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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잡' 가장들의 고단한 삶을 소개합니다.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기본소득, 상병수당, 전국민 고용보험 등'의 사회보장제도와 관련한 논의에 작은 도움이 되고자 글을 올립니다. 기사의 내용 중, 인터뷰 부분은 필자가 운영했던 팟캐스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기자말]
고단한 삶의 흔적
 고단한 삶의 흔적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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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리릭" 인터폰을 누르자 늘 그렇듯 아파트 공동현관문이 무심히 열렸다. 열린 문 뒤로 보이는 엘리베이터 앞에 먼저 들어온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그도 배달기사였다.

무척이나 익숙한 뒷모습, 그는 예전에 우리 가게에서 배달기사로 일했던 경철(가명)씨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재빠르게 따라갔다. 그의 걸음걸이가 전과 달랐다.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가 뒤늦게 나를 알아봤다.  

"어! 사장님, 안녕하세요." 
"무슨 사장입니까, 언제적 사장인데... 아니, 다리가 왜 그래요? 불편해 보이던데 사고 후유증?" 
"네… 좀 불편해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느 봄날 오후, 누군가 가게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다. 가게 유리 벽 너머로 조금 전에 봤던 사람이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가게 쪽을 흘깃흘깃 바라봤다. 문을 열고 나가 그를 불러 세웠다.

"혹시 배달 알바 때문에 오신 건가요?"

까무잡잡한 피부의 깡마른 몸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내 물음에 쑥스러운 듯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그런데 제가 나이가 많아서요…"

그는 인터넷의 구인광고를 보고 왔다고 했다. 하지만 적지 않은 나이 때문에 자신 없어 들어오지 못하고 가게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는 그렇게 숫기 없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경철씨와 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밑바닥부터 올라온 삶, 그는 포기를 몰랐다
  
두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정말 땅바닥의 흙 말고는 전혀 없었던 가난한 집의 아들. 결혼을 앞두고 집에서 분가할 때, 그는 남들처럼 결혼 자금을 지원받기는커녕 오히려 300여 만 원을 아버지 손에 쥐어 주고 나와야 했다. 그 정도로 집이 어려웠다.

"가스 일은 20대부터 했습니다. 일반 가스가 아닌 산업용 가스였고요, 처음에는 80만 원 정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3, 4년 뒤에 140만 원 정도 받기 시작했고요."

본업인 특수가스 배송 기사로 받는 백여 만 원의 월급은 아내와 두 아이를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그는 퇴근 후 투잡을 했다. 불법이 아니고, 시간과 돈만 맞는다면 업종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특수가스 배달을 평일 주간에 하면서 밤에는 대리운전, 나이트클럽 광고 차량 운행 등 이것저것 했고요. 주말에는 짬짬이 건설 현장의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특히 나이트클럽 광고 차량은 처음에 들어가기 좀 그랬어요. 나이트클럽 하면 '조폭', '깡패' 같은 어두운 이미지가 있으니까, 일만 하고 돈도 못 받는 거 아닌가 하는…"

"제가 소심하고 숫기가 없어서…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거기 들어갔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전혀 그렇지 않더라고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런 이미지와 다르더라고요. 모두 열심히 일했어요. 겉만 멀쩡하고 속은 양아치 같은 회사보다는 훨씬 낫더라고요."


경철씨는 그렇게 하루 14, 15시간씩 노동을 했다. 가족 여행은 언감생심, 일상에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사지도 쓰지도 않는 근검절약을 실천하며 살았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 20여 년을 견딘 끝에 수도권 신도시에 작은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었다.

그렇게나 소망하던 '내 집'을 장만했지만, 그의 고단한 삶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아파트 구매 때 받은 수십 년짜리 주택담보대출의 이자와 원금을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벌어들이는 돈의 70%를 무조건 저축하고, 대출 이자를 내고 남은 돈으로 생활했고요. 그렇게 저축으로 일정 금액이 모이면 대출금을 상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애들이 원망을 하긴 했지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아이들을 위해 주에 한 번은 꼭 밖에서 외식합니다. 그렇게라도 시간을 내서 서로 이야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비록 자신의 몸은 여전히 고단했지만, 가족들과 오순도순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했기에 마음만은 정말 행복했다고 한다.   
 
불행은 겹처서 왔다.
 불행은 겹처서 왔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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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경철씨는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다가 교통사고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는 중상을 당했다. 일주일 만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한 그는, 하루라도 빨리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치료와 재활을 받았다. 그리고 한 달 후,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회사의 냉정한 '해고' 통보였다.

