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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부시가도(1933)」에 표시, 출처 :부산근대지도모음집(2012)
▲ 박재혁과 친구들의 삶터 지도  「부산부시가도(1933)」에 표시, 출처 :부산근대지도모음집(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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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공단의 거리인 범일·좌천마을

박재혁은 증대산성 아래의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자성대 동쪽에 동천(東川)이 흐르고, 팔금산에서 유래하는 범천(凡川, 호계천)이 동천과 합류하고, 증대산에서 유래하는 좌자천(佐自川)이 지금의 데레사여고를 끼고 범일동과 좌천동 경계로 흘렀다. 범천과 좌자천 사이의 마을이 오늘날 부산 동구 범일동이다. 수정산에서 유래하는 부산천(釜山川)이 현재의 동부경찰서 쪽으로 흘러내렸다. 부산 동구 좌천동은 좌자천과 부산천 사이의 마을이다. 구봉산에서 유래하는 초량천(草梁川)과 부산천 사이의 마을이 수정동이다.

박재혁의 집은 좌자천과 몇 발자국 되지 않지만 좌천동 마을에 가려면 좌자천을 건너야 했다. 당시는 범일동보다 좌천동이 근대적 마을이었다. 좌자천은 1933년 '부산부시가도'에도 표시된 것으로 보아 박재혁의 생존까지 복개되지 않았다. 하천이 지역 경계가 된 것으로 보면 하천의 폭이 좁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천과 좌자천에서 운반된 토사가 쌓이며 형성된 모래톱에 있던 곳에는 사도촌(沙道村) 마을이 있었다. 사도촌 마을은 좌천 1동 아래쪽에서 범일 5동 상부까지 있던 마을로, 현재 대부분이 철도 용지로 편입되었다. 동쪽은 성남초등학교가 있고, 서쪽으로는 일신기독병원이 있다. 마을이 있던 일부에는 중앙 대로가 통과하며 좌천동 가구 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문현동 쪽의 동천 하류에는 반월 모양 소가 있었다. 연못에 꽃이 피었다. 이 연못을 따라 형성되었던 연동개(蓮東開) 마을이 있었다.

좌자천과 자성대 사이에 부산포 왜관(1407년, 태종 7)이 있었다. 왜관 근처에는 일본인과 교역을 위한 시장이 있었다. 그 시장이 지금 부산진시장의 유래였을 것이다. 부산포 왜관과 조선인 거주 지역을 있던 길 아래에 노하(路下) 마을이 있었다. 현재 부산진시장의 동쪽으로 미싱사가 모여 있는 골목길로 보인다. 노하마을은 1913년 서쪽으로 부산진시장이 개설되며 시장 구역에 편입되어 급속히 변화하였다.
 
조선인 노하마을은 초가집이었고 자성대에 있는 부산진지성은 그 형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출처 : 「Coree」, Musee des Arts Decoratifs, Paris, France.)
▲ 1900년 전후 부산 자성대 부근 마을 조선인 노하마을은 초가집이었고 자성대에 있는 부산진지성은 그 형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출처 : 「Coree」, Musee des Arts Decoratifs, 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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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는 소금(소곰)을 굽던 마을인 소고 마을이 있었다. 당시에는 염전에서 소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금물을 끓여서 만들었던 자염(煮鹽)이었다. 서해안에 많이 있는 천일염은 해수를 끌어들인 뒤에 바람과 햇볕으로 수분을 점차 증발시켜서 결정시킨 소금이다. 천일염은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태양염 또는 청염(淸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나무가 매우 필요했다.

고기나 소금은 부를 가져오는 산 아래에 있어 그 산을 부산(富山)이라 불렀다. 바다에서 보니 부산(富山)의 꼭대기가 마치 소금을 굽는 솥뚜껑같이 보여 부산(釜山)이라 불렀을 수 있다. 또는 산의 생김새가 거꾸로 뒤집은 솥같기 때문에 또는 임란 때 일본성을 지으면서 마치 떡시루같이 위가 평평하여 증산(甑山)으로 불렀을 수 있다. 당시의 부산은 부산진성이 있었던 지금의 증대산이라 추측된다. 임란 이후 자성대로 부산진성을 옮기면서 자성대를 부산으로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박재혁의 집은 좌자천에 가까웠고 지리적으로는 노하마을과 사도천마을 위쪽이었다. 박재혁의 집이 있었던 범일동이지만 실상 좌천동 지역이었다. 즉 그의 집에서 지금의 데레사여고와 범내골 방향의 밤일동은 집이 드물었다. 그리고 노하마을과 자성대의 북쪽 지역은 논이었다. 결국 박재혁 집부터 부산천까지의 지역이 조선인 밀집지역이었다.

