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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squez)가 <시녀들>에 쳐놓은 거미줄 같은 다양한 회화적 장치들은 관람자를 사색의 미로 속으로 끌어 들인다. 그런데 그 미로는 복잡한 철학적 사색과 같은 길이며, 그림을 보는 일은 그 철학적 사색의 길로 진입하는 고속도로를 탄 것과 같다. 볼수록 새롭고 다양한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이 그림은 '화가 중의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받는다.

철학과 회화의 연관성은 '사색'에서 찾을 수 있다. 철학은 인간과 세계의 근원, 그리고 그 존재 이유에 대한 추상적 사색을 통해 인간 삶의 가치를 확대하고 심화시킬 수 있도록 만든다. 미술은 인간과 사물, 또는 인간의 삶과 세계를 재현한 작품으로 관람자들을 사색하게 만든다.

미술은 단순히 보고 즐기는 수준에서 관조하며 성찰하는 수준으로까지, 인간의 사고를 심화시켜 종합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 푸코, 데리다와 같은 철학자들이 회화와 관련한 사색의 결과를 글로 만들었을 것이다.

<시녀들> 보기
 
시녀들 1656년경  프라도 미술관
▲ 시녀들 1656년경  프라도 미술관
ⓒ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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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는 <시녀들>에서 스페인 궁정 화실을 재현하고 있지만, 화가 자신이 그림 속에 등장한 점, 궁정 화가의 가장 주된 모델인 왕과 왕비가 중심적으로 재현되어 있지 않고 거울 속의 비친 희미한 존재라는 점, 화가와 다른 등장인물들이 응시하는 방향과 위치에 의해 다양한 의미가 중첩될 수 있다는 점, 관람자에게 그림 왼쪽의 캔버스 뒷면만을 볼 수 있게 하여 캔버스 전면에 화가가 재현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점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궁무진한 해석의 복선을 깔아 놓았다.

나아가 그림 속에 재현되어 볼 수 있는 것과 그림에 재현되어 있지만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경계에서 유동적인 부분, 그리고 그림에 재현되어 있지 않지만 그림 바깥에 있다고 추정할 만한 비가시적인 부분이 상호 작용하면서 회화적 재현에 의한 가시적 범위와 물질성을 뛰어 넘는다.

<시녀들>은 1656년, 왕실 화가의 화실에서 있었던 장면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그림이다. 그림 왼쪽에서 들어오는 빛이 비추는 방향의 중심에는 어린 공주가 서 있고 그 공주를 시중들고 있는 두 명의 시녀가 공주를 향해 서 있다. 그 옆에 난쟁이 두 명이 서 있고, 뒤 쪽에 왕실 관리인과 수녀가 나란히 서 있다. 왕과 왕비는 그림 전면에 재현되어 있지 않지만 화실 뒤쪽 벽의 거울 속에 흐릿하지만 확실히 알아 볼 수 있도록 반사되고 있다.

<시녀들>에 등장한 인물들은 9명인데 모두 실존 인물이다. 역사적으로 실재한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전해 온다. 화가는 이 그림을 그린 궁정화가 벨라스케스 자신이고 공주는 마르가리타, 시녀는 도냐 마리아 아구스티나 사르미엔테, 도냐 데 이사벨 데 벨라스코, 강아지를 발로 건드리고 있는 니콜라소 페르투사토, 그림 뒤쪽 벽의 문간에 서 있는 사람은 니에토이다. 그리고 뒤 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 비친 인물은 왕 필리페 4세와 왕비 마리아나이다.

<시녀들> 보고 생각하기
  
감상자는 이 그림의 중심에 배치된 인물인 공주를 먼저 볼 것이다. 왕과 왕비는 그림 뒤쪽의 벽에 걸린 거울에서 희미하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거울이 정면을 반영한 것이라면, 공주가 바라본 정면 방향에 왕과 왕비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왕과 왕비는 공주를 마주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공주를 바라보는 왕과 왕비의 모습은 실제로는 그림 바깥에 존재하며, 화가는 그림 바깥에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왕과 왕비를 거울에 반사된 모습으로 재현했다.

