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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로 인해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세워진 '고려인 민족학교'가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는 것.

민족학교는 러시아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1860~1920)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최재형기념사업회와 김 발레리아 교장의 주도로 지난 2019년 9월에 개교한 한국어·문화 전문 교육기관이다.

해당 학교는 국내 관광객들의 역사탐방 등으로 재정을 충당해왔는데, 코로나로 인해 관광이 중단되면서 지금은 교사들 월급조차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지난 2월 14일, 최재형 선생의 손자 최 발렌틴 한국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의 별세 소식에 이어 가슴이 무거워지는 소식이었다. 더욱이 올해는 최재형 선생 순국 100주년이기에 잇따른 악재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최재형 고택에서의 기억

지난 2019년 여름, 나는 천도교중앙총부에서 주최한 '제9차 보국안민 발자취 탐방단'의 일원으로 러시아 지역 한인독립운동 사적지를 답사하고 돌아왔다.

당시 최재형 선생 순국 100주기를 앞두고, 러시아 고려인 사회에서는 선생의 기념비와 흉상을 건립하고, 민족학교 건립을 추진하는 등 선생에 대한 재조명 분위기가 활발했던 기억이 난다.

답사 둘째 날 찾았던 '최재형 고택' 역시 새롭게 복원한 결과물이었다. 최재형 고택은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거주했던 옛집이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고려인 민족문화자치위원회에서 건물을 매입, 리모델링을 거쳐 전시관으로 개관했다.
 
최재형 고택 전경 2019년 새롭게 복원된 최재형 고택 전경
▲ 최재형 고택 전경 2019년 새롭게 복원된 최재형 고택 전경
ⓒ 강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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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에는 러시아 한인 이주의 역사부터 최재형 선생의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게 전시하고 있었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이었던 선생의 이력은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최재형 고택 내부 전시관 전시관으로 탈바꿈한 '최재형 고택' 내부 모습
▲ 최재형 고택 내부 전시관 전시관으로 탈바꿈한 "최재형 고택" 내부 모습
ⓒ 강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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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지역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1860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최재형 선생은 9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러시아 지신허로 이주했다. 조국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을 때 떠나왔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늘 민족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던 듯하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자신들의 땅으로 이주해 온 한인 농민들을 부역에 동원했는데,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선생은 한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단번에 러시아 한인 지역의 지도자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러시아 지역 한인들이 선생을 부를 때 러시아어로 난로를 뜻하는 '페치카'를 붙여 '최 페치카'로 부른 것만 봐도 러시아 한인사회에서 선생이 갖는 위상이 어떤 것인지 짐작케 한다.

선생은 한인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했다. 간도관리사였던 이범윤과 노보키예프스크에 의병 본부를 조직했으며, 1908년 4월에는 항일조직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총장에 선임됐다.

"우리도 개개히 그와 같이 철환(鐵丸)을 피치 말고 앞으로 나아가서 붉은 피로 독립기를 크게 쓰고 동심동력하야 성명을 동맹하기로 청천백일에 증명하노니 슬프다 동지제군이여" - 동의회 취지서, <해조신문> 1908년 5월 15일 자.

최재형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안중근 의사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전까지 최재형 선생의 집에 머물며 사격연습을 했다고 한다. 안 의사의 순국 직후, 남은 안중근 가족들을 돌봐준 것도 최재형이었다. '안중근의 후원자'라는 수식어가 탄생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최재형 고택' 내부에 전시된 동의회 조직도
 "최재형 고택" 내부에 전시된 동의회 조직도
ⓒ 강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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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타깝게도 '4월 참변'으로 선생은 이국땅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4월 참변이란 1920년 4월 4일, 연해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볼셰비키 세력과 러시아 지역 한인의병들의 항일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들을 습격한 사건을 말한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61명, 우수리스크에서 76명의 한인이 체포됐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최재형 선생도 체포됐다. 피신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녀들에게 보복이 가해질 것을 알고 순순히 붙잡혔다.

"만약 내가 숨는다면, 일본인들이 잔인하게 너희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나는 일본인들의 기질을 안다. 그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학대하는지." - 최재형 선생의 유언

자신이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막강한 자금력으로 러시아 지역 한인들을 보듬어주고 항일의병을 후원했던 '페치카' 최재형. 그는 그렇게 안타까운 최후를 맞았다.

최재형 고택에서 느낀 '부끄러움'

부끄럽게도 당시의 나는 답사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최재형 선생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답사 코스에 최재형 고택이 포함된 것을 보고도 딱히 큰 감흥이 없었다.

그랬기에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맨 처음 느꼈던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당시 나는 '국가보훈처 온라인 기자단'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끼친 선생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선생의 이름 석 자를 모르고서 독립운동사를 이야기했던 내 스스로가 민망할 따름이었다.

다행히도 작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이어 올해 최재형 선생 순국 100주년을 맞아 선생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안중근의 후원자'가 아닌 '러시아 한인사회의 지도자'로서의 선생의 생애가 재조명되면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최재형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재형 흉상 '최재형 고택' 마당에 있는 흉상
▲ 최재형 흉상 "최재형 고택" 마당에 있는 흉상
ⓒ 강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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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학교를 살리는 것은 우리의 의무

그렇기에 선생의 순국 100주기를 앞두고 들려오는 민족학교의 '폐교 위기' 소식은 착잡하기만 하다. 현재 최재형기념사업회에서는 재정 확보를 위한 모금 운동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유례없는 전염병 사태로 인해 전 세계가 공포에 떨고 있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한 관심과 연대가 필요한 곳이 많다. 고려인 민족학교 역시 마찬가지다. 

민족학교에 다니는 고려인들은 모두 일제의 핍박을 피해 이주했던 한인들의 후손이다. 그들 중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도 있다. 그들이 자신의 뿌리가 '한국인'임을 잊지 않도록, 민족학교를 살려야만 하는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렇기에 나는 정부에 건의하고 싶다. 민족학교가 문을 닫는 일이 없도록 대한민국 정부가 긴급 재정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정부의 지원만으로 부족하다면 기념사업회 주도로 대국민 모금운동을 통해 십시일반 보태는 방법도 있다. 

그것이 독립운동가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나라에 살아가는 국민으로서 당연한 도리 아닐까? 최재형 선생 순국 100주년을 앞두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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