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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가 논란입니다. 몇 회에 걸쳐 이 책의 문제점을 짚어봅니다.[편집자말]
 대하소설 <아리랑>의 100쇄 돌파를 기념해 29일 낮 서울 소공동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장 입구에 출판사에서 마련한 100쇄 기념본과 소설가 조정래씨의 사진이 전시돼있다. 2007.1.29
 2007년 1월 29일 대하소설 <아리랑>의 100쇄 돌파를 기념해 서울 소공동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장 입구에 출판사에서 마련한 100쇄 기념본과 소설가 조정래씨의 사진이 전시돼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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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이 <반일 종족주의> 첫 장에서 비판한 대상은 조정래 소설 <아리랑>이다. 구한말부터 8·15 광복까지의 항일투쟁을 다룬 이 소설이 <반일 종족주의>의 첫 번째 표적이다. 이 책 제1부 제1장의 제목은 '황당무계 <아리랑>'이다.

'황당무계 <아리랑>' 편에서 이영훈은 "저는 2007년 <시대정신>이라는 계간지에 기고한 논문에서 소설가 조정래를 '광기 어린 증오의 역사소설가'라고 정의하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라며 "제가 작가의 정신세계를 그렇게 규정한 것은 작가가 소설 곳곳에서 일제가 한국인을 거의 광적으로 학살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터무니없는 조작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조정래가 '광기 어린 증오의 소설가'라는 증거로 제시된 대목은 <아리랑> 제4권 제1장 '대지진' 편의 끝부분이다. 토지조사사업에 맞선 한민족의 대항과 이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그 대상이다.

이영훈이 문제 삼은 한 장면은 아래와 같다. 아랫글 속의 '지주총대'는 '지주 대표'다. 일제와 같은 편인 지주총대를 폭행하고 토지조사사업에 대항한 차갑수를 헌병주재소장이 학살하는 장면이다.
 
"에에 또, 지금부터 중대 사실을 공포하는 바이니 다들 똑똑히 들어라. 저기 묶여 있는 차갑수는 어제 지주총대에게 폭행을 가해 치명상을 입혔다. 그 만행은 바로 총독부가 추진하고 있는 중대 사업인 토지조사사업을 악의적으로 방해하고 교란하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죄인 차갑수는 경찰령에 의하여 총살형에 처한다."

니뽄도를 빼들고 선 주재소장의 칼칼한 외침이었다. (중략) "사겨억 준비!" 주재소장이 니뽄도를 치켜들며 외쳤다. 네 명의 순사가 일제히 총을 겨누었다. "발사아." 총소리가 진동했다. 차서방의 몸이 불쑥 솟기는가 싶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그리고 왼쪽 가슴에서 시뻘건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도저히 발생할 수 없는 상상의 장면?

이영훈은 이 같은 장면이 실제로 있었을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현실적으로 도저히 발생할 수 없는 상상의 장면이라는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위와 같은 즉결 총살형은 토지조사사업 당시에 있지 않았습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서 그러한 사건이 보도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 실제로 있었다면 보도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총살을 자행한 총독부도 그것을 막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소설가는 당연하게 있었던 사실인양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경찰령'을 언급하면서 즉결 총살의 법적 근거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법령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경찰령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영훈의 언급은 사실과 다르다. 일제 강점 2년 전인 1908년,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한국통감이 경찰범처벌령을 공포했다. 경찰령으로 약칭될 수 있는 법령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따라 한국에 대한 통치권은 사실상 한국통감에게 넘어갔다. 그래서 한국통감이 경찰범처벌령을 공포했던 것이다.

경찰이 즉결처분할 수 있는 범죄들을 규정한 경찰범처벌령은 191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찰범처벌규칙'으로 개정됐다. 따라서 토지조사사업이 시행된 1910~1918년 기간에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경찰범처벌령이나 그 약칭으로 경찰령이 존재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소설 <아리랑>에서처럼 경찰령이 거론되는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영훈은 있지도 않은 경찰령을 빙자해 일제의 민간인 학살을 사실처럼 묘사하는 <아리랑>이 일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떨어트렸다고 비판한다. 근거도 없이 일제강점기를 야만의 시대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은 이렇다.

"조정래는 그 시대를 법도 없는 야만의 시대로 감각하고 있습니다. 백인 노예 사냥꾼이 아프리카 종족사회에 들어가 마구잡이로 노예사냥을 하는 그러한 야만의 장면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아리랑>에 등장하는 일본인들은 모두가 노예 사냥꾼과 같은 악인들입니다. 그들은 수도 없이 조선 사람을 때리고 빼앗고 겁탈하고 죽입니다."

한국인의 반일감정이 올바른 것일 리 없다는 이영훈
 '반일 종족주의' 책표지.
 "반일 종족주의" 책표지
ⓒ 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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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은 <아리랑>이 한국 사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오도했다면서 이런 것이 한국 민족주의의 특질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말한다.

