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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올해 창간 20주년을 맞아 '나의 스무살' 기사 공모를 진행합니다. 청춘이라지만 마냥 빛날 수는 없었던, 희망과 좌절이 뒤섞인 여러분의 스무살 이야기를 기다립니다.[편집자말]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홍보물 광주극장에 로비에 전시된 자료
▲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홍보물 광주극장에 로비에 전시된 자료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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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별들의 고향>이 극장에 걸렸을 때 내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스무 살에는 <영자의 전성시대>를 보았다.

'인간의 삶이 어디까지 얼마나 처절하게 훼손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는 영화 두 편이, 모두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만 같아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어제의 일처럼 뜨겁게 가슴을 두들긴다.

꿈도 희망도 그 무엇도 없이 숨이나 쉬던 시기에 나는 회현동과 필동이 섞이는, 남산 케이블카가 어렴풋이 보이는 볼링장에서 핀세터 일을 하고 있었다. 잠시라도 긴장을 풀면 정강이가 으깨지고 머리통이 날아가기 십상인 위험한 일이었지만 월급 같은 것은 없었다. 고객이 '팁'이라는 명분으로 볼링공 구멍에 동전을 넣어서 굴려주면 그걸로 먹고사는 희한한 직업이었다.

그때까지 내 인생은 온통 희한하고 괴상하고 신기한 '탈선의 연속'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을 안 외웠다고 무자비하게 때리는 초등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도 희한한 종자였고, 선생님이고 뭐고 그냥 확 들이받아 버리고 싶었어도 감히 그렇게는 못 하고 학교를 그만둬버린 나 자신도 지금 생각하면 괴상한 인간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도 뛰쳐나온 이후 나는 극장 영사실을 시작으로 이발소, 공장, 룸살롱 등에서 열 개도 넘는 일을 했지만 스무 살 나이에 이르도록 한 번도 인건비 같은 것은 받아보질 못했으니 그 또한 시시하거나 범상한 경험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내 생각이 짧고 눈이 먼 탓이었다. 전봇대에 붙어 있는 '월수 얼마 보장'이라는 문장이 어쩌면 나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놓고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여겨지던지, 신기하게도 나는 매번 당하면서도 월수 얼마 보장이라는 전단지만 보면 신심이 두터운 종교인처럼 확 믿어버리고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굶어죽지 않고, 맞아죽지도 않고 살아서 나이 스무 살에 사글세방을 얻어놓고 자취생 노릇까지 하고 있었으니 그럭저럭 성공한 인생이기는 했다. 적어도 월세 보증금조차 없어서 허덕거리는 청춘은 아니었던 것이다.

월세를 제때 못 내면 쫓아낼 수도 있다는 집주인 협박이야 '뭐 그렇다고 죽기야 하겠어?' 하는 정도의 자문자답 한 번이면 대충 뭉개고 버틸 정도의 객기가 있었다. '간덩이'가 부어오른 자만이 갖출 수 있는 배짱이 어느새 생겨나 있었다.
  
간덩이가 잘못 부어올랐다면 필경 뒷골목 양아치나 조폭 똘마니의 길을 걸었겠지만, 그놈의 국민교육헌장 사건 탓이었는지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쪽으로는 머리가 영 안 돌아갔으며, 자신도 없었다. 그렇게도 모범적인 나를 향해 '도적이 되어야 한다'고 속삭인 목소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영화 <별들의 고향>이요 <영자의 전성시대>였다.
  
'후안무치의 달인'에게 우리는 늘 주눅 들어 있었다
 
 영화 < 별들의 고향 > 포스터
 영화 < 별들의 고향 > 포스터
ⓒ 화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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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는 내게 있어 그냥 재미있는 구경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서워도 재미있고, 슬퍼도 재미있고, 웃겨도 재미있는 요상하게 신기한 구경거리가 바로 '영화'였다.

돈이 생기면 극장으로 달려가서 청춘을 탕진했으나, 극장을 나오면 무슨 영화를 봤는지조차 잊어버리곤 했다. 그런데 <별들의 고향>과 <영자의 전성시대>는 가슴을 파고드는 울림이 영 달랐다. 그 두 편의 영화는 등장인물 모두가 서울에 와서 시내버스 '안내양'을 하거나 식모를 살거나 중국집 '뽀이'(보이, Boy)를 하는 내 고향의 누이와 형들을 연상케 하며, 내 뼛속까지 들어와 오랜 시간 나를 고문했다.

'이게 뭐지? 우리도 결국은 저렇게 죽어나가는 것인가?'
   
