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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초입에 들어서자 지난해 한반도를 강타한 폭염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지난해의 살인적인 더위는 가히 재난이라 칭할 수 있었습니다. 약자에게 재난은 더욱 가혹하게 다가옵니다. 작년 폭염의 기억과 더불어 지난 강원산불 당시 기본적인 수어통역조차 지원되지 않았던 재난방송의 기억을 떠올리며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이번 월간평등UP 주제를 '재난과 차별'로 잡게 되었습니다.

그 두번째로 누구에게나 '살아나올 권리'에 대한 글을 기고합니다. 
"속초-고성에 사는 장애인도 재난 속보를 듣고 안전해질 권리를 보장해 주십시오."
2019년 4월 4일 강원도 고성 일대 시작된 산불이 속초 시내까지 위협하고 정부가 재난대응 최고단계 발령을 내리던 긴급한 순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는 방송사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국가 재난방송 주관 방송사인 KBS를 비롯해 공중파 3사 그 어느 곳도 수어통역을 제공하지 않는 재난방송을 지켜보면서 속이 타들어갔을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란 어렵지 않다. 안전해질 권리가 모두에게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누군가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KBS 재난특보의 수어 통역은 5일 오전부터 제공됐다.
 KBS 재난특보의 수어 통역은 4월 5일 오전부터 제공됐다.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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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의 원칙, 과연 평등하게 적용되고 있나

2018년 행정안전부에서 발행한 '재난씨, 우리 헤어져'는 재난의 악순환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17개의 유형별 재난참사 사례를 짚고 대응책을 제시하는 재난대응사례집이다. 발간 당시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모든 재난 상황에서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첫 번째 원칙으로 '대피'를 꼽았다. 위험에 닥쳤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현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즉 대피라고 말했다. 하지만 강원도 산불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재난에 대한 적절한 대피 정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장애인은 재난 상황에서 더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발생 시 일본 전체인구의 사망률은 0.8%인 것에 반해 장애인 사망률이 3.5%로 보고되기도 했다. 이 숫자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재난방송에서 수어통역을 전혀 제공받지 못했던 청각장애인은 산불이 너무 순식간에 번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재난에 대한 차별적이고 부적절한 대응으로 인해 생명을 위협받았다.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누군가'로 등재되는 조건에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다. 강원도 산불에서 '내가 살아나갈 수 있을까?' 불안에 떨어야 했던 사람들은 비단 청각장애인만은 아니다. 재난 경보음을 들었지만 구체적인 상황을 알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빠르게 대피할 수 없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 거동이 불편하거나 혼자서는 이동할 수 없는 노약자나 유아, 한국어로만 전달되는 재난 정보를 이해할 수 없는 외국인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재난 위험으로부터 살아나올 권리를 박탈당한 채 제일 중요한 대피의 원칙에서 비껴나 있는 것이다.

그 '누군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지난 4월 인권운동사랑방이 발간한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는 대피의 원칙을 '살아나올 권리'를 통해 강조하면서도, 국가의 재난안전체계에서 예방이나 복구 단계와는 구분되는 '대응 단계'에서 주목해야 할 세 가지 공통점을 제시한다. 재난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최우선되어야 할 피해자들의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번 강원도 산불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 장애인은 재난에서 제외? : 내가 처한 상황을 알 권리

재난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면, 그래서 대피해야 한다는 판단 자체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재난으로부터 살아나올 수 있을까? 재난방송은 피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재난 정보전달 체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국가 재난방송 주관 방송사인 KBS는 오후 8시 이후부터 주민 대피령이 확대된 상황에서도, 오후 10시쯤 국가위기경보 단계가 '경계'에서 최고 단계인 '심각'으로 격상되었을 때에도 재난 소식을 짧게 전할 뿐, 재난 특보가 아닌 정규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다른 방송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재난 정보는 무엇보다 빠르게 대대적으로 전파되어야 할 소식임에도 '서울'이 아니라 '강원도 지역'이라는 이유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은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재난방송에서 기본적인 화면 해설 자막 외에 수어 통역, 폐쇄 자막(Closed Caption, 자막의 표시 여부를 설정할 수 있는 자막), 외국인을 위한 영어 자막 방송 등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방송법, 방송통신발전 기본법, 자연재해대책법,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민방위 기본법 등에 따라 반드시 장애인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재난방송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내가 처한 상황을 알 권리는 '알았어야 하는 때', 즉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시기에 위험을 인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국가의 의무를 요청한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을 강타했을 당시 중앙정부는 상륙 56시간 전에 대피령을 발동했지만 시장은 상륙 27시간 전에 자율적인 대피를 권고했고, 10시간 전에서야 강제 대피령을 발표했다. 이미 마비된 교통상황에서 차량을 가지지 못한 흑인, 거동이 어려운 노약자와 장애인 사망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강원도 산불에서 속초로 불길이 번지고 주민대피령이 내려지던 때 뉴스 특보를 통해 구체적인 대피 방법을 담은 재난방송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더라면 어땠을까? 이동이 어려운 장애인이나 노약자도 더 빨리 가족이나 이웃 네트워크를 통해 더 빨리 대피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고, 지역사회의 장애인 지원센터 및 관련 기관들 역시 더 많은 장애인에게 소식을 전달할 수 있었을 테다.

