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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삐딱하게 보기'는 피렌체와 르네상스를 건축, 종교, 정치권력 등 다양한 각도로 조명해 보려는 연재입니다. 이번에는 '르네상스의 라이벌'을 몇 편을 통해 다룹니다.[편집자말]
1504년 9월 8일, 피렌체에 5미터가 넘는 거인이 나타났다. 그 거인은 도시의 자부심이자 상징이 되었다. 사람들은 특정 사건을 언급할 때 이 거인을 기준으로 잡기도 했다.
 
"계약과 약속이 거인이 등장한 지 한 달 후 체결되었다." 대화 중에도 시간을 "이것은 거인 이전이었다" 혹은 "거인이 나타난 지 두 주 후에 생긴 일이기 때문에 내가 잘 기억한다" 등으로 구분했다. (어빙 스톤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중)> 545쪽, 성로 옮김, 까치)
 
이 거인은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이라 불리는 다비드이다. 진품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데, 잘 알다시피 작가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다비드를 만들면서 그 자신도 일 기간테(Il Gigante, 거인)라 불리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가면 진품을 만날 수 있다. 커다란 전시실에 오직 이 한 작품만이 전시되어 있다.
▲ 다비드상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가면 진품을 만날 수 있다. 커다란 전시실에 오직 이 한 작품만이 전시되어 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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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초의 돌덩어리

1499년, 피렌체 시의회는 도시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작품을 만들어 줄 조각가를 공모한다. 그리고 지금껏 어떤 것보다 크고 질 좋은 대리석도 제공하기로 한다. 

이 무렵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 피에타를 만들고 있었다. 피에타는 불과 24세였던 미켈란젤로에게 큰 명성을 안겨 준 작품이다. 피렌체의 공모 소식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어서 피에타를 마무리하고 피렌체로 가고 싶었다.
 
  로마 성베드로 성당에 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마리아의 가슴 띠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 하지만 훗날 이 일에 대해 후회한다.
▲ 피에타  로마 성베드로 성당에 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마리아의 가슴 띠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 하지만 훗날 이 일에 대해 후회한다.
ⓒ 한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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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작업이 끝나자마자 미켈란젤로는 서둘러 피렌체로 돌아온다. 그리고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인근 공터 한 켠에 놓여 있던 거대한 대리석을 보자마자 마음을 빼앗긴다. 이 대리석은 일명 '두초의 돌덩어리'라 불렸다. 그 이유는 조각가 아고스티노 단토니오 디 두초가 과거 시의회에게 위임받았지만 중간에 그만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초는 대리석 가운데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 상처 때문에 어떤 작품을 구상해도 구도를 잡기 어려웠고, 여러 조각가가 도전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그 대리석을 직접 조각해보고 싶은 열망에 휩싸였다. 그에게 조각이란 대리석 안에 이미 존재하는 형상을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불필요한 부분을 걷어내는 것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몇일 동안 치열하게 연구해서 다비드로 주제를 정한다. 그는 상처 입은 대리석 안에 있는 거인의 모습을 이미 보았는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는 시장이었던 소데리니를 찾아가 막무가내로 그 대리석을 맡겨 달라고 조른다. 소데리니는 미켈란젤로가 어렸을 때 로렌초 데 메디치와 함께 살 때부터 친분이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열정을 확인한 소데리니는 시의회를 설득해서 대리석을 내어준다. 작업장은 두오모 성당 근처에 만들어졌고 미켈란젤로는 2년 동안 대리석에 매달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조각은 하찮은 것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1519)도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였고, 다빈치는 화가였다. 이 두 사람이 서로의 영역에서 각자의 작업을 했다면 좋았겠지만 피렌체는 좁은 도시였고 최고였던 두 사람은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다빈치보다는 미켈란젤로가 더 경쟁심을 느꼈던 것 같다. 그 당시 피렌체에서 다빈치는 이미 최고로 칭송 받으며 여러 분야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피에타의 성공으로 한껏 자신감이 올라간 젊은 미켈란젤로에게 다빈치는 최고가 되기 위해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이었다.