"퇴원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어느 날 집으로 건강보험공단에서 지역 보험으로 변경되었다고 통보서가 왔더라고요. 해고된 거죠. 사전에 어떤 말도 없이 그냥 해고 한 거죠. 벌이는 있어야 하니까 택시 운전도 해보고 방송 차량 운행도 해보고 했는데 택시 운전은 정말 아니더라고요. 사납금이 있어서… 그래서 밤에는 투잡으로 치킨집에 나가서 배달했어요."

그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가족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사고 이전처럼 투잡까지 해야 했다.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더니 점점 한쪽 팔과 한쪽 다리에 힘이 빠지더라고요. 말도 어눌해지고 지금도 한쪽 다리를 조금 절어요. 그래서 주간에 하던 일들은 다 그만두고 치킨집에서 배달만 하고 있어요."

그들이 투잡, 스리잡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

필자가 자영업을 하던 시절, 일반 직장인일 때는 본 적 없는 생경한 풍경을 목격했다. 바로 경철씨처럼 투잡, 쓰리잡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한 가족의 가장이었다.

하루에 보통 12시간을 넘겨 15시간씩 일했고, '주말'이란 단어는 무의미했다. 그러니 가족과 정을 나눌 시간은 거의 없었다. 이 상황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유리잔이나 다름없는 연약한 가족 관계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내가 지켜본 경철씨의 가족애는 남달랐다. 하루 대부분을 일에 할애해야 했던 그는 비록 휴대폰의 문자이지만 가족과 틈틈이 대화를 이어 갔다. 자녀들의 바른 성장을 위해 맞벌이가 아닌 외벌이를 선택하여 모든 경제적 부담을 홀로 떠안았다.

인터뷰 당시 나는 그에게 '부양의 부담으로 혹시라도 가족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요. 그렇지는 않고 너무 미안해요. 결과만 보면 원망이 생길 수도 있지만 지금 아이들이 중고생들이라 교육비도 많이 필요할 때고 대출금도 있고. 하여튼 지금 가족들에게 돈이 많이 필요할 때인데 제가 그렇게 못하고 있으니 너무 죄스러워요…"

언젠가부터 그의 모습을 동네에서 볼 수 없었다. 가끔 그의 근황이 궁금했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기며 나 또한 투잡인으로 생업에 열중했다(사장이란 타성에 젖어 지지부진한 자영업에 안주하던 필자를 각성 시킨 것이 바로 경철씨의 모습이었다).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온다고 했던가. 어느 날 우연히 경철씨를 고용하고 있던 치킨점 사장으로부터 그의 안부를 들을 수 있었다.

"경철씨, 얼마 전에 또 사고 났어요… 배달하다가… 좀 심하게 다쳐서 입원 치료받고 지금은 집에서 쉬고 있어요, 전화 한번 해봐요."

그는 전화 통화에서 골절에 이까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그에게 연달아 닥친 이 불행에, 나의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빨리 쾌차하고, 건강을 회복하시라'는 상투적인 말로 통화를 끝내야 했다.

경철씨는 첫 번째 사고에서 '산업재해' 판정도 받지 못했다. 지금은 출퇴근 중 사고에 대해 '산업재해'를 인정해주고 있지만, 당시는 출근 중 사고는 사실상 '산재'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관련 법이 개정되기 직전이었다). 

물론 교통사고로 병원비와 피해에 대해 일부 보상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입은 사고에 대한 피해 보상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는 당장 생계를 위해 무리하게 일을 나가야 했고, 결국 이제는 아르바이트조차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는 택시드라이버가 되었다.
 그는 택시드라이버가 되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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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 또한 치열한 삶 속에서 그를 잊어가던 어느 주말, 투잡으로 일하는 가게에 출근하러 걸어가던 중 바로 옆 도로에서 경적이 울렸다. 인도에 있던 나는 그 경적 소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경적이 울리고, "사장님!" 하는 소리가 들렸다. 택시가 보였다. 운전자는 경철씨였다. 

"아… 어떻게 된 거예요? 몸은? 택시 기사는 힘들다면서?"

신호 대기 중인 그에게 나는 바쁘게 말을 쏟아냈다.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어쩔 수 없죠."

짧은 대화 중 신호가 바뀌자 그는 서서히 차를 움직이며 "사장님~ 월급 타면 맛있는 거 사줄게요"라는 말과 함께 특유의 순박한 미소를 던지고 사라졌다. 사라져가는 그를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사로잡혔다. 그가 이 속절없는 시간 속에서 얼른 빠져나오길 바라면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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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에서 자영업자 그리고 시급제 노동자와 법인대표로 일하며 느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같은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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