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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어릴 적에는 더더욱 '예술하겠다는 애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학교에서 다독상을 타 오면 어깨를 두드려줬지만 나중에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면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예술보다 기술을 동경하고, 미학보다는 새마을 운동이 가깝던 시대였다. 문예창작학과를 가고 싶다고 하면 어른들은 '배 곪고 산다'고 말렸다. 그런 집의 딸로 자랐지만 결국 돌고 돌아 글을 끄적이며 산다. 예술가까진 못 되어도 그 언저리에서 살고자 한다.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고, 책을 품는 것이 행복하다. 

나처럼 글이나 그림, 음악을 동경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선물은 뭘까. 최근 그 해답을 얻었다. 얼마 전 한창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미대를 졸업하고 화장품 회사에서 일하는 사촌동생에게서 갑작스럽게 카톡이 왔다. 

"언니야! 언니 나온 사진 하나만 보내줘! 여행지 사진도 좋고 언니한테 의미 있으면 더 좋고!"
"너 무슨 프로젝트 하는 거야?"
"프로젝트는 아니야. 줄 수 있어?"
"응. 지금 줄게."

 
 몇 년 째 카톡 프로필인 내 뒷모습
 몇 년 째 카톡 프로필인 내 뒷모습
ⓒ 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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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고민하다가 몇 년 전 여행지에서 찍었던 뒷모습 사진을 보냈다. 왜인지 모르게 마음에 들어 벌써 수 년째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해두는 사진이었다. '얘가 뜬금없이 사촌언니 사진이 한 장 갖고 싶기라도 한 걸까' 잠시 생각했지만 바깥 일정을 소화하느라 그 생각은 이내 잊혔다. 그리고 그날 밤 다시 카톡이 왔다. 

"언니. 내가 보내준 링크로 한 번 가봐."

사촌동생은 한 인스타그램 계정 주소를 보내왔다. 무심결에 클릭했더니 내가 있었다. 흑백 버전의, 만년필로 그려낸 내 모습이. 
 
 드로잉. 김은경. 2019. 재료 만년필과 물.
 드로잉. 김은경. 2019. 재료 만년필과 물.
ⓒ 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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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동생은 주변 사람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모아서 만년필로 드로잉 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직접 그린 그림을 선물 받는 것이 대체 얼마만인지. 그림쟁이를 사촌동생으로 두고 사니 이런 복을 받는다. 가장 좋아하는 내 사진이 좋아하는 그림이 되어 나타난다. 원본도 달라고 했더니 드로잉북에 있으니 찢어서 주겠단다. 

"그럼 드로잉이 여러 장이야?"
"응. 나 요즘 퇴근하며 집에 박혀서 저런 거 하고 살아. 재료는 만년필과 물. 그리고 맥주."


맥주는 재료가 아니라 연료겠지... 결국 나는 사촌동생을 우리 집에 오게 한 뒤에 집밥을 잔뜩 먹이고 드로잉 원본을 무사히 받아냈다. 그림 선물을 받으며 함께 구경한 드로잉북에는 그간 동생이 퇴근 후 집에 콕 박혀서 그린 그림이 가득했다. 다 자기 주변의 좋아하는 사람들인 듯했다.

종잡아 보아도 스무 장 가까운 그림들. 이 애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밥 먹고 야근하고 퇴근하고 데이트도 하고 가끔 아프기도 하면서 묵묵히 계속 그려왔다. 쓰지 않고는, 그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미대를 나온다고 다 그림을 그리고 살지는 않는다. 글을 끄적인다고 다 글밥 벌어서 먹고 살지도 않는다. 일상에서 '먹고사니즘'은 다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무겁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밥벌이의 중량감을 깨우치게 된다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식솔을, 고양이를, 나 자신을 부양해야 하니까. 내 새끼 입에 들어가는 더운밥은 고흐의 그림보다 존엄하다는 것을 아니까. 다독상을 받았던 아이도, 미술대회에서 숱하게 상을 받았던 아이도 그래서 직장인이 된다.

그렇지만 예술가가 아니어도 예술은 할 수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못 견디게 좋아한다. 낮에는 생업 안에서 살고, 밤에는 슬그머니 예술의 세계로 건너가는 사람들.

예를 들면 시 수업을 듣기 위해 퇴근하고 정신없이 달려오는 직장인, 용기 내어 글쓰기 모임을 등록한 주부, 다크서클이 퀭하니 내려온 얼굴로 마감 치고 합주실로 향하는 자영업자들, 도슨트가 되고 싶어 교육을 받는 학원 강사. 이런 사람들은 정말이지 무조건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내 방의 벽에는 좋았던 여행지와 좋았던 시절, 그리고 사촌동생의 그림이 붙어있다
 내 방의 벽에는 좋았던 여행지와 좋았던 시절, 그리고 사촌동생의 그림이 붙어있다
ⓒ 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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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게는 이 한 장의 그림이 최고의 선물이 되었다. 예술가가 아닌 사람의 예술 작품이기 때문에. 직장인이 퇴근 후 혼맥(혼자 맥주 마시기) 외에 뭔가 한다는 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아니까. 

사촌동생이 이런 드로잉은 무심하게 테이프로 붙여두는 것이 최고라고 해서 그림은 방 벽에 허술하게 붙어 있지만 볼수록 흐뭇하다. 그림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야근은 없어져야 하고 칼퇴는 사수해야 한다고.

내 사촌동생이 더 많이 '예술'할 수 있도록 세상 야근 따위 싹 사라졌으면 좋겠다. 칼퇴의 신이 그 애를 비호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림을 더 받아내고 싶어서 해보는 수작은 아니다. 은경아 언니는 괜찮다. 진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brunch.co.kr/@relaxed)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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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와 밤이 있는 한 낭만은 영원하다고 믿는 전직 라디오 작가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