"<아리랑>에서 저는 한 사회를 선진사회로 이끄는 가치와 이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미덕과 신앙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곳은 강포한 종족이 약소 종족을 무한 겁탈하고 학살하는 야만의 세계입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러한 종족주의의 특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영훈이 <아리랑>을 <반일 종족주의> 본문 첫머리에 소환한 것은 한국 민족주의의 '수준'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이 있지도 않은 학살 장면을 보여주고 반일감정을 조장하는 것처럼, 반일 민족주의가 그처럼 근거 없는 허상 위에 구축돼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는 "소설가 조정래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식민지 시대에 관한 한국의 역사학 자체가 그러한 종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한국인들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역사학 자체가 허위와 망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이 올바른 것일 리 없다는 게 그의 인식이다.

<반일 종족주의> 첫 장에 나오는 이 같은 설명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릴 수도 있다. 그가 인용한 <아리랑>의 총살 장면은 '실제로 저런 일이 있었을까?'라는 궁금증을 갖게 하고도 남을 만하다. 그 장면을 소개한 뒤 이영훈은 "국가권력이 사람을 죽일 때 소정의 절차에 따른 재판을 거쳐야 함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설명한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아무리 일본제국주의라도 설마 그런 짓까지 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이런 의문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페이지를 계속 넘기다 보면, 한국 사회의 반일감정을 질타하는 이영훈의 논리를 자연스레 받아들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잘못 수집한 사실관계 토대로 너무 엉뚱한 결론

하지만, 틀린 쪽은 조정래가 아니라 이영훈이다. 이영훈이 틀렸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의 주장과 달리, 토지조사사업 시기에 실제로 그 같은 학살이 자행됐기 때문이다. 일례로, 임호민 가톨릭관동대 교수의 논문 '삼척군 원덕면 일대 임야측량 사건과 산림자원의 약탈'에도 그런 실상이 소개돼 있다.

이 논문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삼척군 역사서인 <삼척군지>를 토대로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소개하고 있다. 1913년 4월 삼척군 주민들이 토지조사에 불만을 품고 화장(花藏)이라는 일본인 측량기수를 살해하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해 진압 작전을 벌인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어조사 몇 개를 문법에 맞게 교정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란 국치를 당한 한민족의 일제에 대한 울분과 적개심이 폭발될 찰나에, 삼척군 임원리에서 국유림과 사유림을 구분하기 위해 경계 측량을 하는데 울창한 사유림을 부당하게 국유림으로 편입시키는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임원리 김치경 지휘로 원덕면민이 궐기하여 재측량을 요구하며 수일간 시위를 벌였다.

그리하여 당시 면장 김동호가 일본인 기수 화장(花藏)을 대동하고 민중을 설득하기 위하여 임원에 왔는데, 이때 임원 뒷산에서 사진 촬영자를 발견하고 군중이 일시에 격분하여 당시 천여 명이 기수를 죽이라고 외치며 몰려들어 화장을 죽였다. 일인 헌병이 출동하여 발포하니 군중은 해산되고 70여 명이 끌려가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 역사문화학회가 2016년 발행한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9권 제1호.
 
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명분으로 사유림을 국유림으로 편입시키자 한국인들이 집단 대항하는 과정에서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는 내용이다. 이 사건을 다룬 또 다른 논문인 전영길·이성익의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일제의 토지수탈 사례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의 발포로 한국인 3명이 죽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 헌병 20여 명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군중들이 재빠르게 해산했지만, 3명이 죽고 많은 부상자를 내는 참사를 겪음. 일제는 향후 군중시위의 뿌리를 뽑기 위해 본보기로 주동자 김치경을 비롯하여 조정원·이락서·김문식·김평서 등 70여 명을 끌고가 옥고를 치르게 했는데, 함흥형무소에 복역 중 김평서는 옥사하고 남은 사람들은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5년간 복역하고 풀려났으나, 모진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모두 사망했으며, 이 사건이 있은 뒤에 원덕면의 유림들이 한 목소리로 간악한 일본 헌병들의 만행을 맹렬히 규탄하고 비난함에 따라, 이에 당황한 일본 헌병대가 대규모 민중봉기로 이어질 것을 염려하여 1913년 5월 유림들의 본거지인 원덕면 산양리의 산양서원을 방화하여 건물은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묘정비만 남게 되었음." - 한국지적정보학회가 2017년 발행한 <한국지적정보학회지> 제19권 제3호.
 
이처럼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일제는 실제로 학살을 자행했다. 헌병대를 출동시켜 무차별 발포도 서슴지 않았다. <아리랑> 속의 학살 장면도 실제 역사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이영훈 이사장은 그 장면을 허구로 단정하고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그런 허구에 기초해 있다고 맹렬히 비판한다. 잘못 수집한 사실관계를 토대로 너무 엉뚱한 결론을 도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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