박재혁 집은 좌자천의 '좌(佐)'와 부산진의 '진(鎭)'이 합쳐서 좌진이 되었던 좌진내마을, 즉 자진내마을과 가까웠다. 박재혁 친구들은 자진내마을 아이들이었다. 지금 정공단 주변 마을이다. 마을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제일 먼저 상륙한 부산진성 부근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부산진성 안쪽에 있는 곳이다. 하지만 임란 때 증대에 왜성을 쌓은 후 퇴각한 후 부산진성은 지금의 자성대로 옮겨가고 옛 부산진성 남문 바닷가 일대는 마을이 형성된 듯하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04년(고종 41) 동래군 동평면 좌천동이다.

왜관이 있었던 범일·좌천동 마을

조선 시대에는 자성대 앞 바닷가를 부산포, 좌천동 앞 바닷가를 개운포로, 수정동 앞 바닷가를 두모포로 불렸다. 부산포 왜관(1407년, 태종 7, 현 부산진시장 주변), 두모진 왜관(1607, 선조 40, 현 수정초 부근, 고관)이 있었다. 두문포 왜관이 1678년(숙종 4)에 초량왜관(현 용두산 부근)으로 옮겼다.

부산진지역은 부산포 왜관과 두문포 왜관이 옮겨지면서 조선인 마을이 그 지역에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래서 부산진 사람은 일본이나 일본인에 대해 적대적이기보다 우호적인 경향이었다. 친일의 마을이었다. 생계 문제는 나라, 민족, 정치를 뛰어넘는 현실이다.
 
정면 바다는 부산포이고 왼쪽이 자성대, 중앙이 영가대이다. 사진 아래쪽 숲 오른쪽 일대가 박재혁이 살았던 자진내마을로 추정된다. 출처 : 「Coree」, Musee des Arts Decoratifs, Paris, France
▲ 1900년 전후 자성대 및 범일 좌천동 마을 정면 바다는 부산포이고 왼쪽이 자성대, 중앙이 영가대이다. 사진 아래쪽 숲 오른쪽 일대가 박재혁이 살았던 자진내마을로 추정된다. 출처 : 「Coree」, Musee des Arts Decoratifs, 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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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사람들은 합법과 불법을 오가며 일본인과 교류했다. 물건과 돈을 주고받는 경제적 관계뿐 아니라 일본인들은 조선의 생활·문화와 풍속을 알아가고, 부산사람들은 일본의 생활·문화와 풍속을 알아가는 교류도 많았다. 19세기 전반에 이르면 왜관 주변 지역에는 일본 놀이, 일본 물품, 일본 음식을 즐기는 일본풍이 유행할 정도였다. 초량왜관에서의 교류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전까지 약 200년 동안 지속되었다."(부산역사산책, 2020, 200쪽.)

동래지방과 달리 부산진성이 있었던 부산진지역은 유교적인 교화와 유학의 보급 등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 다른 지방에 비해 불모지인 상태였다. 부산진은 단순히 일본과 가까운 남쪽 변방의 바닷가 마을(海邑), 갯마을(浦村)이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국가로부터 차별과 버림을 받았다. 이 고장 사람은 과거에 응시하여도 급제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 명종 때 송승서(宋承緖)가 겨우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지역은 학문을 숭상하는 지역이 아니었다. 벼슬아치로 입신출세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주민들의 대부분은 농사와 어업에 힘쓰고 소규모 상업에 종사하는 쇠잔한 민간인들이었다. 
 
