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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탈브라'한 여름이었다. 가슴둘레 전체를 밴드로 조이는 브라 러닝셔츠부터 노와이어 브래지어와 브라렛까지도 쓰레기봉투에 던져버렸다.

올여름 내 가슴은 어떤 압박도 받지 않은 채 시원한 바람을 솔솔 만끽했다. 두꺼운 옷으로, 조끼로, 무늬가 잔뜩 그려진 티셔츠로도 가리지 않았다. 얇고 시원한 반팔 티셔츠 하나만 맨살에 입었다. 어떤 거리낌 없이 팔을 올리고 어깨를 쭉쭉 폈다. 40년 가까이 살면서 비로소 처음 느낀 가슴의 해방.

그러니까 남자들은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다는 건가. 어렸을 적부터 브래지어와 러닝셔츠는 필수라고 배워왔다. 그것들을 입지 않으면 긴장감에 배가 살살 아파 오는 증상까지 나타날 지경이었다.

여성의 숙명처럼 여기며 억지로 입어온 세월이 억울하다. 가슴을 압박하는 브래지어가 가렵고 답답해 긁었다가 풀었다가 하고, 내 몸에 맞는 브라를 찾기 위해 검색하고, 새로운 걸 샀다가 맞지 않아 버리기를 반복해온 시간에 다른 일을 했더라면. 아니다. 지금이라도 브래지어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행이다. 

노브라 티셔츠를 만들다
 
 남성복과 똑같은 원단이면서도 허술하게 봉제하는 여성복의 고질적인 문제도 개선하고 싶었다.
 남성복과 똑같은 원단이면서도 허술하게 봉제하는 여성복의 고질적인 문제도 개선하고 싶었다.
ⓒ 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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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방에 가까운 자유로움을 느낀 건 '노브라 티셔츠' 덕이다. 브래지어 없이도 유두를 가릴 수 있도록, 가슴 곡률에 맞춘 얇은 패드가 내장된 옷이다.

'협동조합 롤링다이스'는 노브라 티셔츠를 제작한 주체이자 내가 조합원으로 참여하는 조직이다. 나는 이곳에서 조합원들과 지난 1년간 노브라 티셔츠를 개발했다.

롤링다이스는 전자책을 제작하고 강연을 기획하는 공동체였다. 구성원들은 본업은 따로 유지한 채 프로젝트가 만들어지면 의기투합하며 일을 해나간다. 그동안 우리가 해온 일 가운데 '의류 제조업'과 교집합을 이루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원단 시장과 봉제 공장을 내 집처럼 드나들고, 수백 벌의 옷을 포장하고 배송하며 CS(소비자 민원)를 처리한다. 어쩌다가 이리 되었을까.

아스팔트의 열기에 몸이 녹아버릴 것만 같던 지난해 여름이었다. 롤링다이스 월례회의에 모인 여섯 명의 조합원들은 회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쳐 있었다. 하필 그날이 사상 최악의 폭염이었다.

더위에 녹초가 된 우리는 푸념을 털어놓았다.

"브라 차는 게 제일 싫어요."
"나는 반창고 붙이고 다녀요."
"여름 옷은 얇아서 노브라도 못해."


나는 이때다 싶어 의기양양하게 말을 꺼냈다.

"저는 노브라로 다니는 방법을 찾았어요."

당시 나는 브라를 안 입고 다닐 방법을 강구한 끝에, 브래지어 대신 브라탑의 앞부분을 오려 티셔츠에 바느질해 입고 다녔다. 조악하긴 했으나 꼭지를 가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도가 높았다(관련기사 : 노브라 유목민이 찾은 천국... 와 이건 진짜다).

조합원들은 나만의 '신박한' 해법을 애써 상상하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의아해하는 듯했지만 이내 반색하는 분위기였다.

"이거 다음 프로젝트로 진행하면 어때요?"

누군가 제안했다. 다음 회의 때는 각자의 노브라티를 직접 만들어보며 가능성을 타진했다. 조합원들은 만장일치로 프로젝트 시작에 동의했다. '노브라옷'의 필요성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지점이었다.

