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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월요일 오후 2시부터 '2020 NPO 국제 컨퍼런스 - 전환을 통한 회복, 공존을 위한 연결'(http://www.npofair.kr)이 개최된다. 온라인으로 진행될 이번 행사의 사전 녹화를 마친 전치형 카이스트 교수와 권오성 성신여자대학교 교수를 만나 짧은 발표에 담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생동감 넘치는 발표(영상)를 보기 전에 글을 읽는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기자말]
"아무런 보호가 없는 정말 원시적인 상황을 사람들이 극복해온 게 지난 200년 동안 노동법의 발전 역사에요. 그걸 도로 걷어내자는 건 21세기를 18세기로 되돌리자는 말이랑 똑같다고 봐요."

이른바 '플랫폼 노동'을 '노동법'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려는 이들에게 권오성 성신여대 교수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법을 안 지키는 나쁜 놈들을 옹호하는 주장"이라고도 했습니다. 정말 낡은 건 '노동법'이 아니라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이란 뜻으로 읽힙니다.

권 교수는 울타리를 어디까지 칠 것인가를 정하는 건 "정치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울타리 안과 밖을 가르는 기준은 흔히 생각하듯 "법으로 명확하게 규정돼있는 게 아니라 다른 모든 사회적 기준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합의를 통해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뜻입니다. 

"(기업과 노동자들 사이의) 위계적 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필요한 거고 지금까지 인류가 발명해 낸 제도 중에서는 노동법이 그런 역할을 하는 데 가장 부합하죠. 따라서 플랫폼 노동자들도 노동법으로 보호를 받는 노동자여야 한다고 봐요."

플랫폼 노동을 '필요할 때만 일을 할 수 있게 한 혁신'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두고는 "기업한테는 행복한 일이지만 과연 노동자한테도 그럴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최소한의 수익조차 보장해주지 않으면서 필요할 때면 언제든 일을 시킬 수 있게 되면서 결국 "일하는 사람의 종속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보호와 안전만 걷어낸 셈"이라는 겁니다. 

"플랫폼 기업이 혁신이라고 주장하는 사업 모델의 본질은 규제의 회피를 통해 자신들이 부담해야 할 비용을 사회에, 또 플랫폼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거죠. 자신의 가죽이 아니라 남의 가죽을 벗기는 일이에요."

권오성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2002년부터 법무법인 KCL에서 기업 자문을 위주로 변호사 업무를 하였습니다. 2007년부터는 성신여자대학교에서 노동법, 사회보장법을 가르치고 있고, 경기지방노동위원회 공익위원이기도 합니다.

아래는 권오성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입니다. 인터뷰는 지난 9월 28일 그의 성신여대 연구실에서 진행했으며, 주말 사이 다시 서면으로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플랫폼 노동자, 노동법으로 보호받는 노동자여야
 
2020 NPO 국제 컨퍼런스 <공존을 위한 연결> 세션에서 "문 앞에 노동자가 도착했습니다"라는 주제로 발표하고 있는 권오성 성신여대 교수
 2020 NPO 국제 컨퍼런스 <공존을 위한 연결> 세션에서 "문 앞에 노동자가 도착했습니다"라는 주제로 발표하고 있는 권오성 성신여대 교수
ⓒ 서울시NPO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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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랫폼 노동'을 둘러싼 논란의 밑바닥에는 플랫폼을 매개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이들을 과연 '노동자'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깔려 있습니다. 이른바 '노동자성'을 따지는 질문인데, 교수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동자성은 노동법이라는 법률의 문턱과도 같아요. 이 문턱을 넘으면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만, 문턱에 걸리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거죠. 노동자성을 일반적으로 '사용 종속 관계' 아래서 노무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요. 그런데 이 '사용 종속 관계' 자체가 매우 추상적이고 모호해요.

더 큰 문제는 현실에서의 종속의 정도는 아날로그처럼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은데, 노동자성을 판단하는 일은 마치 디지털처럼 0 아니면 1로 나눠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까지는 노동자고, 여기서부터는 아니라는 식으로.

따라서 사람마다 노동자성의 판단에 관한 마음속 기준이 달라요. 흔히 생각하듯이 노동자성은 법으로 명확하게 규정돼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다른 모든 사회적 기준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합의를 통해 결정해야 할 '정치의 문제'예요."

- 플랫폼 기업들은 늘 계약을 앞세웁니다.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계약 관계가 아니라는 거죠.
"베블런이 말한 것처럼 대등한 사람들 사이에 자유롭게 계약이 이뤄질 때는 사회적 자원의 배분이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지만, 위계적 관계에선 그렇지 않죠. 당연히 불공정한 계약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착취로 이어져요. 그걸 교정하기 위한 게 노동법의 시작이에요.

