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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킨>
 책 <킨>
ⓒ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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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초, 미국 스트리밍 서비스 HBO 맥스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방영 목록에서 제외해 화제가 되었다. 1939년 개봉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인종 차별주의를 미화했다는 논란 때문이다. 시대적 반영일 뿐이라는 반발도 있었지만, '영화 속 인종 차별적인 묘사는 그때도, 지금도 틀리다'라고 이유를 밝혔다.

HBO 맥스는 24일 다시 목록에 올리며 재클린 스튜어트 (Jacqueline Stewart) 시카고대 영화과 교수의 해설을 곁들였다. 그녀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남북전쟁 이전 남부 백인사회를 낭만적이고 목가적으로 그리며, 노예제도를 자애롭고 온화한 제도로 표현했다고 지적했다. 영화에 시각화된 이미지는 현재의 반흑인 폭력, 인종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논평했다.  

40여 년 전에 이 문제를 이미 제기한 흑인 여성이 있다. 미국 SF 소설작가 옥타비아 버틀러다. 그녀는 1979년에 발표한 SF소설 <킨>의 주인공 다나를 통해 말한다.
 
"노예제도에 대한 책을 읽었다.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상관없었다. 집에 있는 책 중에서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 싶은 책은 모조리 읽었다. 심지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까지 읽었다. 다 읽지는 못했다. 부드러운 사랑의 유대로 이어진 행복한 유색인들이라는 각색만은 참아낼 수 없었다. (221쪽)"
 
평범한 흑인 여성 다나는 어느 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1976년에서 1810년대 남부 메릴랜드로 타임슬립한다. 그녀는 자기의 먼 조상인 백인 루퍼스가 곤경에 빠질 때마다 과거로 가서 도와주지만, 현재로 돌아오기 전까지 평범한 흑인으로 혹독한 노예 생활을 견뎌야 한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보던 가짜 피와 가짜 비명이 아닌 진짜 채찍질을 맞아가며 그 시대의 아픔을 직접 몸으로 겪는다.

그녀가 속한 흑인 노예 사회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처럼 순진한 믿음과 끈끈한 연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느 사회처럼 반목과 질투, 배신이 있다. 오히려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처절하고 이기적이다. 다나가 농장에서 도망쳤을 때, 주인에게 이른 사람은 그녀를 질투하던 여자 노예 리자였다. 다나를 아끼는- 다나의 조상인- 앨리스는 그 사실을 알고 리자의 이가 몇 개 부러져 나갈 정도로 폭력적 보복을 한다.

소설 <킨> 속 19세기의 시대 상황과 인물 감정의 생생한 묘사는 짜임새 있는 서사 속에서 더욱 살아나 독자 역시 그 시절로 타임슬립 한 듯 몰입하게 된다. 특히 당당하던 현대 여성 다나가 노예 시대의 폭력에 길들여져 공포와 두려움 속에 살게 되는 과정에서, SF소설의 장점을 잘 이용하고 있다.

주인공 다나는 채찍질을 당한 뒤부터 "자주 때리지는 않았지만, 언제 채찍이 떨어질지 알 수 없었기에(413쪽)" 감독관의 목소리만 들어도 움츠러들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반나절의 옥수수 밭일로 기절해서 쓰러졌던 경험 때문에,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 밭일을 시키겠다는 루퍼스의 협박 한마디에 온몸이 공포로 마비된다.

미래의 소설이 된 과거의 소설

지금도 정치, 경제, 문화 등 많은 분야에서 권력에 의한 억압과 통제가 만연하며 힘없는 자들에게 무조건적 복종과 순응을 요구한다. 사람을 길들이기 위한 가장 원초적 방법은 폭력이다. 전 충남지사 안희정부터 전 서울시장 박원순까지, 반복되고 있는 위력에 의한 성폭력 논란이 더 끔찍한 이유다.

성폭력 피해자 김지은씨는 저서 <김지은입니다>를 통해 안희정의 성추행과 성희롱이 과감해질수록 처음에는 수치심을 느꼈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자 무감각 해졌다고 설명했다. 그 내용이, 인사권을 저당 잡힌 자의 '살기 위한 자기방어'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가 가진 권력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기 때문에 저는 늘 수긍하고 그의 기분을 맞추고 항상 지사님 표정 하나하나 일그러지는 것까지 다 맞춰야 하는 게 수행비서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원해서 했던 관계가 아닙니다. (32쪽)"
 
19세기 미국 남부 농장주들은 노예제도라는 보호 속에 흑인 노예를 가축과 같은 사유 재산으로 여기며 모욕과 겁탈을 일상적으로 행한다. 지금 21세기에도 권력과 자본을 가진 자들은 합법을 운운하며 고용노동자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대상으로 격하시킨다. 그렇기에 옥타비아 버틀러의 SF소설 <킨>이 계속 읽히며 고전에 반열에 올랐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다나가 1976년 현실에서 '비정규 임시직 알선소'를 '노예시장'이라고 부른 것은 여전히 의미심장한 비유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불평등 구조에서 목소리와 권리를 잃은 자들은 노예와 다름없다. 우리가 손발 묶인 질긴 쇠사슬을 끊으려면,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피해자들과 연대해 우리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

소설 <킨>은 과거로 타임 슬립 했지만, 권력에서 비롯된 인간의 집착과 애증, 욕망과 차별, 이기심과 배타심을 꿰뚫어 보았기에 세월을 관통한 미래의 소설이 되었다. 앞으로도 <킨>은 SF소설의 고전으로 남아 바람과 함께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킨 (리커버 에디션)

옥타비아 버틀러 (지은이), 이수현 (옮긴이), 비채(2020)


태그:#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킨, #옥타비아 버틀러 , #나는김지은입니다, #노예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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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세상의 나뭇가지를 물어와 글쓰기로 중년의 빈 둥지를 채워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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