내 생애 처음으로 해보는 심각한 의문이었다. 오랜 시간 괴로웠다. 날마다 슬펐다. 딱히 무슨 이유도 없이 억울하기도 했다. 그때 눈에 띈 것이 내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과 그 집 주인 '아줌마'의 돈벌이 방식이었다.

그 집은 일본식 이층 목조주택으로 전후좌우 빙 둘러 연탄아궁이만 뚫린 셋방이 열세 개였다. 담이 없는데도 육중한 담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넓이가 이 미터도 채 안 되는 대문 위에까지 콘크리트를 쳐서 창고를 만들어놓은 까닭에 안에서 봐도, 밖에서 봐도 늘 숨이 막히는 희한한 집이었다. 

열세 개의 방 중 열한 개는 이른바 '아가씨'들이 세 들어 살았다. 나머지 둘 중 하나는 내가 살았고, 다른 하나는 젖먹이 아이가 딸린 부부가 그 작은 방에서 살고 있었다. 낮에는 잠을 자거나 집 주인과 화투를 치고, 해가 질 무렵이면 출근했기에 나는 아가씨들의 직업이 뭐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열일곱 나이에 월수 얼마 보장이라는 전봇대 전단지를 보고 찾아간 곳이 룸살롱이었고, 웨이터보조라는 직함을 달고 다섯 달 남짓 있는 동안 돈벌이는커녕 손님들이 먹다 남긴 안주나 술로 겨우 배를 채워야만 했던 나로서는, 그 아가씨들의 직업을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게 돼 있었다.

아가씨들은 일명 '호스티스'였다. 출근과 동시에 '멤버'라는 자에게 출근비 명목의 현금을 지불해야 하는 괴상한 직업이었다. 만약 그날 돈이 없어서 출근비를 못 내면 멤버는 그녀들을 룸에 넣어주지 않았다. 그러니 달러돈을 내서라도 출근비는 반드시 지참하고 출근을 해야 했다. 룸에 들어갈 차례가 돌아오면 영업부장이 다가와서 한 마디 위협적으로 속삭인다. '손님 몰래 술을 마구 버려야지 안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패널티를 준다'고.
  
룸살롱의 위계질서는 조폭 세계와 비슷했기에 그녀들의 손님 몰래 술 버리는 기술은 정말 뛰어났다. 그렇다고 백 퍼센트 완벽한 것은 아니어서 가끔은 손님들 손에 죽도록 얻어맞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당시 룸살롱 호스티스란, 돈은 돈대로 뜯기고, 덤으로 얻어맞는 게 의무인 직업이었다. 그런 그녀들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 주인아줌마한테도 뜯김을 당하고 있었다.

큰아들이 고속도로 순찰대를 나가는 경찰관인 까닭에 날마다 현금이 얼마씩 들어온다는 자랑을 하루에도 몇 번씩 입에 올리던 주인아줌마는 일수놀이의 달인이었고, 민화투건 육백이건 고스톱이건 쳤다 하면 돈을 따는 화투치기의 달인이었다. 전기료와 수도료를 자기네는 식구가 다섯에 냉장고며 세탁기며 온갖 가전제품을 사용하면서도 무조건 가구당 얼마 하는 식으로 분배해 뜯어먹는 후안무치의 달인이기도 했다.

세입자들이 뭘 몰라서, 바보라서 당하는 건 아니었다. 알지만 더러워서 당해주는 것일 뿐이었다. 더러움의 주인공은 역시 '돈'이었다. 세입자들 중 누구 한 사람도 주인아줌마에게 빚을 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설령 지금 당장은 빚이 없다 해도 이제 곧 빚을 지게 돼 있었다. 그 누구도 정해진 날짜에 월세를 정확히 낼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쩔 것인가.

특히 아가씨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일수를 찍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그녀들은 돈 쓸데가 엄청나게 많았다. 누구는 고향의 부모님 약값으로, 누구는 도망 중인 오빠의 도피 자금으로, 또 누구는 동생들 학비로, 각종 기타 명목으로 그녀들은 항상 돈에 쫓기고 있었고 습관적으로 일수놀이의 달인 주인아줌마에게 손을 벌렸다.

주인아줌마는 일수놀이의 달인답게 십 만원이 넘는 돈을 빌려주는 법이 없었다. 큰돈을 주었다가 야반도주라도 하면 머리 아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오 만원 아니면 십 만원이었다. 오 만원은 하루에 오천 원씩 열다섯 번을 찍어야 하고, 십 만원은 역시 하루에 오천 원씩 서른 번을 찍는데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비싼 이자였다. 그나마도 미운털이 박히면 빌릴 수조차 없다.