플랫폼 기업이랑 플랫폼 노동자들 사이의 계약도 자율에 맡겨놓으면 당연히 착취가 발생할 수밖에 없어요. 이 위계적 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필요한 거고 지금까지 인류가 발명해 낸 제도 중에서는 노동법이 그런 역할을 하는 데 가장 부합하죠. 따라서 플랫폼 노동자들도 노동법으로 보호를 받는 노동자여야 한다고 봐요.

타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민주성의 결핍과 경제적 의존성으로 특징지어지는 관계 속에서 일을 해요. 일의 내용을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타인이 결정한 거래조건으로, 타인의 사업을 위해 일을 하죠.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플랫폼 노동자들이 노동자가 아니라 사장님으로 계약한다고 해서 이러한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에요. 노동법의 목표는 이러한 취약성을 최소화하거나 취약성으로 초래되는 원치 않는 결과를 방지함으로써 보호를 제공하는 거죠."

- 디지털 플랫폼의 등장으로 일하고 싶을 때만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말합니다.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낸 놀라운 혁신이라는 주장이죠.
"필요할 때만 일을 시킬 수 있다는 건 기업한테는 행복한 일이지만, 과연 노동자한테도 그럴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요.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 시간 주권을 확대한다는 측면은 미니멈 개런티, 그러니까 최소한의 수익이 보장될 때에만 긍정적일 수 있죠. 영화 <미안해요, 리키>(2019)를 보면 '제로 아워 콘트랙트(Zero-Hour Contract, 0시간 계약)'가 나오는데, 최저 노동 시간 없이 필요할 때만 와서 일을 하면 딱 일한 만큼만 돈을 주는 계약 방식이에요. 그런 식의 계약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영화가 잘 보여주고 있죠.

적어도 대륙법계 국가들에서는 '소정 노동 시간'이라고 해서 노동시간을 15시간으로 정했으면 일이 없어도 15시간만큼의 임금을 줘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두고 있어요. '임노동'에서 '임'은 빌려준다는 뜻이니까 임노동은 노동을 빌려준다는 뜻이에요. 내가 노동할 시간을 빌려주고 그 빌려준 시간에 대한 대가를 받는 계약이죠. 시민혁명을 통해 얻은 자유로 아이러니하게도 '종속과 안전'이 묶인 패키지를 구매한 게 노동 계약이에요.

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진 자본이 이 패키지를 잘라낼 수가 없었어요. 당장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어디 가서 구해오는 게 쉽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기업은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일하지 않는 대기시간에도 임금을 줘가면서 배타적으로 데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런데 지금은 디지털 플랫폼으로 일할 사람을 빠르고 쉽게 구할 수 있게 됐죠. 사용자 자본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좋아진 거예요. 

필요할 때만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아름다워 보이는 건 자본가에게만 그렇다고 생각해요. 노동의 측면에서는 안전성을 완전히 파편화시켜버린 것에 불과하죠. 일하는 사람의 종속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보호와 안전만 걷어낸 셈이에요."

- 기존 노동법이라는 울타리는 낡아서 플랫폼 노동 같은 새로운 노동을 아우를 수 없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노동법 무용론으로 들리기도 하는데,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나이가 들면 키가 줄고, 배가 나오죠. 그러면 옷을 벗어젖히고 다녀야 하나요? 옷을 고쳐 입어야지. 노동법 무용론을 주장하는 건 미친 주장이라고 봐요. 은닉된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죠. 

200년 전 원생적 노동관계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자본주의 초기엔 정말 요만한 꼬마들이 지하 갱도에 들어가서 석탄을 캐 와야 했고, 여성들이 출산하자마자 다시 방직기를 돌려야 했어요. 노동법이 없던 시절의 노동관계라는 게 그런 식이었어요. 그런 원생적 관계, 아무런 보호가 없는 정말 원시적인 상황을 사람들이 극복해온 게 지난 200년 동안 노동법의 발전 역사에요. 그걸 도로 걷어내자는 건 21세기를 18세기로 되돌리자는 말이랑 똑같다고 봐요.

재밌는 건 최근까지도 기존 법을 플랫폼 경제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결정할 체계적인 노력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러면서 법이 낡았다는 선동만 하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응답해야 할 질문은 '현행 법체계에 어떤 결함이 있는가' 또는 '플랫폼 노동자의 보호를 위하여 이러한 결함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예요.

한 가지 분명한 건, 세계적으로 기존 법률을 플랫폼 경제에는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플랫폼 기업의 이익을 더 잘 보장할 수 있는 입법이 필요하다는 따위의 주장은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이런 주장들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어요."

