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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작가회의에서는 '2019 대전방문의 해'를 기념하여 연속기고를 시작합니다. 대전의 볼거리와 즐길거리, 추억담을 독자들과 나누고 대전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나는 대전서 낳고, 자라서 여러번 밤차 타고 도망쳐봤으나

종내 대전서 밥 벌고 혼인하고 아이 키우며 가끔 새벽차에 막 돌아 온 낯선 얼굴로 가로에 서면

큰길 뒤 잊혀진 골목 보이고 거기 묵은 이발소나 사진관, 목욕탕이 그대로 있으면 마음 환하고 애처롭고 쓸쓸한 어느새 쉰

내가 등짐 져 지은 무수한 집들 헐리고 다시 새집 들어서도록 나는 여기서 꼼짝없이 낡아가며 새로워지는 중이다.

- 시 <대전>
 
삼성교는 대동천이 길게 흘러내리다 대전천과 합수하기 전의 물길 위로 도로를 남북 방향으로 이어주는 작은 다리다. 한때는 자동차 두 대가 비켜 지나던 버젓한 국도였지만 지금은 잊혀진 길 위에서 초라해졌다. 그러나 다리의 생명력이란 본래 그 위를 건너는 모든 물상에 관계된 것이며 특히 걷거나 뛰거나 바퀴에 실려 오가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제대로 다리 구실을 해내던 1950년대의 삼성교와 거기 얽힌 삶의 풍경과 심상을 더듬어보려 한다.

그 시절 삼성교는 삼성동, 홍도동, 성남동, 오정리, 회덕 지역을 통틀어 자동차가 건널 수 있는 몇 안 되는 번듯한 다리였다. 목조교각을 세워 굵은 통나무를 길게 걸치고 그 위에 흙을 덮은 이 다리를 통해 말수레에 실린 공산품, 농산물과 이삿짐들이 남북으로 분주히 오갔다. 가끔 짐 실은 트럭이 지나가면 다리 아래로 뿌옇게 흙먼지가 쏟아져내렸다. 아침길 나서는 아이들에게 말수레 조심하라는 어른들의 당부가 꼭 따라붙던 시절이다.

쟁이 막 끝나고 북쪽으로 걸어 올라가던 피난민의 귀환행렬이 여름내 삼성교를 건너갔다. 길 가다 저녁이 되면 다리를 지붕 삼아 떼지어 마른 모래톱에 지친 몸을 눕히던 이들이다. 그 저녁때 다리 주변 마을 반장들은 이렇게 외치고 돌아다녔다. 주먹밥 좀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집집마다 없는 여유를 만들어 호박잎으로 싼 주먹밥을 냈다. 된장도 아기 숟갈 하나만큼 얹어. 그들은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다리 아래 모래톱을 떠났다.

그런 시절의 어디쯤에서 삼성교는 꽤 번성한 풍경을 지니게 된다. 떠나지 않은 많은 이들이 천변 따라 길게 움막집을 짓고 살게 된 것이다. 다리 근처에 제법 규모가 큰 장도 섰다. 먹거리 위주로 생겨난 장을 통해 그들은 기본적인 삶을 살아나갔다. 아침이면 시내로 들어가 그게 무어든 한움큼씩 움켜쥐고 돌아온 사내들이 삼성교 건너 길게 이어진 천변 움막집 호롱불속으로 스며들었다.

다리에 대해 쓰자면 길이, 폭, 하중이 먼저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기술된 다리는 이미 사라진 옛 다리다. 1960년대 말쯤 철근콘크리트로 다시 세워졌다. 그러니까, 필자는 지금 기억 속의 통나무 다리와 그 위를 건너다니던 수많은 물상과 사람들에 관해 말하는 중이다.