증대산성은 마치 솥뚜껑을 거꾸로 한 시루 형태를 가진 산이라 증산(甑山)이라 불리웠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부산동구 부산진 왜성 성지에서 본 출성(1918) 증대산성은 마치 솥뚜껑을 거꾸로 한 시루 형태를 가진 산이라 증산(甑山)이라 불리웠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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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개항 이후 일본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마을 구성원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부산진 범일・좌천 사람들은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사람들과 근대적 문물을 수용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890년대 전후로 태어난 좌천동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들의 후손들이다. 범일 좌천동에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들이 가진 꿈의 실현자였다. 집들도 점차 초가집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개항과 더불어 근대와 전근대가 갈등하는 한국 최초의 지역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일본 친화적인 지역이었다. 전통적 질서 체계와 사회관계를 가졌던 동래지역과는 사람들의 생각이 달랐다. 양반 계층은 지극히 드문 지역이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의 조선원정군 제1진 1만8700여 명이 부산 앞바다에 쳐들어왔다. 왜적은 14일 새벽 짙은 안개를 틈타 지금의 우암동에서 일시에 상륙하여 부산진성을 포위한 뒤 삼면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부산진성의 민호(民戶)는 300여 호로 군민을 합하여도 일본의 대군에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병력도 불과 1000여 명이었다.

조총과 화살의 전투는 중과부적이었다. 부산진첨사 정발은 성 안의 군민과 더불어 끝까지 항전하였고, 결국 전사하였다. 전투는 여섯 시경에 시작하여 열 시에서 열두 시경(혹은 여덟 시 경)에 끝났다. 전투는 참혹했다. 일본군은 성 안의 군대는 물론 부녀자, 어린아이 심지어 개와 고양이까지 모두 죽였다. 온 영(營)에 해골이 쌓였다. 부산진성은 죽음의 성이었다. 군·관·민이 나라의 관문을 지키기 위해 결사 항전했던 전투로, 일본군도 임진왜란 때 가장 용감한 장수는 부산의 흑의 장군(黑衣將軍) 정발이라고 하였다. 부산진성은 아군의 공동무덤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은 일본성[왜성]으로 개조되었다. 정공단은 조선 부산진성의 남문이었다. 정공단은 애국심과 침략자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다. 1900년 전후 지금의 정공단 위쪽에는 집이 거의 없었다. 1910년대까지 증대산은 민둥산으로 성터만 있는 돌산이었고 산허리는 밭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부산진 공동묘지가 되었다. 나중에 박재혁도 묻혔다.

부산진 왜성이 있는 증대산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산을 오르면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경사지다. 정상에 가까울수록 일본성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성은 급경사를 따라 여러 겹의 성벽을 감싸고 있다. 조선성이 기울기가 80도 이상 수직에 가깝다면 일본성은 밑이 60도 정도로 완만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경사가 급하다.

당시 지도를 보면 소서성지(小西城址)로 표기하였다. 고니시 유키나(小西行長)가 축조한 성이었다. 일본성을 조선국과 명국 연합군이 함락시킨 곳이 한 곳도 없었다. 몇 겹으로 에워싸인 일본성을 그만큼 견고했다. 외성(外城)을 깨트려도 내성(內城)이 있어서 공략하기 어려웠다. 개항 이후 조선이 일본을 이기는 것은 일본성을 공략하는 것만큼 어려웠다. 조선성의 일본성으로의 변모는 조선의 운명을 보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개항 이후 점점 부산이 일본화, 조선 속의 일본으로 바뀌는 것과 같다.

역사적 시간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역사적 시간은 누구나 살아간다. 그 시간을 온몸으로 체득하며 역사적 인간이 되는 사람이 있지만, 평범한 시간의 사람이 되기도 한다. 1890년 후반 격변의 시대에 태어난 좌천동 정공단의 아이들은 역사적 인간이 되어갔다. 박재혁이 태어나던 시절, 조선은 근대화의 길목에서 자주의 길과 외세 의존적 길의 갈림길에 있었던 격변의 시절이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중립을 꿈꾸는 사람도 있었다.
 
「19세기 후반 동래부산고지도」에 지명 표시, 출처-부산근대지도모음집2012)
▲ 부산지역 지도 「19세기 후반 동래부산고지도」에 지명 표시, 출처-부산근대지도모음집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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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글쓴이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주변인과 시』, 『주변인과 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 이 기사는 폴리뉴스에도 연재됩니다.


태그:#의열단원 박재혁, #이병길, #부산진왜성, #정공단, #증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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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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