동네방네 포스터도 붙이고, 각 마을 이장님들과 면사무소에도 도움을 청했다. 청년회, 농민회에서는 차량 운행을 도왔고, 동네 사람들이 떡국도 끓였다. 어르신들을 위한 간식과 선물도 준비했다. 이름하여 '산내겨울놀이마당'이 펼쳐졌다.

첫해 준비한 작품은 '춘향전'이었다. 네 번에 걸쳐 이어지는 마당극에 어르신들이 좋아하실 만한 차력쇼도 선보이고, 트로트 노래도 불렀다. 말 그대로 온 동네가 한바탕 떠들썩하게 놀았다. 어르신들과 주민들의 반응도 상상 이상이었다.

"첫 공연이 정말 대박 났어요. 우리가 너무 열심히 하니까 그 진심이 느껴졌는지 첫 공연에 200명 정도의 어르신들이 오신 거예요. 할머니들이 정말 좋아하셨어요. 춘향전은 다 아는 이야기잖아요. 뻔한 스토리인데도 첫 공연 끝나고 나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하시는 거예요(웃음).

처음에 다들 회비 내고 시작했는데, 첫 공연 끝나고 후원이 정말 많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그다음 해 준비하는 게 엄청 신이 났죠. 그 후로 매년 겨울 공연을 목표로 두고, 각자 할 일 하다가 겨울에 모여서 공연을 했죠." (안오순 단장·용춘란 교육부장)

놀이마당에 참여한 단원들은 모두 산내 주민들이었다. 한동네에 산다고는 하지만, 연습 두 달 만에 한 편의 극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단원들 대부분은 생전 연극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네 번의 공연이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배우 일정이 안 맞아서 어떤 역할은 도중에 배우가 바뀌고, 부끄러워서 그만두는 배우도 있었고. 난리도 아니었죠. 한마디로 대책 없이 시작한 거죠." (안오순 단장·용춘란 교육부장)

안오순 단장도, 용춘란 교육부장도 그렇게 빠진 배우의 자리를 채우다가 산내놀이단의 배우가 됐다.

이렇게 얼떨결에 왔다가 다 함께 어울려 노는 재미와 어르신들 깔깔 웃으며 좋아하시는 모습에 푹 빠져서 단원이 된 사람이 여럿이다. '산내놀이단'이 일종의 산내면민 통과의례가 됐다고 할 정도로 많은 주민이 산내놀이마당에 함께했다. 지금도 산내면으로 이사 온 사람들은 어김없이 안오순씨의 손에 이끌려 산내놀이단으로 모셔진단다.


'배꼽도둑' 산내놀이마당만의 특별함
 
산내겨울놀이마당 포스터
 산내겨울놀이마당 포스터
ⓒ 산내놀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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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겨울놀이마당은 산내 주민이라면 누구나 설 자리가 있는 넉넉하고 포근한 마당이다. 배우들뿐 아니라 배우를 꾸며주는 사람들도, 무대를 설치하고 음향을 맡은 사람들도, 식사와 간식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관객까지도 다 산내 주민이다.  

"각색하시는 분이 본래 극에 없던 인물들을 만들어 넣어요. 배우 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 맞는 인물을 넣거나 하는 방식으로요. 그러니 심청전인데 심청전이 아닌 것 같고, 흥부전도 우리가 알던 흥부전이 아니에요. 제비가 주인공인 것 같았죠. 그게 산내놀이단의 묘미인 것 같아요." (용춘란 교육부장)

"누구나 다 배우가 될 수 있어요. 극 중에 이장, 면장, 스님, 교장 역할이 있으면 실제 산내면의 이장, 면장, 스님, 교장 선생님이 오셔서 다 역할을 소화해주셨어요. 우리가 서로 다 아는 얼굴들이죠." (안오순 단장)

산내겨울놀이마당은 산내 할머니들의 웃음을 먹고 무럭무럭 자랐다. 산내면에서 흩어져 활동하던 '중창단', '농악단' 등의 마을 동아리들이 겨울이면 모두 산내놀이단에 모여서 산내겨울놀이마당을 함께 채웠다. 학교에서 활동하던 학생 동아리 팀들도 매번 재능을 보탰다. 1년 내내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잘 모아뒀다가 한데 모여 시너지 효과를 내는 '촘촘하게, 느슨하게'가 산내놀이마당의 다채로움과 풍성함을 탄탄하게 유지하는 비결인 듯싶다.

