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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하영과 민영기도 당시 대신으로서 을사오적 못잖게 망국에 기여했다는 의견도 많다. 그래서 '을사5적'이 아니라 '을사7적'이라는 주장이다. 조양회관(광복회 대구지부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을사오적 사진에 이하영과 민영기를 덧붙인 을사칠적 사진을 만들어보았다.
 흔히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하영과 민영기도 당시 대신으로서 을사오적 못잖게 망국에 기여했다는 의견도 많다. 그래서 "을사5적"이 아니라 "을사7적"이라는 주장이다. 조양회관(광복회 대구지부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을사오적 사진에 이하영과 민영기를 덧붙인 을사칠적 사진을 만들어보았다.
ⓒ 조양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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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8월 22일 나라를 일제에 송두리째 내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제1차 한일 협약이 체결되었다. 협약은 재정과 외교 관련 국가 대사를 전적으로 일제가 추천한 고문의 의견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고 강제했다. 다른 나라와의 조약 체결 등 모든 일을 일본 정부와 상의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자주 독립국가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한제국의 위상은 국제적으로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바닥까지 추락하고 말았다.

협약이 체결되는 과정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정부 내에서 토론을 거친 바도 없었다.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尹致昊)는 자기 임의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께(林權助)의 요구에 부응해 조인했다. 하야시가 8월 12일 내놓은 안을 윤치호는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래는 윤치호가 인장을 찍은 협약서의 핵심 내용이다.

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재무 고문을 모셔와 그의 의견을 물어 정책을 시행한다.
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외국인 고문 1명을 외교 고문으로 모셔와 그의 의견을 물어 정책을 시행한다.
한국정부는 외국과의 조약 체결 등 중요 안건에 관해 미리 일본정부 대표자와 협의한다.


협약에 따라 곧장 '외국인 용빙(傭聘, 사람을 모셔옴) 협정'이 체결되었고, 일본 대장성 주세국장 메가타(目賀田種太郞)가 재무 고문, 일본 외무성 미국인 직원 스티븐스(Stevens)가 외교 고문으로 왔다.

메가타는 1906년까지 일본으로부터 1150만 원에 이르는 차관을 도입시켰다. 그 무렵 대한제국의 1년 예산은 1300만 원 수준이었다. 메가타는 우리나라를 일제의 경제적 식민지로 만드는 공작을 추진했던 것이다.

한국을 일제의 경제적 식민지로 만든 주역 메가타
 
 대구 조양회관에 전시되어 있는 장인환, 전명운 지사의 사진이다. 두 지사는 1908년 3월 22일 대한제국 외교 고문인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하여 처단했다.
 대구 조양회관에 전시되어 있는 장인환, 전명운 지사의 사진이다. 두 지사는 1908년 3월 22일 대한제국 외교 고문인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하여 처단했다.
ⓒ 조양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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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스와 용빙 계약을 체결한 당사자는 외부 대신 이하영이었다. 이하영이 스티븐스에게 준 계약서에는 아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대한국 외부 대신은 외교 관계 문서를 모두 스티븐스에게 공개한다.
대한국 외부 대신은 외교상 모든 안건을 반드시 스티븐스의 동의를 얻은 다음 처리한다.
스티븐스는 외교에 관한 의견을 직접 대황제 폐하께 건의할 수 있다.
스티븐스는 외교에 관한 의정부 회의에 참석한다.


그해 12월 최익현(崔益鉉)은 "간사한 무리들이 폐하 앞에서는 아양을 떨지만 실제로는 임금을 팔고 나라를 팔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나라를 잃은 것은 권력을 가진 신하의 반란이나, 적국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한 탓이었지, 적과 칼 한 번 부딪혀 보지 않고 조약을 성립시켜 망한 적은 없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성상(聖上, 임금)께서는 결단을 내려 매국 간신 5, 6인부터 거리에서 능지처참하시고, 그 아류들도 죄에 따라 죽이거나 귀양 보내소서" 하고 고종에게 상소했다.

현대의 장관급인 정2품 김학진(金鶴鎭), 특진관 조병세(趙秉世), 시종원 경 남정철(南廷哲)도 최익현의 상소가 옳다면서 시급한 개선을 주장하였다.

고종에게는 나라를 바로세우려는 의지가 없었다

하지만 고종에게는 아무 의지가 없었다. '이미 일제 및 앞잡이들의 준동 속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황제는 모두 의례적으로 우대하는 비답(임금의 대답)을 내리는 데 그쳤다(국가보훈처 <의열 투쟁사>).' 이루어지는 조치도 없었고, 대비책도 없었고, 개선되는 바도 없었다.

일제는 일본을 "이웃 적"이라고 지칭함으로써 두 나라의 우의를 해친 최익현을 엄중 처단하라고 요구한 데 이어 헌병을 풀어 최익현, 김학진, 전국에 항일 투쟁 격려문을 배포한 허위(許蔿) 등을 연행하여 가두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각 부처와 지방의 관찰사청(현재의 광역 시청과 도청)에 참여관(參與官)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인을 배치하여 내정을 간섭하고, 각종 이권을 가로챘다. 경찰권도 침탈하고, 군대 축소안도 내놓았다. 국가 예산만 낭비한다면서 대한제국이 외국에 파견해둔 공사를 철수시켰고, 서기관 등도 남은 사무가 끝나는 대로 소환하겠다고 나섰다.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 무성서원에 세워져 있는 최익현의 창의 기념비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 무성서원에 세워져 있는 최익현의 창의 기념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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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이한응(李漢應)은 영국 주재 '서리 공사'였다. 공사 민영돈이 소환되어 귀국해버린 상황에서, 28세이던 1901년(광무 5) 이래 3년째 참서관(공사와 서기관 사이 직급)으로 일해 온 그가 31세 나이로 대한제국을 대표해 외교 업무를 수행 중이었다. 그러나 이미 외교권이 일제의 수중으로 넘어간 뒤라 '16세에 관립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21세에 성균관 진사 시험에도 합격하여 신·구 학문을 겸비한(<의열 투쟁사>)' 이한응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중국에 근무하던 공사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3월 24일 철수하였고, 4월 21일에는 주한 일본 임시 대리 공사 하기와라 모리이치(荻原守一)의 요구에 따라 하와이 주재 일본 총영사를 한국 명예 대사로 임명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참정 대신(좌의정에 해당) 민영환(閔泳煥)은 각국에 파견되어 있는 우리나라 공사들을 소환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다가 이미 면직되었다(이상 국사편찬위원회 <고종 시대사>).

외교권을 빼앗긴 나라 외교관의 치욕감과 울분

이한응은 한일 의정서 체결과 제1차 한일 협약 체결 이후 난국을 돌파해 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는 몇 달에 걸친 애끓는 고민 끝에 '몸을 조국의 제단에 깨끗이 바치는 것만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단정했다(<의열 투쟁사>).' 마침내 5월 12일 그는 유서를 썼다.

아아, 나라는 주권이 없어졌고(國無主權) 사람은 평등을 잃었다(人失平等). 모든 외교에 치욕이 극심하니 피 끓는 사람으로서 어찌 참을 수 있으랴! 아아, 나라는 머잖아 멸망하고(宗社其將廬失), 민족은 장차 노예가 되겠구나(民族其將奴矣)! 구차하게 살아본들 치욕만 더 심해질 터이니, 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니 더 할 말이 없구나.

덧붙이는 글 | 기사가 너무 길어져 다음 회로 나누어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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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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