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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색깔이 다른 시집 세 권과 여행글 그리고 한 인물의 삶과 역사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읽는 순서는 없다. 완독하는 것도 아니다. 소파에 책을 던져두고 그때그때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다. 한 권의 책을 읽다 훌쩍 던져두고 다른 책을 읽는 방식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맛을 주는 책을 마음 따라 읽는 맛도 쏠쏠하다. 어떤 책은 무겁고, 어떤 책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음식을 골라 먹는 맛이라 할까? 그러다 보면 부드럽게 씹히기도 하고 조금은 질긴 부위도 있다. 때론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하기도 하고 달콤하거나 쌉싸래한 맛을 느끼기도 한다.

그 여러 맛 중에서 가난한 흙냄새와 가족의 끈끈한 땀 냄새가 나는 뉴칭궈의 시집과 투박하지만 외국인으로 눈으로 바라본 낯선 나라의 모습을 별다른 양념 없이 버무린 사이토 마리코의 시집을 소개하려 한다.

뉴칭궈 시집 <아이는 종이에 글을 쓰고>
  
<아이는 종이에 글을 쓰고> / 뉴칭궈 /안태운 옮김
 <아이는 종이에 글을 쓰고> / 뉴칭궈 /안태운 옮김
ⓒ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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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있는 세 권의 시집 중에서 손이 가장 많이 가는 시집이다. 농촌에서 나고 자란 내 삶의 이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내 유년의 추억 아닌 추억들도 떠오른다. 그의 시 속엔 늘 흙과 더불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뉴칭궈는 중국 서북 고원지대에 위치한 간쑤성에서 나고 자랐다. 간쑤성은 황토고원과 텅거리사막이 교차하는 지역이다. 그가 자란 지역은 농촌 마을이다. 시집 속의 시편들이 팔구십년대 중국 시골의 모습을 다루고 있는데 우리의 60~70년대 농촌의 모습들이 시를 읽다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게 된다. 그 속에서 가난한 삶을 살았던 이들의 모습들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지난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 아버지의 밭갈이를 돕던 나귀 / 늙었다 / 그의 노화는 / 앞다리를 바닥에 구부리고 / 아버지가 힘껏 밀어야 겨우 일어서서 / 수레를 언덕 위로 끌어올리던 / 그날부터 / 그날 아버지는 / 마치 오랜 친구의 팔을 어루만지듯 / 나귀의 여윈 다리를 쓰다듬었다 / 늙었어, 우린 모두 늙었다고 / 어쩌면 나귀는 자신이 더 이상 쓸모 없다는 것을 / 알고 있으리라/ (하략)…….
- <나귀는 늙고> 중에서

나는 나귀에게 또 편지를 써야 하네 / 집 대문에 들어서기 전 / 나는 먼저 나귀를 보고 말았는데 / 겨울의 나른한 햇빛 아래 /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 벗어날 수 없는 졸음이 / 그의 생명을 짓누르고 있는 듯 / 못 본 지 일 년 / 그네는 귀를 가볍게 팔랑거리며 / 마치 황혼의 노인처럼 / 나를 향해 야위고 마른 손을 / 흔들고 있었지// <중략> 그래 나는 / 그 녀석을 털털거리는 트렉터에 싣고 / 도시로 끌고 가는 모습을 상상했지 / 마치 그해 내 당숙께서 / 도시로 치료하러 끌려가던 그때처럼 / 끌려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 한 마리 나귀의 생애/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랴
- <나귀에게 다시 쓴 편지> 중에서

뉴칭궈 시의 주된 글감들은 시인이 늘 접하고 숨 쉬던 것들이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우리와 함께 숨 쉬는 것들이다. 특별한 게 없다. 가끔은 시인 백석의 냄새도 난다.

그의 시의 원천은 고향이다. 그리고 가족이다. 시 전편에 흐르는 것들이 고향이고 가족과 친척 그리고 이웃이다. 그런데 고향의 모습을 노래하지만 결코 목가적이지 않다. 가난과 아픔의 촌의 모습과 그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의 꿈틀거림이 있다.

뉴칭궈의 시편들을 보면 고향, 나귀, 살구나무, 옥수숫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고모, 사촌 등이 자주 등장한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어가 나귀와 살구나무다. 나귀와 살구나무는 고향을 떠올리는 매개체다. 특히 늙은 나귀는 늙은 아버지이면서 당숙이기도 하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 머물면서 고향을 생각하거나 고향에 돌아오면 제일 반갑게 맞이해주는 게 나귀다. 가족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말에서 '제가 대지와 고향과 가족과 친척들에게 쓰는 생명의 글'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쓴 시들을 어루만져 보면 한 겹 한 겹 영혼의 굳은살이 느껴질 거라 말한다. 그의 말이 아닐지라도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느껴진다.

