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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즈 도운 <최제우 참형도>와 <최시형 참형도>
 시미즈 도운 <최제우 참형도>와 <최시형 참형도>
ⓒ 서울옥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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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역사에서 교조신원운동과 물리력을 통해 처음으로 관가에 저항한 인물은 이필제(李弼齊)다.

1825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나 진천으로 옮겨 살면서 무과에 급제하고 한때 영천으로 유배를 갔다. 풀려난 후 영해에서 최시형을 만나고 주변 지방을 돌면서 동지들을 끌어 모았다.

그가 동학에 입도한 시기는 1863년 10월, 최제우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될 때 수천의 동학도들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도로 연변에 모인 것을 보고 감화를 받아서였다. 1870년 7월 경상도 영해로 거처를 옮긴 이필제는 이 지역 동학도들과 어울리면서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중 최시형을 만나 교조 순교일인 신미년(1871) 3월 10일 봉기할 것을 제안했다.

내가 스승님의 원한을 씻어내고자 한 뜻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옛글에 이르기를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오히려 재앙을 받게 된다고 하였으니, 나 역시 천명을 받았습니다.

한 가지는 스승님의 욕을 씻어내자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못 백성들의 재앙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뜻하는 바는 중국에서 창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일을 일으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동쪽에서 받았으므로 그 도를 동학이라고 하였으니, 동(東)은 동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영해는 우리나라의 동해입니다.

이런 까닭에 동쪽에서 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스승님을 위하는 자가 어찌 따르려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스승님께서 욕을 받으신 날이 3월 초열흘입니다. 그날로서 완전히 정하였으니 다시 다른 말 하지 말고 나를 따르시오. (주석 3)

  
약전골목 입구의 동아쇼핑센터 맞은편 적십자병원(지금은 폐원 상태) 뒤에 있다.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지만, 그보다도 최제우가 처형된 곳으로 이름이 높다.
▲ 관덕정 약전골목 입구의 동아쇼핑센터 맞은편 적십자병원(지금은 폐원 상태) 뒤에 있다.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지만, 그보다도 최제우가 처형된 곳으로 이름이 높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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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교조 최제우가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지 7년째 되는 날인 3월 10일 이필제가 주동한 5백여 명의 도인과 농민이 교조 신원과 관의 탐학을 규탄하고자 탐관의 소굴로 알려진 영해부성으로 달려가 밤 9시경 관아를 포위했다. 갑작스런 군중의 침입에 당황한 포졸들의 발포로 1명이 죽고 1명이 부상당했지만 마침내 관아를 점령했다.

이필제는 달아나던 부사 이정을 붙잡아 관아 앞뜰에 꿇어앉히고 치죄하였다.

"너는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정사를 잘못하여 세상을 어지럽혔다.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탐하기가 저와 같으니 네거리에 방이 나붙게 되었고 시중에는 원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것이 읍내의 실정이니 네 죄가 어디 가겠는가. 용서하려 하지만 의로써 탐관오리인 이정을 죽여야 한다."고 꾸짖었다.

이정은 끝내 반성하지 않다가 동학도인의 장검에 목이 잘렸다. 날이 밝자 이필제는 관아에 있던 공전 150냥을 풀어 마을의 빈궁자들과 인근 5개 마을 주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도록 했다. 이필제는 이참에 영덕군 관아를 점령하고자 했으나 50리나 떨어진 곳이고 이미 방어에 나섰을 것으로 판단, 도인들과 영해관아를 물러나 산속으로 은신했다. 부사가 참수되었다는 소식에 인근 지역 수령과 관리들 중에 도망치는 자가 속출할 만큼 경상도 일원의 관가에 비상이 걸렸다.

이필제는 14일 최시형이 은거 중인 영양 일월산으로 들어갔다. 따르는 사람이 40여 명에 불과했다. 한편 정부는 흥해군수 김홍관을 영해부 겸관으로 임명하고 영덕현령 정중부와 인근의 영일ㆍ장기ㆍ청하의 현감을 출동시켜 일월산을 포위, 샅샅이 뒤졌다.
  
