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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황현' 초상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황현" 초상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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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 황현(黃玹),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1910년 8월 말 일제 침략으로 나라를 뺏긴 뒤 황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자, 경상도와 전라도의 선비들은 돈을 모아 그의 문집을 간행했다. 선비들은 <매천집> 권수(卷首) 본전(本傳)에 김택영이 쓴 황현 평전을 실었다. 김택영은 황현이 중국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려고 계획했을 때 동행을 약속했었던 그의 오랜 벗이다. 평전 일부를 번안해서 읽어본다.
   
황현은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했다. 성격은 쾌활하고 기품은 강직했다. 그는 나쁜 자를 원수처럼 미워했고, 스스로 기개가 높고 오만하여 남에게 굽히지 않았다. 출세한 자가 교만하게 굴면 그의 면전일지라도 꾸짖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이 귀양을 가거나 죽으면 천 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반드시 위문을 갔다. 옛글을 읽다가 충신과 지사가 원통한 일을 겪는 장면이 나오면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학문에 정통했고, 눈치껏 살아가는 학자들은 만나지 않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황현은 누구인가... 관리들 부정부패 목격 뒤 관직 진출 포기 

황현(黃玹)은 1855년 12월 11일 태어나 1910년 9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애에 걸쳐 한 번도 벼슬을 하지 않았다. 1883년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조정이 실시한 특별 과거 보거과(保擧科)를 본 적은 있으나, 1차 시험에서 1등으로 뽑힌 자신의 글을 시험관이 마음대로 2등으로 내려 앉히는 부정부패를 겪고는 그 뒤론 본 시험에 응시하지 않고 귀향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888년 황현은 과거를 보라는 아버지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재차 상경했다. 그는 유교 경전 통달 정도를 시험하는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장원급제했다. 하지만 또 한번,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목격하고는 절망한 나머지 관직에 뜻을 버리고 귀향했다.

그 뒤 황현은 전남 구례의 작은 서재에 책 3000여 권을 쌓아 놓고 두문불출로 책을 읽고 글을 썼다고 한다. 이때는 이미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연이어 일어나는 등 망국 위기 상황이었다. 황현은 후대에 역사의 진실을 전해야겠다는 절박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 침략상, 친일파들의 준동, 동학농민운동의 전말 등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호양 학교, 황현이 전남 구례에 설립했던 학교이다(독립기념관 사진)
 호양 학교, 황현이 전남 구례에 설립했던 학교이다(독립기념관 사진)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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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1907~1908년 교육 구국 운동을 펼칠 의지로 구례 광의면 지천리에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설립했던 황현은 그 후 좀 더 적극적인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 망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붓을 들어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완성했다.

진실을 후대에 전하기 위한 집필... "지식인 구실이 힘들다"

어느덧 1910년 8월 29일에 이르러 기어이 나라는 일제에 병탄되고 말았다. 황현은 통분으로 나날을 보내면서 지난날 자신이 쓴 글을 돌이켜봤다. 전 참정대신 민영환이 1905년 11월 29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그는 피눈물을 삼키며 아래와 같은 〈혈죽>(血竹)을 썼었다.

竹根於空不根土 대나무가 흙 아닌 허공에 뿌리를 내렸네
認是忠義根天故 하늘이 이 충의를 알아 그렇게 한 것이네
山河改色夷虜瞠 산천이 놀라고 오랑캐도 놀랐네
聖人聞之淚如雨 임금도 그 소식에 비 오듯 눈물을 흘렸네 (중략)
精靈所化現再來 공의 정신 살아나 대나무로 다시 오셨으니
驚天動地何奇哉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림이 무에 이상하리 (중략)
百回拂眼看是竹 눈 비비며 백 번 다시 봐도 대나무가 틀림없다 (중략)
分明碧血噴未乾 분명히 푸른 피 치솟아 마르지 않고
點點灑作靑琅玕 점점으로 뿌려져 대나무가 되었구나 (하략)


그렇게 며칠을 숨 죽인 듯 흘려보낸 황현은 이윽고 9월 8일, 방을 쓸고 자리를 깨끗하게 정돈했다. 그리고 지필묵을 꺼내어 반듯하게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허공을 응시하면서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목숨을 끊을까 하고 몇 번이나 고민했던 지난 세월들이 허허로운 소리를 내며 귓전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절명시>(絶命詩) 네 편 중 첫째 수부터 하얀 종이 위에 검게 휘갈겨 썼다.

亂離潦到白頭年 어지러운 세상 겪으며 머리만 백발이 되었구나
幾合捐生却未然 몇 번이나 이승을 떠나려 했건만 실행하지 못했네
今日眞成無可柰 오늘은 진정 어쩔 도리가 없도다
輝輝風燭照蒼天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을 비추네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니, 그동안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한 것이 새삼 회한이 돼 가슴이 메어온다. 황현이 쓴 '오늘은 진정 어쩔 도리가 없도다'란 3행은 오늘 기어이 자결할 결심을 굳혔다는 뜻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은 죽음을 눈앞에 둔 황현의 운명을 상징한다. '촛불이 푸른 하늘을 비추고 있는' 것은 망국 상황을 맞았으면서도 아무런 힘을 보태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에 대한 한탄이자, 죽음으로써 '하늘에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소원하는 참된 선비의 우주적 세계관을 나타낸다.

