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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중항쟁의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제때 출범이 물건너 간데다, 자유한국당이 추천 위원 수 확대를 주장하면서 진상규명의 실질적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사진은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가족을 잃은 유족의 모습이 담긴 5·18미공개 영상의 한 장면.
 5·18민중항쟁의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제때 출범이 물건너 간데다, 자유한국당이 추천 위원 수 확대를 주장하면서 진상규명의 실질적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사진은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가족을 잃은 유족의 모습이 담긴 5·18미공개 영상의 한 장면.
ⓒ 광주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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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는 광주학살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세칭 '광주학살 원흉7적'으로 전두환ㆍ노태우ㆍ정호용ㆍ박준병ㆍ이희성ㆍ존 위컴ㆍ제임스 릴리를 꼽는다. 이들의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본다.

전문 연구가 못지않게 연구성과를 낸 노가원(소설가)의 「광주학살 원흉 7적의 현주소」 (월간 말, 1990년 5월 호) 중 7적의 광주항쟁 당시 역할 부문을 발췌한다.
 
 도청에 모인 시민들
 도청에 모인 시민들
ⓒ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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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5월 27일 도청 등 집단발포가 있던 날 허정환 당시 505 광주보안부대 수사관의 '양심선언'이다.

"서울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직접 광주 Kㅡ57 비행장에 도착, 상무대 전투병과 교육사령부에서 사태 진행과정에 대한 브리핑을 받은 후 헬기로 광주 일원을 살펴보고 상경한 후 전교사 기밀실에서 505보안부장 이재우 대령, CAC 사령관 윤흥정 중장, 공수특전사령관 정호용 소장, 11공수여단장 최웅 준장, 7공수여단장 신우식 준장,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소장, 전교사 참모장 장사복 준장 등 계엄관계관 회의가 개최되었는 바 (중략) 그리고 그날 수사회의 과정에서 상기 505 대공과장 서의남 중령은 '오늘 사령관님께서 부대에 들르시지는 않았지만 광주를 다녀가셨고 전교사회의 결과 역시 자위력 구사를 최종 결정했으니 폭도들에게 곧 사살명령이 내릴 것이다. (중략) 그 때 저는 '아! 이것이 정식 발포명령이구나 그리고 정말 역사적 순간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4ㆍ19의거 당시 발포문제로 시비가 있었던 점을 회상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자위권 발동과 관련된 것인데, 전두환은 그날 상오 계엄사령관실에서 결정한 군수뇌부의 '자위권' 건을 갖고 직접 광주에 내려와 광주 505보안부대와 공수부대 지휘관을 통해 21일 오후 6시 현지 전교사 지휘관회의에서 공식 결정토록 한 것이다.

노태우

5ㆍ17당시 수경사령관이었던 그는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국민이 원하는 정부의 힘이 부족하면 군이 도와드려야 합니다. 정치는 완전히 불신입니다. 이렇게 나가면 정당은 없습니다. 학원은 무정부주의입니다. 여러 기업들도 항의하고 있습니다. 영세 기업이 50~60만 달러 계약이 취소됐다고 원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부를 도와야 하는 시기에 왔습니다. 무기력하고 소신없는 것이 개탄스럽고 생존과 안정, 국민이 바라는 민주역량비축의 장애요소를 제거해야 합니다. 각종 부패, 소신없는 사항과 자기반성과 난국수습에 군이 이바지할 것을 건의합니다."