- 노동법을 연구한다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주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법학자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법의 제일 위에 두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경제, 시장 이런 걸 제일 위에 둬요. 다른 사회과학과 마찬가지로 법학도 가치 체계고, 사람마다 어떤 도그마(학설)를 중심에 두느냐에 따라서 논쟁 체계가 달라져요.

저는 인간의 존엄을 위해 법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거고, 반대로 하이에크의 세례를 받은 학자들은 효율이나 경쟁 같은 것들을 중심에 두고 있는 거죠. 시장에 사람을 맞춰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저는 그건 노동법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른 법들도 이념적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노동법은 전쟁 같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누군가는 이런 얘기들을 세게 해야 하죠. 안 그러면 노동법 무용론 같은 주장들이 맞는 줄 알잖아요."

"플랫폼 기업이 말하는 혁신, 착취라는 이름이 더 어울려"

-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플랫폼 노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로 포장된 세련된 이미지와는 달리 이들이 일하는 모습은 불안해보일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 크고 작은 사고들이 끊이지 않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플랫폼 기업들의 노력이 아쉽습니다.
"전통적인 노동법은 임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자에게 다양한 법적 책임을 부과하고 있어요. 전통적 사회보장의 두 기둥 중 하나인 사회보험제도는 사업주에게 사회보험료를 부담하게 하거나 사회보험료의 징수에 조력하게 하죠. 또 세법은 사용자에게 노동자의 소득과세에 대한 원천징수의무를 부과해 효율적인 징세에 조력하도록 해요. 이렇게 징수된 조세는 사회보장제도의 또 다른 하나의 기둥인 공공부조의 재원으로 활용됩니다. 기업의 이러한 기능은 자본가들이 기업의 법인격 뒤에 숨어 누리는 유한책임이라는 특권의 로얄티(사용료)에 해당하는 셈이죠.

그런데 플랫폼 기업은 노동자를 노동자가 아닌 것으로 은폐함으로써 이러한 법적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해요.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혁신은 그저 노동자의 오분류(misclassification)를 통해서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에 불과하죠. 이들의 은폐가 성공하면 복지국가도 파탄 날 수밖에 없어요.

배달 라이더들은 목줄이 묶인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토해내듯 자신들이 벌어들인 배달료를 온라인 플랫폼에 토해내지만, 온라인 플랫폼은 몇십 몇백 배수로 투자를 받아 엑시트(exit) 할 생각에만 눈이 벌게져 있죠. 사용자로서의 법적 책임을 지는 일 따위는 혁신에 매진하는 기업가의 몫은 아니라고 세련되게 외면하고 있어요. 

'혁신'은 문자 그대로 보면 가죽을 새롭게 한다. 다시 말해 새살이 돋도록 자신의 가죽을 벗긴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플랫폼 기업이 혁신이라고 주장하는 사업 모델의 본질은 규제의 회피를 통해 자신들이 부담해야 할 비용을 사회에, 또 플랫폼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거죠. 자신의 가죽이 아니라 남의 가죽을 벗기는 일이에요. 이러한 비용의 외부화, 비용의 사회화에는 혁신보다는 착취라는 이름이 더 어울려요."

- 플랫폼 기업의 행태 가운데 가장 비인간적이라고 느껴지는 건 배달 라이더들을 분초 단위로 압박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사고에 대한 책임은 전혀 지고 있지 않죠. 피자 배달 30분제가 폐지된 지 10년이 다 돼 가는데 AI(인공지능) 같은 첨단 기술로 포장해 훨씬 더 강하게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행태를 법으로 막을 방법은 없을까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후진 제도라고 생각은 하지만 만약 손해배상을 100억 원 정도 물게 하면 더는 그렇게 안 하겠죠. 결국 기업의 의사 결정은 편익과 효용 간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니 손해배상을 물려서라도 노동자를 몰아붙여서 죽음에 이르게 하면 기업 운명도 휘청거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죠.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하던 청년이 죽었을 때 벌금 겨우 2,000만 원 나왔어요. 산업안전법 위반으로 벌금 제일 많이 나와 봐야 2,000만 원, 보통은 500만 원 나와요. 그러니 안전에 투자하기보다 계속 압박을 가하는 게 더 이득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거죠. 노동자가 죽거나, 시민의 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회사가 망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하지 않으면 쉽게 안 바뀔 거라고 봐요."

- 앞으로 플랫폼 노동자들을 법으로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연화된 비정형 노동자가 늘어나는 현실에서 노동법을 그 목적에 다시 일치시키기 위한 법원과 입법자의 노력이 필요해요. 짧은 시간 내에 결실을 보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무엇이 요구되는가'는 명확히 할 필요가 있어요.