미운털이란 이를테면 전기료나 수도요금 같은 '하찮은 일'로 따진다거나, 화투를 치자고 오라 했는데 아프다고 안 온다거나 하는 그런 것들이었다. 때문에 아가씨들은 오늘은 나, 내일은 너 하는 식으로 최소한 사흘에 한 번씩은 교대로 주인아줌마와 화투를 쳐서 돈을 잃어줘야 했고, 점심 때가 되면 점심을 사줘야 했고, 탕수육이건 통닭이건 느닷없이 먹고 싶어 죽겠다고 하면 각자 얼마씩 추렴해서 먹여줘야만 했다.
  
그런 호랑말코 같은 장면들을 무수하게 보면서도 나는 속으로나 침을 뱉을 뿐이었고, 어떻게든 해보자는 생각 같은 것은 감히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던 내가 영화 <별들의 고향>과 <영자의 전성시대>를 보고 나서 간덩이가 터질 정도로 커져버렸던 것인지 뜬금없는 생각에 빠져드는 시간이 잦아지고 있었다.

'아들은 교통경찰관으로 날마다 밖에서 운전기사들한테 삥을 뜯어오고, 어미는 그 돈으로 일수놀이를 해서 돈을 가마니에 그냥 쓸어 담는구나.'

그런 너절한 생각에 빠져 있는 시간이 우울하고 슬프고 괴로웠다. 그 바람에 굴러오는 볼링공을 제때 피하지 못 해서 정강이가 으깨질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 내가 이상해 보였던지 함께 일하는 또래의 사내녀석이 아는 체를 해 왔다. 나는 있는 그대로를 다 얘기해 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단 일 초의 망설임도 고민도 없이 즉각 "너 그 돈을 어디에 두는지 알지?"라고 했다.

정의로운 도적이 되고 싶었다
  
 우리는 그때 '정의로운 도적'을 꿈꾸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정의로운 도적"을 꿈꾸고 있었다.
ⓒ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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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어디에 두는지 아느냐'는 질문 한 마디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길이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녀석은 히죽 웃고 있었고, 나는 바싹 긴장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월세를 열흘 이상 밀리면 일수라도 찍어서 내라고 소리소리 질러대는 주인아줌마 덕분에 돈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커다란 봉황새 두 마리가 날개를 펴고 있는 자개농 문을 열면 또 하나의 작은 농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금고'였다. 그 안에는 돈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 번이라도 일수를 찍은 사람이라면 본적 주소와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지장을 찍어야 했기 때문에, 이를테면 나의 인적사항이 착실하게 보관돼 있는 셈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의기투합했고, 그날부터 차근차근 연구해 나갔다. 덮어놓고 한밤중에 망치 같은 것으로 문고리를 따고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우선 우리가 왜 그 돈을 꺼내고자 하는지, 꺼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오랜 시간 토론을 벌였다. 꺼낸 돈의 액수가 얼마이건 무조건 3분의 2는 불쌍한 아가씨들에게 분배한다는 대원칙은 쉽게 끌어낼 수 있었지만, 분배를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쉽지가 않았다. 아가씨가 한두 명도 아니고 열 명도 넘는데 돈 보따리를 들고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찾아낸 방법이 아가씨들의 출근 시간에 골목에서 기다렸다가 전해준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때 '정의로운 도적'을 꿈꾸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잠도 안 오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히죽히죽 웃음이 나오는 은밀하게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헤쳐나가야 할 길은 아직 멀기만 했다. '언제 어떻게 거사를 도모할 것인가' 하는 가장 큰 문제가 호랑이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우선 경찰관 아들의 출근과 퇴근 시간을 면밀히 관찰해 통계를 내고자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어떤 날은 초저녁에 출근해 새벽에 퇴근하고, 다음 날은 아예 안 나가버리고, 그다음 날은 아침에 출근해서 밤늦게 돌아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정확한 통계를 낼 수가 없어서 당황하고 또 당황하는 동안 세월은 척척 잘도 흐르고 있었고, 작전계획은 아직 걸음마도 떼지 않았건만 세월은 어느새 석 달이나 지나 있었고, 우리는 슬슬 딴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만약에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아무리 교통이라지만 그래도 경찰관인데 안 잡힌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러는 동안 우리는 차츰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생각을 하고 또 해봐도 우리가 도모하는 도적질은 정당해 보였다. 정당해 보이면서도 나쁜 짓이라 생각했다. 뭔가 굉장히 어긋나 있었다. 이게 뭐지? 뭐가 문제지?

갈등과 고민은 계속되었고 우리의 의욕은 팍팍 꺾여나갔다. 좀 더 다른 차원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그때 구체적으로 했나 여부는 지금 생각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로부터 얼마 뒤 나는 정의로운 도적에 대한 꿈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점집이 수도 없이 늘어선 미아리고개에 있는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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