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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현충원의 기산도 지사 묘소. 왼쪽은 의열단 최수봉 지사의 묘소이다.
 서울 현충원의 기산도 지사 묘소. 왼쪽은 의열단 최수봉 지사의 묘소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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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19> '대한제국의 종말과 의병 항쟁'을 읽으면 아래 내용을 만나게 된다.
 
(1907년 2월과 3월 나철 등에 의한 매국 5적의 암살 기도가 있었는데) 그보다 조금 빨리 또 하나의 거사가 있었으니, 이것은 장성 사람 기산도(奇山度)에 의하여 실천에 옮겨졌다.

1906년 2월 16일 매국 5대신 중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와 의(義)형제를 맺고 이또오(伊藤博文)의 의(義)아들이라고 자칭하면서 매국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교활 간교한 이근택(李根澤)을 죽이기로 하였다.

이날 밤 기산도는 이근철 외 1명과 같이 변장을 한 후 이근택의 집에 숨어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던 이근택을 단도로 10여 차례 찔렀다. 그러나 끝내 이근택이 목숨을 건짐으로써 실패하고 이들은 체포당하고 말았다.

(기산도 등의) 5적 암살 기도는 매국 대신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일반 국민들은 이들의 거사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끝내 분하게 생각하였다. 이로부터 매국 역신(賣國逆臣)들의 집은 일본군에 의하여 삼엄하게 경비되었으며, 역신들은 겁을 먹고 출입을 삼갔다.
 
'일반 국민들은 이들의 거사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끝내 분하게 생각했다'는 대목을 읽는 필자의 가슴에도 분한 감정이 일어난다. 살인이 성사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필자를 보며 누군가는 인성을 의심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군 사령관과 의형제를 맺고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을 자칭한 극렬한 친일파를 처단하는 일이다. 의거다. 어찌 그런 힐난을 두려워할까!

알려지지 않은 의열 항쟁의 선구자, 기산도

기산도는 16세인 1893년에 결혼했다. 그의 장인은 일본군과 싸우다가 구례 연곡사에서 순국한 고광순(高光洵) 의병장이었다. 기산도는 구한말 호남 창의 총수 기우만(奇宇萬)과 장성 의병장 기삼연(奇參衍) 가문 출신답게 장가를 들었던 셈이다. 그 본인 또한 창의해 일본군과 싸운 의병이었으니 그럴 만도 한 혼사였다.

1906년 2월 16일 초저녁, 을사오적 중 하나인 군부대신 이근택의 집을 급습하기 위해 기산도와 그의 동지들이 여럿 모였다. 긴장한 숨소리가 실내 가득 떠돌았다. 기산도가 분위기를 진작하려는 의도에서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비록 마흔을 눈앞에 둔 중늙은이이지만, 의병으로서 직접 총을 쏘고 칼을 휘둘러본 경험이 있으니 여러분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기산도가 말하는 의병 전투는 두 해 전인 1904년의 일이다. 당시 기산도는 기기, 박관호 등과 함께 장성과 광주 사이 못재고개에서 일병과 싸웠다. 이 전투에서 기산도 의병군은 일병을 여럿 죽이는 전과를 올렸지만 아군도 3명이 전사했다. 일본군이 물러간 뒤 기산도가 박관호를 돌아보며 넋두리처럼 말했다.

"동학 때 30만, 아니 40만 명이 일제에 학살됐소. 오늘도 뼈저리게 느끼는 바이지만 과연 우리는 무기나 전술 등에서 왜적의 맞상대라 할 만한 수준이 못 되오. 군대로 감당이 안 될 때에는 단기필마의 개인전(個人戰)을 펼치는 것이 옳소. 내가 서울로 가서 우두머리 흉적들을 은밀히 처단할 테니 두고 보시오."

1905년 기산도는 상경했다. 그는 이상철·박종섭·박경하·이범석·서상규·안한주·이종대·손성원·박용현·김필현·이태화·한성모·구완희·이세진 등과 더불어 결사대를 조작했다. 한성모의 집에 본부를 차린 결사대는 매국 원흉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의열 독립운동 조직이었다.

"이근택의 저택 인근에서 사방을 살피고 있는 동지들의 전갈에 따르면 그 자가 오후 7시경 퇴궐해서 방금 집으로 들어갔다고 하오."

기산도가 그렇게 말하자 구완희가 뒤를 잇는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근택의 집 가까이에 가서 머물러야 하지 않겠소?"

이세진도 같은 의견을 개진한다.