서산서원은 조선 숙종 때 사액을 받았다가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02년 어계 선생의 종중과 지역 유림들이 인근 사촌리에 다시 서원을 건립했다가 1980년에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
 서산서원은 조선 숙종 때 사액을 받았다가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02년 어계 선생의 종중과 지역 유림들이 인근 사촌리에 다시 서원을 건립했다가 1980년에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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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과 이필제 등은 일월산을 탈출하여 충북 단양의 도인 정기현의 집에 은거하면서 재기를 도모했다. 이들은 당시 대원군의 실정과 서원철폐령으로 전국의 유림들이 집단상소와 상경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고 이들과 연대투쟁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거사일인 8월 2일 집합장소인 조령의 주막에 예정된 인원이 모이지 않았다. 오히려 정보가 새나가서 관군이 들이닥쳐 주모자들을 체포했다.

이필제는 간신히 몸을 피했으나 며칠 뒤 문경 읍내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오랫 동안 삼남 일대를 누비며 동학 포교와 민란을 준비하고, 영해에서는 봉기에 성공하기도 했으나 상황과 조직이 여의치 않았다. 그는 한성으로 압송되고 1871년 12월에는 그를 문초하기 위한 추국청이 열렸다.

성명을 이리저리 바꾸고 종적을 날려 숨겨서 도당을 긁어모아 난을 일으키려한 것은 무슨 심보인가? 한 번 굴러서 호중(충청북도)을 선동했고, 두 번 굴러서 영남에서 옥을 일으켰고, 영해에까지 손을 뻗쳐 작변하였으니 지극히 끔찍하다. 또 독한 말은 간담을 흔들어 놓는다. 이미 오래 전에 도마 위에 오른 고기였는데 그물을 빠져나간 고기가 아직도 목숨을 붙이고 있으니 오래 신인이 다 같이 분을 참지 못하는 바이다. 또 조령에서 도둑 무리를 매복시켜 흉측한 계획을 품었다가 죄악이 꽉 차서 저절로 잡혀온 것이라, 밝은 천도 아래 어찌 감히 속이랴. 지금 엄한 심문 아래 앞뒤 역적질한 사정을 사실대로 아뢰어라.

이에 대해 이필제는 이렇게 답했다.

"천하에 진정이 없는 일이 없고 또 일이 없는 죄가 없다. 나의 정실에는 죄가 세 가지인데 조목에 따라 하나하나 물어보라." (주석 4)


이필제는 혹독한 추국에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조정의 부패와 최제우의 억울한 죽임을 토변하다가 1871년 12월 24일 모반대역부도죄로 능지처사되었다. 부인도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가족ㆍ일가친척이 연좌에 얽혀 멸문의 화를 당하였다.

영해지방은 비록 봉기 이후 대대적인 관의 탄압을 받지만 그들의 저항정신만은 꺾을 수 없었다.
 
구한말 최초의 평민 의병장이었던 신돌석 장군의 생가 터.
 구한말 최초의 평민 의병장이었던 신돌석 장군의 생가 터.
ⓒ 영덕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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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농민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주의식과 저항정신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896년의 의병운동 때 19세의 평민의병 신돌석이 등장할 수 있었고 1919년 3월 18일의 영해독립만세운동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이필제라는 민중봉기의 지도자로부터 시작된 영해동학농민의 난은 비롯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그렸던 이상마저 꺾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해동학농민의 난은 23년 뒤에 전개될 동학농민혁명의 전초전이었고 예행연습과도 같은 민중봉기였다.

이필제가 체포되어 마지막으로 쓴 이름이 진명숙(秦明叔)이었는데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이 자를 명숙(明叔)이라고 했다. 이 예사롭지 않은 두 사람의 이어짐은 그만큼 후대에 끼친 이필제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주석 5)


주석
3> 임형진, 「혁명가 이필제의 생애와 영해」, 『동학학보』, 128쪽, 동학학회, 2014.
4> 「역적 이필제ㆍ기현(岐絃) 등 국안(鞫案)」,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권 9.
5> 임형진, 앞의 책, 142~14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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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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