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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사심을 담아 알리고 싶은 책,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 책을 오마이뉴스 라이프플러스 에디터가 골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4년 전, 응암동에 처음 온 날은 진눈깨비가 내렸다. 아빠의 오래된 차에 몇 박스 되지 않은 짐을 욱여넣고 도착한 응암동 원룸은 생각보다 우중충했다. 나는 군데군데 뜯어지고 누런 벽지와 바닥에 굴러다니는 자잘한 먼지를 보며 괜히 전 세입자를 욕했다. 엄마는 끝없이 투덜거리는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손걸레로 바지런히 방을 닦았고, 아빠는 청소포와 보온재를 사러 나갔다. 

그때를 떠올리면 낮인데도 해가 나지 않아 회색빛이 감돌았던 방의 풍경과 차가운 장판의 촉감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하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으로 구한 자취방이었던 공덕동 지층 원룸에 비하면 불광천변까지 보이는 9층 응암동 방은 잠시간 내게 '수직 상승'했다는 일종의 뿌듯함을 안겨주었지만, 역시나 그뿐이었다. 만족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곳에 발을 들이고 난 순간부터 다시 나는 더 나은 것들과 비교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속상해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사 오고 한동안 낭만적인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다. 가끔 넓직한 창 너머로 시시각각 조명빛이 바뀌는 불광천의 무지개 다리를 보며 맥주를 한 잔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감흥은 얼마 가지 않았다. 날벌레의 사체가 잔뜩 붙어있는 창을 통해 보는 야경은, 저 멀리 한강까지 보이는 도심 오피스의 그것과 분명 차원이 달랐다. 그저 그런 원룸은 어디까지나 그저 그런 원룸일 뿐이었다. 서울에 올라온 이후 오랫동안 제대로 된 나만의 공간을 가져본 적 없었던 나는, 늘 남들에게 자랑스레 내보일 수 없는 그 공간이 곧 나의 전부인 양 전전긍긍했다. 
 
 불광천 벚꽃길을 산책하는 시민들
 불광천 벚꽃길을 산책하는 시민들
ⓒ 이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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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의 먹구름이 차차 걷힌 건, 응암동이라는 동네에서 안정감을 주는 풍경을 하나둘 발견하고부터다. 불광천에 산책 나온 게 무척이나 기분 좋은지 혀를 살짝 내밀고 종종거리며 주인을 따라가는 강아지들, 천변 다리 밑에서 세상 진지하게 장기를 두거나 에어로빅을 추는 어르신들, 어딘가에서 소리를 지르며 뛰어노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아이들. 여기 사람이 산다,는 감각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구체적인 풍경들이 거기 있었다.

물론 삶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보인다는 것은, 목격하고 싶지 않은 타인의 흔적까지 마주하게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골목길에 진동하는 고등어구이 비린내라든가, 빨랫대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하얀 '메리야스' 같은 것들. 그런데 나는 때로 응암동의 그 적나라함 마저 좋았다.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는 게 좋았다. 그 덕분에, 보잘 것 없는 내 두 번째 자취방에도 차차 정을 붙일 수 있었다. 그래서 계약 연장까지 해가며 응암동 그 집에 3년을 살았다.

이후 집값이 더 비싸고 회사와 가까운 동네에 있는 신축 건물에 전셋집을 구해 이사를 갔지만, 정을 붙이기도 전에 다시 응암동으로 돌아왔다. 물론 자의는 아니었고,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이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스트레스가 컸지만, 한편으론 은근히 설렌 것도 사실이다. 꼭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경험 덕분에, 나는 집이 말 그대로 '삶의 터전'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집이라는 공간에는 단순히 깔끔하고 세련된 인테리어, 비싼 값어치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5년간 여섯 번 이사했습니다, 왜냐면요
 
 집을 쫓는 모험, 정성갑(지은이).
 집을 쫓는 모험, 정성갑(지은이).
ⓒ 브.레드(b.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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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어떨 때는 돈을 좇아, 또 어떨 때는 낭만을 좇아" 15년간 여섯 번을 이사했다는 정성갑 작가의 에세이 <집을 쫓는 모험>을 읽으면서, 유난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그 수고롭고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우리에게 맞는 집'을 찾기 위한 모험을 포기하지 않은 저자와 그 가족들에게 감탄했을 뿐이다.
 
이 책은 단독주택 예찬론이 아니다. 그저 집은 충분히 '모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 p.10
 
정성갑 작가는 아내와 두 딸과 함께 현재 종로구에 한 협소 주택에 살고 있다. 한 층의 면적이 10평도 되지 않는 아담한 공간이지만, 한뼘 정원엔 풍성하게 꽃이 피고, 창밖으로 시원하게 담쟁이 넝쿨이 보인다.

작지만 내실있고, 과시하지 않으면서 제 나름의 매력을 고고하게 선보이는 집. 그런 집을 그려보자면, 왠지 그 집에 사는 주인도 세속적인 욕망에서 초연한 모습일 것만 같다. 저자도 처음엔 '아파트 레이스'에 온몸을 내던지는 보통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뉴타운은 매혹적인 이름이었다. 뉴 라이프를 시작하는 내게도 딱인 듯했다. 사람들이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꼭 길음뉴타운이라고 했다. 옆 사람이 알은체하며 '성갑이 길음동 아파트에 살아요' 하면 '길음동 아파트 아니고 길음뉴타운!' 하고 정정해주었다. - p.31
 
15년 전, 정성갑 작가가 처음 신혼 생활을 시작한 곳은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시범 뉴타운을 지정하며 내로라하는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한 동네, 길음동이었다. 그는 여러 호재와 개발에 대한 장밋빛 전망으로 들썩이던 그곳에 부모님이 쥐어준 돈과 대출을 합쳐 신혼집을 마련한다.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브랜드 아파트였다.