"그렇소. 상황이 시시각각으로 변할 수 있으니 대처를 잘 하려면 이동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마땅하지요. 그 자의 저택 담장에 바짝 붙어 있다가 때를 틈타 월장을 하십시다."

기산도·구완희·이세진은 결사대 대원 중에서도 오늘 직접 이근택의 집 안으로 침투할 행동대원들이다. 세 사람이 이근택의 집 가까이로 옮겨가자 낮부터 정찰을 해온 손성원·박용현·김필현·이태화 등이 반색을 하며 맞이한다.

"8시경에 손님 6명이 들어갔다가 이제 막 나왔소. 전갈을 보내려던 참이었소."

기산도가 동지들을 둘러보며 말한다.

"지금이 11시쯤 됐소. 방문자는 더 없을 듯싶소."

말소리 없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이내 세 사람은 등을 숙여주는 다른 동지들의 어깨를 밟고 올라 담을 뛰어넘었다. 세 사람은 탈출 때를 대비해 담 안쪽에 밧줄을 매달아놨다.

예상대로 이근택은 방금 침실로 들어가 잠옷 차림으로 누워 있고, 첩은 흡사 자장가라도 불러주는 양 이근택의 옆에서 국문잡기(國文雜記)를 읽고 있었다. 세 명의 지사들이 불쑥 방 안으로 들어서자 이근택과 첩은 놀란 나머지 처음에는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구완희와 이세진이 잽싸게 달려들어 이근택의 두 팔을 목 뒤로 젖혔다. 이근택의 몸이 앞으로 푹 숙여졌다. 그 틈을 타 기산도가 달려들면서 이근택의 목 쪽을 겨냥해 칼을 휘둘렀다.

이때 이근택의 첩이 방 안을 비추던 촛불을 껐다. 새파랗게 질린 낯빛으로 오들오들 떨고만 있어 그냥 내버려둔 것이 화근이었다. 갑자기 캄캄해지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산도는 무턱대고 칼을 휘저었다. 이근택은 13곳에 칼날이 닿아 피투성이가 됐지만 숨이 끊어질 만큼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 이근택과 첩의 비명이 계속 터졌다.

맨 먼저 김씨 성의 하인이 한 명 달려왔다. 기산도의 칼이 하인의 배, 얼굴, 다리 등을 네 번 찌르는 사이 집을 지키는 경비병 6명과 순검 4명이 달려왔다. 경비병들은 이근택의 집에 설치돼 있던 비상 경종을 울렸다. 경종 소리에 일본 헌병과 순사들까지 달려왔다. 그래도 기산도 일행은 남쪽 담에 설치해 놓은 밧줄을 타고 무사히 탈출했다.
 
 '떠돌이 거지 선비'라는 뜻의 '流離焉乞之士'가 새겨진 비와, 그 뒤로 보이는 기산도 지사 추모비가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산44-2 산비탈 아래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풍경
 "떠돌이 거지 선비"라는 뜻의 "流離焉乞之士"가 새겨진 비와, 그 뒤로 보이는 기산도 지사 추모비가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산44-2 산비탈 아래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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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틀 뒤인 1906년 2월 18일자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이씨 봉자(李氏逢刺, 이씨가 자객을 만났다)' 사건을 알게 됐다.
 
군부대신 이근택씨가 재작일(再昨日, 어제의 전날) 하오 12시경 그의 별실(別室, 첩)과 함께 막 옷을 벗고 취침하려 할 무렵에, 갑자기 양복을 입은 누구인지 모르는 3명이 칼을 들고 돌입하여, 가슴과 등 여러 곳을 난자하여 중상을 입고 땅에 혼절한 바, 그의 집 청지기(경비원) 김가(金哥)가 내실에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괴이히 여겨 탐문하고자 하니, 갑자기 양복 입은 3명이 안에서 급히 나와 놀라 누구냐 하고 물은 즉, 이들이 역시 칼로 김가를 타격하여 귀와 어깨에 부상을 입히고, 곧바로 도망갔다. 이 군부대신은 한성병원에서 치료 중이나 부상이 극중(極重)하여, 위험이 팔구분(八九分, 80~90%)이라더라.
 
변장용으로 사용했던 가발을 이근택의 집에 떨어뜨린 것이 단서가 됐다. 일제 경찰 마루야마(丸山重俊)의 부하들이 한성모의 집을 습격했다. 기산도는 박종섭·박경하·안한주·이종대와 동시에 붙잡혔다. 기산도는 병원에서 퇴원 후 자신을 직접 신문한 이근택에게 호통을 쳤다.