사이토 마리코의 <단 하나의 눈송이>
 
<단 하나의 눈송이> /사이토 마리코
 <단 하나의 눈송이> /사이토 마리코
ⓒ 봄날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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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내가 한 것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무언가를 보는 일, 그것뿐이었다.'

시인의 이 말은 이 시집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 단적으로 알려준다. 시인이며 번역가이기도 한 사이토 마리코는 1991년 봄부터 1992년 여름까지 약 1년 2개월 동안 서울에 학생으로 머물며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로 50여 편의 시를 썼다. 한국말도 서툰데 어떻게 한국어로 시를 썼을까.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내 한국어 실력은 높지 않았다. 만약 한국말이 유창했더라면 오히려 시를 안 썼을 것이다. 눈으로 본 것,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말하고 싶어도 제대로 못했던 답답함이 시를 쓰게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시인은 시를 썼다가 아니라 시가 '나왔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국의 공기 중에 시를 유발하는 성분이 포함된 것만 같았다고 말한다.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나이를 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잊은 채로 당신의 나라에 와버렸고
잊은 채로 당신의 학교에까지 와버렸습니다
팔짱을 끼고 독수리상을 지나서 좀 왼쪽으로 올라가면
당신의 비석이 있습니다
(…)
오늘은 비가 지독하고
(…)
비가 그치면
"사람이 되지"라 대답한
수없는 당시의 동생들이
뛰어다니는 대학가 상공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최루탄 가스가 자욱하게 있습니다
- <비 오는 날의 인사> 중에서
 
여기서 당신은 윤동주 시인이다. 시인은 연세대에 다니며 윤동주 시비를 자주 찾았다.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 동주의 나라와 동주의 학교. 동주의 시비를 자주 찾는 그녀에게 비가 오고 비가 그치는 어느 날 90년대 서울의 또 하나의 풍경과 마주친다.

자욱하게 대학가를 뒤덮은 최루탄 가스. 민주화의 열망에 가득했던 당시 젊은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윤동주의 시 하나를 떠올린다. '아우의 인상화'다. 고민 많은 시인은 동생에게 묻고 동생은 천진난만하게 대답한다. '늬는 자라 무엇이 되니 / 사람이 되지'라고. 그러면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려 거리로 나온 동주의 순수한 후배들의 모습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그곳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최루탄 가스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묘한 세상이 떠올려진다.
 
이 나라에서 꽃은 속삭이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 꽃은 외친다
그 외침 속에서
사람들의 모음(母音)은 한 덩어리가 되고
자음(子音)은 산산이 흩어져 갔다
모음 덩어리는 한 번 증발해
싸락눈이 되어 다시 내려온다 마치
고생 많아 버림받은 엄마의 비탄처럼 (…)
- <서울 사람2> 중에서

90년대 한 외국인이 바라본 모습은 조용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최루탄이 자욱하고 민주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서울의 모습,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녀는 '이 나라에서 꽃은 속삭이지 않고 외친다'라고 말한다. 아마 일본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풍경일 수도 있을 게다.

일본은 우리처럼 민주화란 이름으로 시민들이 일어나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는 민초들에 의해 세상을 조금씩, 조금씩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왔다. 부패한 기득권을 무너뜨리고자 늘 외친 존재는 민초였다. 그러나 그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갔다. 이름도 없이. 버림받은 엄마의 비탄처럼 말이다.

사이토 마리코의 <단 하나의 눈송이>는 23년 전에 출간되었다가 이번에 다시 제 출간된 시집이다. 스스로 책의 존재마저 잊고 있다 다시 나온 것에 대해 망설이기도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어떤 시는 초기에 일본어로 썼다가 한국어로 번역한 이유로 번역체의 느낌도 있다. 그러나 한국으로 공부하러 왔던 일본인 여학생이 19990년대 초 외국인의 눈으로 바라본 한국인의 모습과 서울의 모습을 보고 느낀대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읽을 만하다.

아이는 종이에 글을 쓰고

뉴칭궈 (지은이), 안태운 (옮긴이), 북인(2019)


단 하나의 눈송이

사이토 마리코 (지은이), 봄날의책(2018)


태그:#뉴칭궈, #사이토 마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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