두 사람의 영역이 다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작업 방식 자체가 판이하게 달랐다. 다빈치는 그림을 그릴 때면 가장 좋은 옷을 차려 입었다. 그리고 음악가를 불러 연주를 시킨 다음에 붓을 들었다. 반면에 미켈란젤로는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미친 사람처럼 돌덩어리에 매달렸다. 그의 옷은 언제나 더러웠고 몸에서는 악취가 풍겼다. 혹자는 미켈란젤로가 '영혼을 갉아 먹으면서' 조각을 한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다빈치가 조각을 회화보다 아래로 생각하는 것도 미켈란젤로를 화나게 했다. 심지어 조각가는 예술가가 아니라 그냥 노동자일 뿐이라고 한다. 다빈치에 따르면 조각가는 무거운 도구를 들고 하루 종일 중노동을 해야 한다. 그리고 작업이 끝났을 때 온통 먼지를 뒤집어 쓴 몰골은 공사판 노동자와 같다는 것이다. 반면에 화가는 작업이 끝나도 처음과 같은 우아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예술의 가장 고귀한 정점은 회화라고 말했다. 이런 말에 가만히 있을 미켈란젤로가 아니다.

나중에 어떤 모임에서 다빈치를 만난 미켈란젤로는 원시인이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리기 훨씬 전부터 인류는 돌을 새겼다고 공격한다. 그러면서 조각이야 말로 최초의 독창적인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듣던 다빈치는 예의 차분한 목소리로 그 주장을 인정한다. 하지만 뒤이어 내뱉은 말은 미켈란젤로의 속을 다시 한번 뒤집어 놓는다.
 
"그것은 고도의 회화가 개발되기 전까지만 통용되다가 이제는 사라져 가는 중이니까" (어빙 스톤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중)> 514쪽, 성로 옮김, 까치)
 
잔뜩 화가 난 미켈란젤로는 다빈치가 밀라노에서 실패했던 청동 기마상을 언급한다. 그리고 다빈치가 지금까지 제대로 끝낸 작품이 없다며 비아냥거렸다. 또한 과거 동성애 문제로 고발당했던 일을 끄집어낸다. 사실 논쟁에서 밀린 미켈란젤로가 다빈치에 대한 인신공격을 한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예술에서는 최고였는지 몰라도 성격은 다소 유치한 면이 있었다.

거인, 자리를 잡다

다비드가 완성되었을 때, 시의회는 그 조각상을 어디에 놓을지 결정하기 위해 자문단을 꾸렸다. 거기에는 다빈치도 포함되었다. 조각을 폄하하던 사람이 다비드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한다는 것이 미켈란젤로는 매우 불쾌했다.

여러 논의를 거쳐 다비드는 시청 앞에 세우는 것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이 거대한 조각상을 옮기는 일도 쉽지 않았다. 운반구에 조각상을 단단히 고정하고 마흔 명 이상이 달라 붙었다. 하지만 이동 속도는 시간 당 몇 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결국 조각상을 옮기는 데만 거의 일주일 이상 걸린다. 이 기간 동안 미켈란젤로는 밤마다 노숙을 하며 조각상 옆을 지켰다.

어느 날 밤, 괴한들이 다비드를 향해 돌을 던졌다. 미켈란젤로는 소리치며 쫓아갔지만 잡을 수 없었다. 그다음 날 밤에도 돌은 날아왔다. 결국 시의회는 무장 경비원을 잠복시켰고, 다시 괴한들이 나타났을 때 그들 중 여덟 명을 체포한다.

괴한들은 열 다섯 살 쯤 되는 소년들이었다. 대부분은 가족들이 벌금을 내고 석방되었지만 주모자 세 명은 재판을 받았다. 그들은 벌거벗은 다비드가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음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몇 년 전 극단적인 금욕주의로 피렌체를 휘어잡았던 사보나롤라의 추종자였다. 재판관들은 '예술에는 무식이라는 적이 있다'는 속담을 인용하며 그들을 감옥에 가둔다.
  
  운반구에 조각상을 단단히 고정시킨 후 매우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 다비드 상의 이동  운반구에 조각상을 단단히 고정시킨 후 매우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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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영광의 시간

드디어 다비드가 시청 앞에 자리잡았다. 사람들은 다비드가 피렌체의 강인함을 나타낸다며 미켈란젤로를 치켜 세운다. 미켈란젤로에게는 최고의 시간이었지만 그리 길게 가지 못한다. 당시 시청 건물 내 벽화를 맡은 다빈치가 밑그림을 공개했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역시 다빈치가 최고라며 여론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미켈란젤로는 다빈치가 그렇게 자랑하는 회화로 정면 승부를 펼치기로 한다.

(*다음 편에 계속)
 
  원래는 두오모 성당 외벽에 설치할 예정이었다. 사람들이 아래에서 올려다 볼 것을 계산해서 비율을 조절하다 보니 몸에 비해 머리가 다소 큰 편이다.
▲ 팔라초 베키오 앞의 다비드  원래는 두오모 성당 외벽에 설치할 예정이었다. 사람들이 아래에서 올려다 볼 것을 계산해서 비율을 조절하다 보니 몸에 비해 머리가 다소 큰 편이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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