"처음엔 어르신들을 잘 몰랐거든요. '심청전' 할 때, 심청 엄마가 관에 들어가는 장면을 위해서 관도 짜고, 상엿소리도 내면서 어른들을 울려보자 했는데, 웬걸. 어른들이 안 울고 웃으시는 거예요. '쟤네가 공연을 준비한다고 관까지 짜왔네!' 하시면서요. 그러다 심청이가 심봉사랑 동냥하러 다닐 때 우시더라고요. 그땐 감정이입이 되셨나 봐요. 처음엔 웃음 포인트, 눈물 포인트를 찾기가 어려웠는데 어르신들이 뭘 재미있어 하는지 7년째 하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됐어요. 어르신들은 익살스러운 몸짓 같은 걸 특히 좋아하세요. 저희가 많이 넘어지면 많이 웃으세요." (안오순 단장)

어르신들을 만날수록 노하우가 쌓였고, 알아가는 만큼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커졌다. 산내놀이단은 이런저런 작은 변화를 시도했다.

"3년 동안은 월 4회 공연했어요. 그러다 너무 힘들어서 어느 해에는 두 번만 하기로 했죠. 그랬더니 좀 허전한 거에요. 한 해 한 해 지나며 돌아가시는 어르신도 있고, 초등학교 강당까지 나오기 어려운 분들도 계시고요.

그래서 우리가 마을로 한 발짝 더 들어가 보자는 결심을 했죠. 마을회관마다 찾아가 공연을 하게 된 거예요. 참 잘한 일 같아요. 관객이 적으니 좀 더 가깝게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요. 어르신들이 공연 중에 직접 노래를 부르시기도 하고, 장기자랑을 하시면서 저희랑 주고받고 놀게 되는 거예요. 더욱 어르신들의 판이 되는 거죠." (안오순 단장)


우리들의 사는 이야기를 공연으로
 
장터에 나가는 어르신들의 삶 이야기를 담은 '살래아리랑' 공연 사진
 장터에 나가는 어르신들의 삶 이야기를 담은 "살래아리랑" 공연 사진
ⓒ 산내놀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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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는 남원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 만인만북 문화제에서 요청을 받고 '남원 만세운동 재현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4월에는 창립총회를 열고, 산내놀이단을 공식 단체로 등록하는 과정도 밟았다. 조금 더 체계를 갖춰 활동해나가기 위해서였다. 그해 겨울, 처음 선보인 창작극 '살래 아리랑'으로 산내놀이단은 새로운 발걸음을 경쾌하게 내디뎠다. 관객층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제는 어르신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 두루두루 즐기는 놀이마당이 되었다.

"역사극을 하고 나니 더 뿌듯한 마음도 들었어요. 우리가 대단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용춘란 교육부장)

"'살래 아리랑'은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 농촌에서 살아오신 어머님들의 삶을 그린 극이었죠. 고사리 뜯고, 감, 사과 농사짓는 산내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담았어요. 그건 연습도 많이 했고, 완성도도 높았어요. 그렇게 하면서 조금 더 욕심이 나더라고요. '우리가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자신감도 붙었어요.

요즘은 어린아이들도 많이 와요. 그래서 이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연을 만들려고 해요. 관객의 자리를 넓혔다고 할 수 있어요. 산내면 주민들 모두를 관객으로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산내 이야기, 우리 삶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싶어요." (안오순 단장)

"처음엔 날 것 그대로, 애드리브로, 그렇게 했어요. 처음엔 쪽대본을 받아 두 번만 연습하고 공연하는 게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늘더라고요. 갈수록 잘하는 거예요. 처음 왔을 때는 사실 제가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기고, 안 해본 캐릭터, 안 해본 스타일에도 도전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용춘란 교육부장)