광주사태에 관한 한 그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수경사령관의 임무가 수도권의 방어이며, 역대 수경사령관이 정치에 민감했던 것과 전두환ㆍ정호용 등과 함께 육사 11기라는 관계, 무엇보다도 12ㆍ12의 핵심인물이라는 점과 5공화국 출범과 함께 그가 기능해 온 역할에서 광주와 그는 '불가분'이라고 보여지지만, 역시 광주사태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은 확인할 수 없다. 물론 그는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5ㆍ17을 주도한 사람 중의 한 명이었고, 광주사태 기간 동안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행동을 같이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당시 광주를 학살의 근거지로 삼아 시민을 적으로 둔갑, 무참히 살육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당시 광주를 학살의 근거지로 삼아 시민을 적으로 둔갑, 무참히 살육했다.
ⓒ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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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용

광주사태 당시 가장 바빴던 사람 중의 한 명은 정호용이었다. 그동안 발간된 자료들에 의하면, 5월 18일 현지보고를 받은 그는 제3공수특전여단 최세창 준장에게 광주로 출동할 준비를 갖추도록 지시한 다음, C-54 특별기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현지를 시찰, 보고를 받고 급거 상경, 전두환 등 군수뇌부들과 대책회의를 하면서 "계엄군을 증파해야겠다"고 건의했다.

이희성(계엄사령관) : "서울에도 산발적인 움직임이 있는데……"
정호용 : "서울은 더 확대되지 않습니다……제3여단장에게 출동준비를 지시했는데 11여단도 동시에 내려 보내겠습니다."
전두환 : "20사단도 함께 집입시키는 게 좋겠어"

5월 26일 하오 정호용은 광주비행장 사령관실에서 제20사단장 박준병과 3여단장 최세창, 7여단장 신우식, 11여단장 최웅을 불러놓고 이렇게 지시했다.

"TOT(목표상 행동개시)는 내일 새벽 정각 4시다. 절대로 정보가 누설되어서는 안돼."

광주사태 후 정호용은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승진을 거듭, 83년 정규 육사출신으로 최초의 육군참모총장이 된 그는 85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박준병

5ㆍ17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 그는 유일한 사단장급으로 참석했다. 육본 직할의 하나밖에 없는 서울 주둔 부대장으로 참석한 것이다.

소위 '경복궁팀' 중의 한 사람으로 12ㆍ12에 참여했던 그는 5월 20일 밤 10시 휘하 부대를 광주로 투입시키고, 자신은 21일 새벽에 사단사령부와 추가로 보내는 1개 연대를 이끌고 광주로 갔다.

광주사태를 둘러싼 주요 쟁점 중의 하나는 진압작전이다. 그는 88년 7월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입은 우리 사단을 포함해서 31사단의 일부 병력, CAC의 보병학교ㆍ포병학교 병력, 그리고 공수단 등도 함께 나누어 맡았습니다. 그중 우리가 가장 넓고 중요한 부분을 맡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작전명령은 지금 원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5월 25일 오전 CAC사령부에서 26일 D데이라는 명령이 내려왔어요. 그 명령을 근거로 이후 사단에 명령을 내렸습니다."

- 진압작전을 할 때 20사단은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당시 광주시내의 도청ㆍYMCAㆍ사직공원에는 상당히 조직화된 시민군이 있다는 전제하에 그 지역은 일단 공수단이 제압한 후 우리에게 인계해주기로 했어요. 나는 우리 사단의 책임구역을 바둑판처럼 구분, 주요지역, 우리가 장악해야 할 지역마다 번호를 붙이고, 각 단위부대별로 책임져야 할 지역을 분담시켰습니다. 모두 27일 새벽 4시 반까지 책임지역에 도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새벽 1시경에는 모두 주둔지를 떠났습니다."

그와 그의 휘하부대 20사단은 광주사태가 진압된 후에도 한 달 가까이 광주에 있다가 철수했다.
 
 1980년 5월24일 당시 금남로 상공에 헬기가 날아다니고 있다.<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24일 당시 금남로 상공에 헬기가 날아다니고 있다.<5·18기념재단 제공>
ⓒ 광주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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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성

80년 2월 18일 이희성은 1군, 2군, 3군 사령관과 특전사령관(정호용), 수경사령관(노태우) 앞으로 특별한 지시를 내렸다. 돌발적 소요사태에 대비하여 신속정연한 조치를 강구할 수 있도록 폭동진압 교육훈련, 일명 '충정훈련'을 실시하라는 것이었다. 당시는 국내 소요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의 특별지시에는 1) 매분기 1회씩 주기적인 교육을 실시하되 1ㆍ4분기는 2월 중에 완료할 것, 2) 폭동진압 장비사용에 관한 훈련 중에 화염방사기와 진압봉의 조작요령이 들어 있었다.