한 연예인의 노브라 소식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고, 사진을 찾아보고, 얼마나 티가 나는지 눈에 불을 켜고 들여다보는 사회다. 간혹 여성이 노브라로 다니건 말건 관심 없다는 댓글이 달리는데, 정말 성적인 시선에서 자유로운 문제라면 '노브라 티셔츠'라는 검색어는 왜 성인인증까지 받아야 할까.

이런 세상에서 내 몸에 자유를 주면서도 타인의 무례한 시선도 받지 않는 옷. 브래지어를 벗더라도 팔짱을 끼거나 어깨를 움츠리며 나의 행동을 위축하지 않아도 되는 옷. 편안하면서도 안전한 옷은 우리 모두에게 간절했다.

'노브라티 프로젝트'의 목표는 확실했다. 상품 가능성과 브랜드 콘셉트를 갖춘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자. 가슴을 조이는 밴드를 없애자. 앞부분의 유두가 티 나지 않을 정도로 확실히 가리되 답답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시원하고 얇아야 한다. 몸매가 드러날 정도로 딱 붙지 않으면서도 벙벙한 홈웨어에서 탈피하자. 외출복으로도 손색이 없도록.

처음 만난 제조업의 세계
 
 브라캡은 하나같이 ‘뽕’을 강조했고 여성의 가슴을 두 세배 커보이게 하는 의무에 충실히 복무했다.
 브라캡은 하나같이 ‘뽕’을 강조했고 여성의 가슴을 두 세배 커보이게 하는 의무에 충실히 복무했다.
ⓒ 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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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업계 종사자가 아닌 우리들은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컴컴한 미로를 더듬더듬 집어갔다. 도안화를 그리는 단기 패션 디자인 수업을 듣기도 했고, 무턱대고 대형 쇼핑몰에 가서 수십 벌의 면 티셔츠를 뒤지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20년 가까이 의류 디자이너로 일한 친척분의 도움을 극적으로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지지부진하고 머뭇거리던 우리의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원단을 선정하고 패턴과 티셔츠 샘플을 의뢰했다. 전문가의 개입은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 뻔한 우리의 프로젝트를 단숨에 '고퀄리티 대량 생산'의 단계로 진입시켰다.

막상 샘플을 만들어보니 개선점이 계속 보였다. 원단이 너무 흐물거린다거나 저렴한 운동복처럼 번뜩거렸고, 가슴 부위에 넣은 패드 위치가 높거나 낮아 유두를 제대로 가리지 못했다. 목이 너무 파여 고개를 숙이면 가슴골이 보인다거나, 또는 너무 빠듯해 답답해 보였다. 패턴만 열 번 이상 수정했다. 샘플로 만든 옷은 수십 벌이 넘었다.

가슴 라인이 자연스러워 보이면서도 두껍지 않고 가벼운 브라캡을 고르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같았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찾아낸 약 40개의 브라캡을 늘어놓고 사이즈와 두께와 곡률을 비교했다. 세탁하고 건조되는 속도와 복구력을 실험했다. 그리고 좌절했다. 브라캡은 하나같이 '뽕'을 강조하며 여성의 가슴을 두 세배 커 보이게 하는 의무에 충실히 복무했다.

우리가 원하는 브라캡의 목적은 유두를 무례한 시선이나 옷깃의 스침에 의한 마찰에서 보호하는 것이지 가슴을 섹시하게 보이도록 하거나 보정하는 데 있지 않았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한 몰드 공장에 샘플을 의뢰했다. 노력이 가상했을까, 운이 좋았을까. 드디어 우리가 찾던 두께와 크기의 브라캡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의 감격이란.

봉제공장에서는 원단이 까다롭다고 손사래 쳤다. 얇으면서도 주름이 가지 않고 땀 흡수와 배출이 용이하며 보풀이 생기지 않는 원단을 골랐다. 그러나 재봉에 두 배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공임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몇 번 입고 버리는 패스트패션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남성복과 똑같은 원단이면서도 허술하게 봉제하는 여성복의 고질적인 문제 또한 개선하고 싶었다. 꼼꼼한 마감과 탄탄한 원단으로 지어서 그만큼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원했다.