'내가 사는 곳이 곧 나를 말해준다'는 시대에, 브랜드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뿌듯함도 잠시, 시간이 지날수록 아파트가 주는 편리함과 안온함은 심심함으로 바뀌었고 슬슬 좀이 쑤시기 시작한다. 때마침 이사온 지 3년째 되던 해에, 아파트 값은 대략 1억이 올라있었다.

그는 곧바로 아파트를 팔고, 근처에 더 비싼 브랜드 아파트 분양권을 산다. 적금을 깨고, 대출을 받고, 입주 전 2년 동안 어머니 집에 얹혀사는 것을 감수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길음뉴타운만이 희망의 땅이고, 그곳만이 약속의 땅 같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예상대로 되지 않는 법.

어머니와 신혼부부의 불편한 동거까지 감내해가며 2년을 버티고 입주한 집은 생각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엘리베이터에서 아파트 층수를 누르는 순간부터 다른 사람과 나의 삶을 비교하는 일상이 시작됐다. 심지어 동 대표 선거에 나갈 거라는 옆집 사람은 이삿날 밤 대뜸 초인종을 눌러 "자가냐, 전세냐"를 묻기도 했다.

설상가상, 기대하던 아파트 값은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매일 아침 체크하던, "생명의 피요, 수혈의 상징"이나 다름 없었던 부동산 시세 페이지의 빨간 삼각형(▲)도 자취를 감췄다.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부동산 시장도 덩달아 침체됐던 시기였다.

당시 잡지 기자로 일하며 수많은 건축가들을 인터뷰했던 저자에게, '재밌는 집'에 대한 고민이 커져갔다. 결국, "좋지 않은 기억과 힘들었던 시간을 잊고 새로운 일상을 위해 리셋 버튼을 누르는 일"이 필요했고, 답은 다시 '이사'였다.

크고 확실한 행복, 집을 찾는 모험 

이 가족이 다음으로 찾은 새로운 터전은 전세로 얻은 서촌의 한옥이었다. 달빛이 스며든 마당과 거실이 마치 '작은 연극무대' 같았던 곳. 동시에 에어컨이 없고, 주차 공간도 마땅치 않은 데다, 때로는 수도관이 터지고 제비가 사방에 싸놓은 똥을 수시로 치워야 하는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마주해야만 하는 곳. 하지만 적어도 그 집은 '이야기가 쌓이는 곳' 있었다고 저자는 회상한다.
 
우리는 한옥에서 처음 '집'을 제대로 경험했다. 집이 얼마나 큰 즐거움과 행복, 위안을 주는지도 알게 됐다. - p.143
 
보통은 이쯤에서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끝나고,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기 마련이지만, 저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이후 서촌 한옥에 들어가며 전세로 내놓았던 두 번째 아파트를 별다른 이득 없이 3억5000만 원에 파는데, 그 후 그 집이 3~4년 만에 8억까지 치솟는 배 아픈 상황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수시로 화가 치밀어 올랐고 얼굴에 열꽃이 피"는 일. 뿐만 아니라, 기껏 돈과 정성을 들여 가꿔놓은 한옥은 계약 연장이 되지 않았다. 

결국 저자는 다시 '집을 쫓는 모험'을 시작한다. "아파트를 팔았지만 한옥 살 돈은 안 돼 꿩 대신 닭의 심정으로" 서촌 빌라를 샀다가, 또 다시 한옥 생활이 그리워 "정신을 못 차리고" 화장실이 밖에 있는 한옥을 덜컥 계약한다. 그리고 지금은 보험과 예금, 대출을 탈탈 털고, 온갖 변수와 사고를 극복하며 작은 협소주택을 지었다.

그런데 요약하기도 숨가쁜 이 연대기마저도 아직 '결론'이 난 건 아닌 듯하다. "돈은 잃었지만 집을 중심으로 다양한 경험을 했고, 나에겐 단독주택이 맞는다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됐다"는 저자는, "이제 이 길에서 계속 꿈을 꾸면 된다"고 말한다. '계속'. 그러니까, 그의 모험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소리다.

집에 관해서라면 용감하게 도전하는 이 수고로운 여정을 쫓다 보니, 내 마음도 속절없이 흔들린다. 저자는 서두에서 "아파트 말고도 다른 집이 많으니 그 집을 한번 살펴보라고 이야기" 하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저자의 제안은 제법 효과가 있는 듯하다. 책장을 덮으니, 당장 손에 쥘 수 없더라도 내가 살고 싶은 공간에 대한 상상이 뭉개뭉개 피어오르는 걸 보니 말이다.
 
집을 찾는 모험은 크고 확실한 행복, 즉 '대확행'을 위한 여정이다. 아, 이곳은 아니야 하는 경우도 몇 번 있겠지만 그 허들을 차례로 넘고 나면 점점 선택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옥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빌라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타운 하우스나 협소주택이 마지막 선택지가 될 수 있다. ... 내 라이프 스타일과 맞는 집은 그 자체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확실한 '대확행'이다. 집만큼 좋고, 집만큼 중요한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 p.294

돌아보니 집을 찾는 모험은 나를 찾아가는 모험이기도 했다. 집의 모험을 통해 진정 나답게 사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 p.299

집을 쫓는 모험

정성갑 (지은이), 브.레드(b.read)(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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