2) 불안을 키우는 재난정보? :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권리

지난 5월 방송통신위원회는 재난방송의 신속성과 신뢰성 제고를 위한 대책 중 하나로 재난의 진행경로, 대피요령과 장소 등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재난정보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대대적인 주민 대피령이 내려진 이번 산불에서 재난방송이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게 아니라 불필요한 불안감을 일으키는 현장 중계방송만을 반복했다는 비판이 큰 영향을 미쳤을 테지만, 지금부터라도 꼭 지켜져야 할 필수적인 조치이다.
 
 발달장애인의 소소한 소통 '소소'의 안전 안내문자 예시
 발달장애인의 소소한 소통 "소소"의 안전 안내문자 예시
ⓒ 소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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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상황에서 책임 주체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당사자들이 재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떤 대응을 해야 하는지 필수적인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하지만 이때 중요한 점은 재난의 현장에 다양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가 실제로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예비사회적기업인 '소소'는 행정안전부에서 안전에 주의가 필요할 때 발송하는 '안전안내문자'부터 발달장애인, 외국인, 학습장애 어린이, 어르신 등 말과 글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을 포괄하는 '쉬운 문자'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재난 정보의 정확한 파악이 어려운 발달장애인의 경우, 재난을 벗어나기 위해 제공되어야 하는 정보의 내용과 형태는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 정보만으로는 살아나올 수 없다 : 구조 받을 권리

결정적으로 재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살아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국가의 구조 활동이다. 개인이 아무리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상 모든 재난은 개인의 대처 범위를 넘어서서 발생한다. 효과적인 구조 인력과 자원 배분, 구조 지휘 체계, 구조 대상의 차이에 대한 파악과 그에 따른 대처가 필수적인 이유다. 김부겸 장관은 재난의 공통적인 교훈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위한 사회적 투자를 꼽기도 했다. 하지만 강원도 산불 역시 이전 재난들과 마찬가지로 국가나 지자체들이 장애인의 안전과 생명 문제를 장애인 개인이나 민간 장애인 단체에 책임을 떠 넘겨 버렸다는 비판을 비하기 어려웠다.

소리 경보 시스템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청각장애인인지 혹은 재난 대피 시 비장애인의 40~66% 정도의 보행속도만 낼 수 있는 시각장애인인지, 지역에 장애인의 수가 몇 명이고 이들을 지원할 수 있는 인력과 자원이 제대로 파악되어 있는지, 재난발생 장애인 피난 설비는 충분한지 등 장애계에서 오랫동안 장애 유형별 대피설계 의무화에 대한 요구가 나오는 배경에는 같은 장애인일지라도 장애의 구분과 정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어떤 대처가 필요한지에 큰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구조 받을 권리의 실현이 단순히 재난 현장 대응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어떤 재난 대응 시스템을 갖추어 왔는지와 연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강원도 산불 이후에도 재난방송 및 정보 전달 체계부터 엘리베이터 대체 장치 설치, 장애인 대상 전문통역사 인력 확충 및 이동차량 제공, 지역사회 연락망 구축, 재난 대피 교육 등 다양한 요구들이 쏟아지고 있다. 정부는 이미 '제3차 편의증진 국가종합5개년 계획(2010~2014년)'에 따라 다양한 유형의 재난에 대해 장애 유형별로 지원할 수 있는 재난방지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개발할 예정이라고 했으나 별다른 성과물은 없었다. 제4차(2015~2019년)에 들어서 동일 계획 하에 몇몇 대피 기준과 대응매뉴얼을 만들었을 뿐이다.

안전하게 살아남을 권리,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장애인·언론·인권 단체들이 9일 오후 서울 중구 저동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지난 4일 강원도 산불 재난 방송에서 수어 통역과 화면 해설 등이 제공 안 돼 차별 받았다며 시정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장애인·언론·인권 단체들이 4월 9일 오후 서울 중구 저동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지난 4월 4일 강원도 산불 재난 방송에서 수어 통역과 화면 해설 등이 제공 안 돼 차별 받았다며 시정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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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생명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과거의 재난 참사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대피' 원칙의 강조를 넘어서 대피를 어렵게 하는 조건들이 무엇인지, 누가 그 취약한 조건에 놓여 있는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행 방법들은 무엇인지 등을 찾고 해결하는 것이다. 이 때 장애인을 포함한 노약자, 여성, 임산부, 유아, 외국인 등 '재해 약자'로 규정되는 사람들의 경험과 지식이 재난을 막기 위한 자원이 될 수 있다.

제3차 유엔재난경감회의에서 채택된 재난경감강령 '센다이 선언(2015~2030)'에 대해 한국 역시 적극적으로 이행·추진하고 있다는 홍보를 여기저기서 하고 있다. 하지만 '센다이 선언'이 재난대비 강화를 우선순위로 할 때 핵심은 바로 여성과 장애인이 재난대응 방법을 주도·촉진할 수 있도록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재난을 줄이기 위한 총체적인 책임은 국가에게 있으나 재난대비 계획에서 보편적 접근(universal accessibility)에 대해서는 장애인과 장애인 단체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살아나올 권리'의 실현이 가장 어려운 집단의 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제도와 시스템이 마련될 때 다른 사람들 또한 더 안전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산불은 모든 사람들에게 재난이 평등하게 들이닥치지 않는다는 사실과 함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실행해야 할 의무가 국가에게 있음을 보여주었다. 재난 시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누군가들의 리스트를 가진 사회는 안전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질 국가의 의무, 재해 약자의 관점과 권리에서 출발해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몽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홈페이지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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