"너희 오적(五賊)을 죽이고자 하는 지사들이 어찌 한두 사람이겠느냐! 2천 만 모두가 너희들을 처단하러 올 것이다. 네 놈들은 결코 천명을 살지 못할 테니 하늘에 지은 죄값을 하리라. 다만 내가 서툴러서 너를 죽이지 못하고 이렇게 탄로가 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재판장은 기산도에게 2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했다. 그 재판장은 이완용의 이복형 이윤용이었다. 기산도는 법정에 붙잡혀 있을 당시에는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기산도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이완용의 형이 심판했다니...! 내가 감방 안에서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기가 막혔던가!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사가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이었는데, 내가 또 그 꼴을 당하였어...! 세상이 어찌 이토록 엉망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기산도는 이내 새로운 울음을 터뜨려야 했다. 그가 옥중에 있을 때는 어느 누구도 차마 말해줄 수 없었던 비보였다. 재종조부 기삼연 의병장의 순국 소식이 비로소 전해졌던 것이다.

줄곧 일제와 맞서 싸우던 기삼연 의병장은 1908년 1월 2일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총살을 당해 생을 마감했다. 그 소식에 정신을 놓고 한참 통곡을 하던 기산도가 이윽고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다짐했다.

"내가 어찌 원수를 갚지 않고 이 싸움을 그만두겠는가!"

그 후 기산도는 사람들에게서 군자금을 모아 상해로 보내는 등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던 중 관계자들이 체포되고, 기산도도 상해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제자 박길용과 기동환을 데리고 진남포로 가던 중 일제에 체포되어 광주 형무소에 갇혔다. 기산도는 일제가 혹독한 고문을 가하자 '내가 어찌 너희 같은 개들과 말을 주고받겠느냐?'면서 스스로 혀를 끊었다.

다시 5년여 갇혔던 기산도는 이미 반신불수의 몸이었다. 그는 재혼한 아내 박순임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가며 3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지만 끝내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은 아주 소박했다. 그는 자신의 무덤 앞에 작은 나무 비 하나를 세워달라고 했다. '流離焉乞之士(유리언걸지사) 기산도지묘(奇山度之墓)', 즉 '떠돌이 거지 선비 기산도의 묘'라는 뜻이었다.

아래는 기산도 의사가 전라도 특파위원의 임무를 맡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할 군자금을 모은 내역의 일부다. 국가보훈처 2003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자료집에 실려 있는 것을 여기 전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한 사람들의 이름을 역사에 새기고자 한다.
 
조면식趙冕植(순천군 쌍암면 구강리) 40원
김창규金昌圭(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50원
안창선安昌善(상동) 10원
이화영李華永(곡성면 신기리) 2원
이선근李先根(상동) 42원
조용준趙鏞俊(곡성군 죽곡면 봉정리) 15원
김형석金炯奭(구례군 구례면 산성리) 200원
최재학崔在鶴(보성군 벌교면 칠동리) 10원
김학수金學洙(임실군 삼계면 명곡리) 30원
황용주黃龍周(남원군 대산면 대곡리)
윤용섭尹龍燮(남원군 주생면 지당리) 100원
  
 기산도 지사가 한때 숨어지냈던 전남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당곤마을의 풍경. 찾아갈 때는 마을회관 주소인 '도화면 당곤길 25-4'을 네비게이션에 찍는 것이 좋다.
 기산도 지사가 한때 숨어지냈던 전남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당곤마을의 풍경. 찾아갈 때는 마을회관 주소인 "도화면 당곤길 25-4"을 네비게이션에 찍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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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도 의사 유적을 찾아서

'기산도 추모비'부터 찾아보는 것이 좋다. 비석에는 '流離焉乞之士'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공식 주소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산44-2이지만, 산비탈을 깎아 도로를 낸 탓에 그 지번은 추모비가 실제로 세워져 있는 현장을 나타내지 못하게 됐다. 내비게이션을 찍으면 비석이 있는 '충효의 쉼터'에서 도로 건너편 산비탈을 표시해준다.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신길 5로 찾아가는 것이 좋다. 바로 비석 앞으로 안내해준다.

비석이 있는 삼거리에서 400미터쯤 동남쪽으로 도로를 나아가면 당곤마을 앞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도로를 버리고 왼쪽으로 들어가면 당곤마을 안으로 진입한다. 이 마을은 기산도 지사가 은신했던 현장이다.

기산도 지사의 묘소는 서울 현충원에 있다. 지사의 묘소 옆에는 의열단 최수봉 지사가 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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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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