그림 전체로 보면, 왕과 왕비를 비추는 거울은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그림 전면에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재현하지는 않았지만 왕과 왕비는 중요한 존재로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영역에 중첩적으로 존재한다. 어떻게 보면 가시성과 비가시성을 초월한 존재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들은 왕정 시대에 어디에나 편재하는 절대 왕권의 담지자로 볼 수도 있고, 반면 기울어져 허약해지고 미미해진 당시의 스페인 왕권의 실재적 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쨌건 왕 또한 이 그림을 집무실에 걸어두었다는 이야기를 보면, 벨라스케스의 재현 방식에 거부감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벨라스케스는 화가로서 재현의 주체이며 동시에 자신이 그린 그림 속에 등장하여 재현의 대상이 된다. 그림의 대상을 보고 인지하고, 해석하여 주관적으로 재현해내는 화가 자신이 보임의 대상, 재현의 대상으로 그림에 등장한 것이다.

응시의 주체에서 응시의 대상으로 정체성의 전환을 이루며, 아울러 재현의 대상이면서도 캔버스를 앞에 두고 붓을 손에 든 채 관람자를 응시하며, 응시의 주체인 관람자를 역으로 응시와 재현의 대상으로 전환시킬 태세를 갖추고 있다.

관람자 역시 이 그림을 보는 응시의 주체이지만 화가가 캔버스에 재현하려는 재현의 대상으로 전환될 수 있다. 비가시적 대상인 관람자 일반을 가시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림 왼쪽에 서 있는 캔버스의 후면 또한 비가시성의 영역으로 눈길을 끈다. 화가가 그 전면에 무엇을 그린 것인지 당연히 관람자는 볼 수 없는데, 화가가 응시하는 방향을 추측하여 그가 그리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벨라스케스가 응시하는 방향을 보면, 정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왼편의 캔버스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캔버스와 정면을 모두 시야 속에 넣고 비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녀들> 의 구도 속에서 벨라스케스의 위치는 특별한데, 이에 대해 "그는 중심에서 살짝 비껴난 위치에 있지만 균형을" 잃지 않는 교묘한 자리에 있으며, "이것은 그가 '그림 속'에 있으면서 '현실' '그림표면' '그림 속' 모두를 온전하게 볼 수 있는 위치에"(정은경, <벨라스케스 프로이트를 만나다>, 219) 서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벨라스케스가 캔버스의 뒷면을 재현하고 있는 점은 뒷면과 앞면의 동시적 공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일체적 관련성, 나아가 보고 이해한 것만을 진리라고 인정하는 통념에 대한 도전이자 비판이라고 확대 해석할 수 있다.

생각 거듭하기

세계 속에서 실재하지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 또 인지할 수 있는 것과 인지 불가능한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화가가 캔버스에서 재현하여 인지할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것과 캔버스 안에서 볼 수 없지만 상상과 사색을 통해 상정할 수 있거나 추정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환영'이고 어느 것이 '실재'인가?

눈에 보이지만 보이는 것이 모두는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보다 더 지배적이고 결정적인 요인과 요소가 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가시성과 비가시성 영역의 공존 및 상호 간섭에 관련한 특별한 회화적 재현을 통해, 관람자가 자아와 타자에 대한 철학적 관조와 사색을 확대할 가능성을 열어 준다.

벨라스케스가 쳐 놓은 거미줄 같은 사색의 미로는 아직도 무궁무진해 보인다. 그것은 그림 후면에 개방된 문과 그림 속의 인물들이 모두 바라보고 있는 전면의 공간을 통해 무한 확장된다. 그리하여 이 그림을 보고, 생각하고, 다시 보고, 다시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없게 만든다.

덧붙이는 글 | 서양 회화사의 걸작인 <시녀들>에 대한 주관적 사색과 탐사의 결과입니다. 일반적인 설명들에서 느껴지는 백과사전적 설명과 나열에 들어 있는 상투성과 진부함을 벗어나고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문적이진 않지만, 나름대로의 생각과 판단을 모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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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학위 받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문학, 미술, 영화, 미학, 철학, 사회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을 용해, 융합하여 사색한 결과를 글로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서양회화 분야에 집중하여 공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