"30만 원짜리 옷이랑 같은 봉제야." 공장 사장님은 자부했다. 원가는 시중의 일반 면 티셔츠 판매가를 훌쩍 넘어버렸다. 마진율은 그만큼 줄었지만 비로소 품질만큼은 떳떳해질 수 있었다.

누적 펀딩액 4600%의 의미
 
 하루만에 펀딩신청율 300%를 달성했다. 얼떨떨하게도 사람들은 우리의 실험적인 제품에 열광해주었다.
 하루만에 펀딩신청율 300%를 달성했다. 얼떨떨하게도 사람들은 우리의 실험적인 제품에 열광해주었다.
ⓒ 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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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의류업에 나서려고 시작한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우리와 같은 욕구를 가진 사람들에게, 딱 그 수요만큼만 주문을 받아 만들면 될 거라고 생각해서 결정한 게 크라우드펀딩 방식의 제작 판매였다. 펀딩을 통하면 후원된 수량만큼 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50벌이나 주문이 될지는 확신이 없었다. 소심하게 최소 달성액을 100만 원으로 잡았다.

그. 런. 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하루 만에 펀딩신청률 300%를 달성했다. 얼떨떨하게도 사람들은 우리의 실험적인 제품에 열광해주었다. 1차 펀딩에서 3100%, 2차에서 1600%의 후원율을 기록했고, 5월~7월간 배송된 노브라티는 천 벌이 넘었다. 펀딩 플랫폼에 모여든 소비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후원에 동참해주었고, 펀딩 마감 후에도 구매 문의 연락과 메일이 빗발쳤다.

"이것만 입게 되네요. 중독입니다. 못 벗어요. 또 주문합니다."
"남자들은 평생 이렇게 살아왔을 텐데. 이 편한 걸 왜 몰랐을까요."
"편하려고 입었는데 핏도 너무나 좋아요." 


호평만 있진 않았다. 가슴을 잡아주지 않아서 불안하다고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체형과 가슴높이까지 고려한 사이즈 선택 옵션을 6개나 두었지만, 모든 여성의 가슴 높이에 꼭 맞출 순 없었다. 브라캡이 위로 가거나 아래로 처진다는 후기도 있었다. 가슴이 큰 사람들에겐 되레 불편함을 주기도 했다.

지난 7월 25일 <중앙일보> 기사에 언급된 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여성의 78.8%가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규범 때문에 브래지어를 착용한다고 답했다. 안 입으면 사람들이 쳐다보기 때문에 입는다는 뜻이었다. 가슴이 흔들린다거나, 사이즈가 커서 지지해줘야 한다는 답변은 약 20%였다. 우리가 만든 노브라 티셔츠가 모든 여성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78%의 여성들에게는 자유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노브라로 다니면 그만이지 왜 굳이 노브라 티셔츠를 사느냐는 지적도 있었다. 그 지점엔 나도 동의한다. 노브라 티셔츠까지 사 입어야 하는 사회가 서글프다. 그러나 브라에 익숙해진 몸은 타인이 보든 안 보든 '꼭지'를 감히 노출하고 다닐 엄두를 내기 어렵다. 행여 누가 나를 바라보지 않을까 '자기 대상화'하고 검열한다. 노브라에도 적응과 용기가 필요하다. 

노브라 티셔츠는 과도기적인 제품이다. '탈브라'를 위한 모험과 용기를 감행하지 않고도 편안함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무더위 속에서 가슴을 옥죄는 불쾌감을 감내하는 여성들. 브라를 벗자니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 하는 일에 집중이 되지 않는 여성들. 우리는 그들이 보다 생산적이며 의미 있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하도록 돕고 싶다.

그러나 노브라 티셔츠의 가장 큰 수혜자는 무엇보다도 롤링다이스 조합원들이었다. 우리가 좀더 편해지고 싶다는 절절한 바람 때문에 만들었다.

아직 완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꾸준히 개발해 나가려 한다. 여성들의 브래지어 착용이 더이상 규범도, 억압도, 관심도 아닐 때까지.

덧붙이는 글 | 협동조합 롤링다이스의 '일상기술연구소 노브라티'는 네이버 스토어에서 판매 중입니다.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와 블로그 등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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