노동자가 엄격한 의미에서 종속적인 상황에 있을 때만 노동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게 전통적 사고예요. 하지만 독립노동의 증가는 기존의 법적 틀 안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게 사실이죠. 따라서 타인을 위해 같은 노무를 제공하면서도 계약에 의해 노동법, 사회보장법의 보호를 받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의 격차를 줄이는 게 필요해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를 노동자가 아닌 것으로 오분류 한 사용자가 벌어들이는 부정한 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용자의 '규범 회피 행위'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적 대응도 필요해요. 다시 말하지만, 그들을 뭐라 부르든 간에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호 필요성이라는 헌법상의 요청을 전제로, 누군가에게 일을 시켜 이익을 얻는 기업에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우는 게 공정하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지휘·명령과 경제적 의존 아래서 일을 하니까요. 노동법의 목표는 일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겁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노동법의 목표는 일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

- 모든 일하는 사람을 보호대상으로 하는 '일하는 사람의 보호를 위한 법률'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걸 들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고용상 지위나 계약 형태와 무관하게 노동을 제공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 공통적인 최소한의 보호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에요. 플랫폼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라면서 이들만을 대상으로 별도의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노동법의 보호로부터 이들을 배제할 위험이 있어요. 노동이 점점 더 잘게 쪼개지고 분절되면 기업들은 자꾸 꼼수를 발휘하게 되니까요. 어떻게든 노동자를 노동자 아닌 존재로 만들려고 하면서...

따라서 복잡한 기준으로 노동자를 분절하고 또 일부를 배제하기보다는 모든 일하는 사람을 하나의 범주로 통합하고 포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해요. 전통적인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일하는 사람'을 포괄하는, 기초가 되는 일반법을 제정하자는 거예요. 발상을 전환해서 노동자 입장에서 누구한테든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만들어보자는 거죠.

그렇게 되면 기존 노동법의 보호 범위 바깥에 있는, 이른바 특수고용노동자를 포함한 종속적 자영업자도 보호할 수 있게 돼요. 모든 일하는 사람에 대한 보편적 노동법제의 실현을 위한 출발로서의 의미가 있을 거라고 봐요."

- 산재보험이나 고용보험의 범위를 확대하는 문제를 두고 전속성의 문제, 다시 말해 사용자를 누구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정부가 고심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요.
"사용자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전통적인 노동법의 문법으로 법률을 설계할 경우엔 오래되었지만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다시 봉착하게 되죠. 따라서 사용자의 의무 체계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의 권리체계로 법률의 내용을 설계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해요.

그리고 산재·고용보험의 사용자를 정하는 일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아요. 가령, 어느 기업을 사용자로 규정하는 게 용이하지 않을 경우, 사용자 후보 기업 모두를 사용자로 보고 연대 책임을 부과하면 되니까요. 네트워크 기업 상호 간에는 그들이 부담한 비용을 추후에 정산하면 되죠.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건, 사용자가 누구인지 모호하다고 해서 노동자를 노동자 아닌 자로, 노동법의 보호 범위에서 배제해서는 안 돼요."

- 사람의 노동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색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봤으면 하는 질문이 있으신지요.
"플랫폼 경제의 옹호자들은 우리에게 '혁신과 편리함이 있는 미래를 왜 붙잡지 않는가, 왜 자꾸 시대에 뒤쳐지느냐'라고 물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혁신과 편리함 속에 어떠한 비전이 있는가'라고 되물어야 해요. 우리가 역사 속에서 분투하며 쟁취하고자 했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열망과 가치를 담을 수 있는 비전이 없다면 정말 이를 혁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디지털 플랫폼이라는 하나의 스크린 위에 우리 사회의 노동 현실이 또렷한 하나의 상을 그리고 있어요. 기존의 노동 현실은 수 세기 동안 형성된 노동법의 규율에 따라 조금이나마 원생적 형태를 벗어났다면, 디지털 플랫폼에 맺히는 상은 기존의 규범 체계를 우회하려는 자본의 탐욕, 그리고 혁신이라는 착시에 따라 훨씬 더 원생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요. 플랫폼 노동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원생적 상태의 상을 어떻게 규범화된 상태로 복원하는가에서 출발해야 해요.

덧붙이자면, 전에는 노동자들이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면서 유대를 형성하고 공동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죠. 불만에 집단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었고요. 그러니까 사업장은 생산활동의 마당이면서 동시에 연대의 장이기도 했죠.

그런데 플랫폼 노동자들에겐 이런 물리적 공간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플랫폼으로부터 일감을 할당받아 일하는 노동자들이 서로를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한정된 일감을 두고 다투는 경쟁자로 인식하도록 만들었어요. 노동자의 연대를 근본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죠. 플랫폼 노동자에겐 그들을 서로 결합시켜 새로운 연대를 구축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해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울시 NPO지원센터 블로그에도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플랫폼 노동, #노동법, #배달라이더, #권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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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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