광주사태 초기에 공수부대원의 진압봉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광주사태의 원인 중의 하나가 과잉진압이었다는 전제 아래 진압봉이 그 일익을 담당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희성은 광주사태 초기인 5월 19일 「작상전 제0-215호」에 의해 공수부대 뿐만 아니라 2, 3군과 수도군단에 총 1만개의 진압봉을 수령토록 지시했다. 광주에서 18~19일에 진압봉에 의한 소요진압이 작전상 큰 효과를 보이자 이를 전국에 추가 보급토록 한 것이다.

광주역에서 군에 의한 최초의 집단 발포가 개시된 다음날인 5월 21일, 이희성은 계엄사령관실에서 관계지휘관 및 참모들을 참석시키고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은 △ 계엄군을 광주시내로부터 외곽으로 전환 재배치 △ 자위권 발동 △ (공수) 1개 연대를 추가 투입 △ 폭도소탕작전은 5ㆍ23 이후에 의명(依命) 실시 등이었다.

이로써 광주 사태와 관련한 최초의 자위권(발포권)이 군수뇌부에 의해 결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폭도 소탕작전(상무충정작전)을 5월 23일 이후 명령에 따라 실시할 것을 결정했다.
 
 1980년 5월 19일 오후 3시께, 계엄군들이 광주 금난로와 충장로로 출동, 전 지역을 들쑤셔대는 모습.
 1980년 5월 19일 오후 3시께, 계엄군들이 광주 금난로와 충장로로 출동, 전 지역을 들쑤셔대는 모습.
ⓒ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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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위컴

광주사태 당시 미8군사령관 존 위컴. '쿠데타 조종의 명수'라고 알려진 위컴은 전임 사령관 존 베시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교체됐다. 1961년 주한미군 1기갑사단 제5연대 작전장교로 근무하면서 한국장교와의 인맥관계를 긴밀히 유지해 온 것으로 알려진 위컴은 월남전쟁에서 전두환ㆍ노태우 등과도 교류가 있었다.

광주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인 80년 5월 14일 위컴은 휴가 중으로 워싱턴에 있었다. 그러나 당시 매스컴에서는 그의 귀국이 한반도 주변 정세 및 한국내 사태 등에 대해 워싱턴 당국과 협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도했다. 위컴은 27일까지의 워싱턴 일정을 취소, 광주사태가 발생하던 18일 오후 서울로 돌아왔다.

미 국방성 로스 대변인은 그 해 5월 22일 처음으로 "존 위컴 주한유엔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이 광주사태의 진압을 위해 일부 부대에 대한 작전권을 한국측에 이양했다"고 밝혔다. 또한 <워싱턴포스트>지는 "한국의 장성들이 광주사태진압을 위해 일반 예비병력 중 4개 연대의 병력을 요청, 미국측의 허락을 받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제임스 릴리

제임스 릴리 전 주한대사는 88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협상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글라이스틴씨는 20사단이 민간인들을 다루는 데에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20사단을 광주로 보내는 데에 찬성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그는 20사단은 특전부대들보다는 덜 잔인하게 문제를 다룰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라고 털어 놓았다.

20사단의 광주투입에 관해서는 유병현 당시 합참의장도 "거의 매일 위컴 대장과 만나 광주사태에 관하여 논의하였다"고 전제, "20사단의 이동에 대해서는 내가 위컴사령관에게 통보하였습니다. 20사단은 연합사 작전통제권 바깥에 있는 부대이므로 통보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대부대의 이동이므로 알린 것입니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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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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