妖氣晻翳帝星移 요사스러운 기운 서려 나라가 망하고 나니
久闕沈沈晝漏遲 대궐은 침침해지고 낮시간도 지루하기만 하구나
詔勅從今無復有 이제는 임금의 명령도 다시는 없을 테니
琳琅一紙淚千絲 예전에 받은 옥빛 조서에 눈물이 쌓이는구나

鳥獸哀鳴海嶽嚬 금수도 슬피 울고 산천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 무궁화 이 강토는 이미 망해버렸도다
秋燈掩卷懷千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일을 돌아보니
難作人間識字人 세상에서 지식인 구실 참으로 힘들구나


제3수 마지막 행의 식자인(識字人)이 단순히 비문맹(非文盲) 즉 글자(字)를 아는(識) 사람(人)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식자인은 현대어로 지식인, 조선 시대 말로 선비를 가리킨다. 선비의 표상은 언행일치다. 나라가 외적에 침탈돼 온 백성이 저들의 노예가 됐으니, 모름지기 참된 선비라면 목숨을 걸고 항거해야 한다. 그래서 황현은 자정(自靖)을 결심한 것이다(자정은 자결을 좀 더 순국에 어울리게 나타내는 조어다-기자 주, 이전 관련기사 보기). 

하지만 스스로 생명을 끊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난작難作)' 일이다. 황현은 <절명시> 네 편과 자녀들에게 남기는 유서 등을 다 쓴 뒤 9월 9일 마침내 독약을 마셨는데, 다음 날에 이르러 숨을 거뒀다. 삶이 막을 내리기 직전에 달려온 동생 황원에게 그는 "죽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구나. 내가 독약을 마시면서 그릇에서 입을 세 번이나 떼었다. 내가 이렇게 어리석었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다. 그처럼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인 것이다.   
      
황현 '절명시' 일부
 황현 "절명시" 일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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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황현은 자신이 일제에 맞서 무장투쟁을 하다가 죽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자결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는 <절명시> 마지막 제4수에 '진동을 따르지 못하고 윤곡을 따르는 것이 부끄럽다'고 썼다. 조윤곡은 몽고 침입 때 자결했고, 진동은 참형을 당했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황현은 "무장투쟁 내지 항거 등 적극적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자결하는 소극적인 형태로 스스로 죽어감을 아쉬워하였던 것이다."(주1)

曾無支厦半椽功 일찍이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바 없으니
只是成仁不是忠 다만 나의 죽음은 선비의 일일 뿐 충성은 아니로다
止竟僅能追尹穀 마지막을 겨우 윤곡을 따르는 데에 그치니
當時愧不躡陳東 때를 당하고도 진동을 따르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노라


시의 2행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나라에 충성하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인(仁)을 실천하기 위해 자결한다고 했다. 자신의 자정이 선비로서 언행일치 정신을 실천하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공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인을 실천하는 출발점으로 삼고, 백성에게 널리 베풀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인을 실천하는 완성점으로 보았다. 황현은 한자 '인'의 우리말 '어질다'가 '얼이 짙다'에서 온 말이라는 사실을 실감 나게 해준다. 그의 심성은 착했고, 행동에는 깊은 가치가 들어 있다.(주2)

황현은 자녀들에게 남긴 글에도 자신의 그런 생각을 밝혀두었다. 황현은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고 했다. 벼슬을 하지 않았으니 임금에게 갚아야 할 빚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황현은 "다만 국가에서 선비를 길러온 지 500년이 됐는데, 나라가 망한 날을 맞아 한 사람도 죽지 않는다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내가 위로는 하늘이 준 양심을 지키고, 아래로는 읽은 글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영원히 잠드는 것이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그의 말은, 자기 죽음이 임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황현 동상(현충시설 정보서비스 사진)
 황현 동상(현충시설 정보서비스 사진)
ⓒ 현충시설 정보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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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에겐 '일정한 마음'이 없다는데... 벼슬 마다한 '백성' 황현의 선비정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내물왕이 백제왕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백성들이란 본래 일정한 마음이 없습니다(民者無常心)"라고 적는 장면이 나온다. 투항해온 백제 백성들을 신라가 받아들인 데 대해 백제왕이 항의하자 내물왕은 "백성들은 생각이 나면(왕이 잘해주면) 오고, 싫어지면(정치가 신통하지 않으면) 가버리는 것이 그들의 본디 속성입니다"라고 답변한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도 비슷한 언급이 나온다. 집으로 문병을 온 문무왕에게 김유신은 "삼한이 한 집안이 되어(삼국 통일이 되어, 三韓爲一家) 백성이 두 마음이 없게 되었습니다(百姓無二心)"라고 말한다. 이 역시 나라는 왕의 것이고, 백성은 그 왕이 누구든 자신에게 잘해주면 섬기고 그렇지 않으면 돌아선다는 뜻이다.

내물왕과 김유신의 지적은 백성, 즉 보통 사람을 폄훼하는 발언이 아니다. 위정자들이 정치를 잘해야 한다는 뜻일 뿐이다. 황현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니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불변의 상심(常心)이 있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흔히 '지사' '선비' '지성인' 등으로 부르며 존경한다.  

9월 10일 황현 선생 순국일을 맞아 그를 기리는 뜻에서 시원찮은 글 한 편을 쓰며,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주1) 조재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2010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주2)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

태그:#황현, #절명시, #언행일치, #인, #9월10일 오늘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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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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