"단원들에게 매년 겨울이 없어서 힘들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우리도 재밌고 어르신도 재미있게 해드릴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어요. 우리가 즐기는 것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즐겁게 하면 좀 서툴러도 어르신들이 예뻐라 해주세요." (안오순 단장)

산내놀이단을 계속하는 이유

   
"지난해부터는 상시 공연을 해보자는 얘기를 했거든요. 우리가 취미 집단처럼 공연하고 있지만, 거기에도 기량이 필요해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의논하고, 이것저것 배우고 있어요. 그래서 교육부장 역할도 생긴 거죠. 연기 훈련은 물론이고, 마당극에는 악기 표현이 많아서 모든 단원이 악기를 연주하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작품이 없을 때 설장구를 연습하기도 했어요. 물론 단시간에 배워서 무대에서 보여드리기는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한량무, 민요, 그런 것들도 배우고요. 전문 마당극단들이 하는 공연도 보러 다녔어요. 더 많이 보러 다니려 했는데 코로나로 주춤하게 됐죠." (용춘란 교육부장)

"다른 공연을 보러 다니면 부럽기도 해요. 우리가 다 생업이 있으니 그만큼 전문적인 극단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좋은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요. 보는 눈도 생겨요. 그리고 좀 더 진지해진 것 같아요. 최근에는 '바래봉 눈꽃축제' 측에서 의뢰를 받아 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환경마당극'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취소됐어요. 잘해보고 싶었는데 아쉽더라고요. 자체 공연을 하더라도 작품을 완성해보자고 했어요.

저는 이걸 준비하면서 새삼 느꼈지만, 우리 단원들이 뭘 하나 하면 허투루 하지 않아요. 대본팀을 꾸렸는데, 생태 주제이니까 동물들이 주인공이에요. 애벌레에 대해 잘 아시는 마을의 어느 선생님께 가서 동물 습성 등을 배우고 듣고, 공부하며 작업하는 거예요. 새로운 장르니까, 더 욕심을 내게 되죠." (안오순 단장)

산내놀이단은 웅크리게 되는 계절, 추운 겨울에 누구보다 활짝 피어 있는 사람들이다. 산내놀이단 단원들은 누구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주인공의 마음으로 겨울을 맞이한다. 이제 산내면에는 약장수가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는 공연을 해야만 신이 나는 사람들이잖아요. 코로나 때문에 힘이 빠지긴 하지만 아주 재미있게, 최선을 다해 공연을 준비하며 지내고 있어요." (안오순 단장)

"겨울이면 항상 조용하고 그랬는데, 그런 겨울에 북적북적해지는 느낌. 그 느낌이 정말 좋아요. 공연하는 날은 마을마다 이장님 방송하시고, 학교에 아이들이 뛰어놀고. 산내놀이단 덕분에 어둡고 잠잠한 겨울이 아니라 들썩들썩 신나는 겨울로 기억되거든요." (용춘란 교육부장)

다들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 즉 생업이 있는 사람들인데 전문 극단을 꾸리자고 했으면 어찌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꾸준히 열정을 발휘했을까. 곁에 살아가는 어르신들에게 내가 보탬이 될 일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마음 나누며 함께할 또래 이웃들이 있다는 것이 그들의 오랜 열정에 불쏘시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장담한다. 어떤 때에는 생업도 뒤로하고 주저 없이 마음을 쏟으며 함께했을 시간, 그 시간이 바로 '살아가는 것'이었을 테니까.

코로나19가 잠잠해지기만 하면 아마 마스크 너머로 참아왔던 웃음이 펑펑 쏟아지는 산내의 신나는 겨울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 어느 계절이든, 산내놀이단이 '우리 이렇게 엉켜서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갑니다' 하는 것을 오래오래 보여주면 좋겠다. 내 앞집, 옆집, 뒷집, 건넛집 사는 사람들이 다 나와 연결돼 있음을 자꾸만 느끼고 싶다. 


글 | 푸른
사진 | 임현택
기획/진행 | 누리

Author 푸른
내 이름도 별명도 살고 싶은 모습도 '푸른'. 나는 따뜻하거나 뜨거운 사람. 
어린이의 벗 되어 살고 싶다. 어린이 해방을 꿈꾸며 산청에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는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홈페이지와 아름다운재단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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