전쟁 뒤 십년 넘게 삼성교는 대전역을 지나 북쪽으로 뻗은 국도 중 제법 규모 있는 나무와 흙으로 된 다리였다. 시내를 곧게 빠져나온 도로가 북쪽을 향해 뻗어가도록 대동천을 건네주던 거였다. 그 길 따라 삼십 분쯤 걸어 닿는 붉은 민둥산에 시립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었다. 그렇게 그 시절, 인구 3만 쯤의 시내 쪽에서 오는 장례행렬은 모두 삼성교를 건너야 했다. 울긋불긋 만장과 상두꾼의 요령소리, 선창과 후렴이 함께 지나갔다. 아이들에게 그건 대단한 구경꺼리였다. 난간에 죽 늘어서서 낯선 죽음의 분위기를 맛보곤 했다. 그리고 그런 날들 중엔 가슴에 들어박히는 특별한 정경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저마다의 희노애락 품고 건넌 다리
 
 냇가 풍경. 본문 내용과는 관련 없는 자료사진.
 냇가 풍경. 본문 내용과는 관련 없는 자료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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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눈깨비가 내리던 오후였다. 찬바람 불고 서쪽 하늘엔 구름 사이로 기운 해가 언뜻언뜻 내비치던 스산한 날씨. 시내 쪽에서 마구 달려오는 작고 초라한 장례행렬이 있었다. 그런데, 종이꽃을 듬성듬성 매단 작은 가마가 자주 멈칫대는 거였다. 만장도 없는 그 행렬은 상여꾼 앞 뒤 한 명씩과 어린 소년 상주 한 사람, 그리고 자주 뒤돌아보며 속도를 조절하던 요령잡이 하나, 이렇게 네 명이었다. 어린 상주는 뛰며, 진눈깨비 질척대는 정강이 아래까지 늘어진 상복을 연신 끌어올리며 앞 선 상여를 필사적으로 따라잡던 거였다. 그렇게 그들은 해 지기 전 장례를 끝내고자 있는 힘을 다해 다리 건너 북쪽으로 멀어져 갔다.

그 시절 많은 이들이 저마다 희노애락을 품고 나무와 흙으로 된 다리를 건너다녔다. 이른 아침 시내로 떠난 이들은 어둑해져서 다시 다리를 밟게 된다. 그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건장한 남자들이 그랬다. 다리 위에는 반짝 야시장이 서고 종이상자를 좌판 삼아 식빵을 낱개로 풀어 파는 젊은 장사꾼도 있었다. 좌판 하나에 촛불 하나씩 밝혀놓고. 그러면 지친 이들이 호주머니에서 땀 젖은 지폐나 동전을 꺼내 빵을 사들고 가로등 없는 길을 따라 밤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삼성교 아래로 흐른 대동천은 대전천, 갑천과 만난 뒤 이십여 리를 더 나아가 이윽고 금강의 너른 품속으로 녹아든다. 이렇게 천과 천이 만나고 강과 합쳐지는 지점에는 비옥한 모래톱이 생겨나고 여기서 김장 재료인 무와 배추가 쑥쑥 자란다. 근교농업이 제대로 자리 잡는 것이다.

늦가을 서리 내리기 직전 삼성교를 건너는 긴 마차 행렬이 다리를 지나 시내 쪽으로 흘러가는 풍경은 장관이다. 마부들은 더운 입김을 내뿜는 말 잔등을 가볍게 치고 외마디 외침을 내지르며 걸음을 재촉해 산처럼 실린 무, 배추와 함께 시내 큰 장터를 향해 나아간다. 다리 난간에 기대서서 보면 꿈틀대는 말 잔등과 마부의 낯빛보다 더 검붉은 조랑말의 눈이 손에 닿을 듯 가깝다. 그리고 말의 몸뚱어리 여기저기 지렁이처럼 툭툭 불거진 핏줄도 선명했다. 그 시절 삼성교를 건너던 모든 목숨들은 하나같이 필사적으로 살아내던 거였다.

봄부터 가을까지 다리 아래 백사장에는 볕 좋은 날 여기저기 가마솥이 걸린다.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온 땔감으로 불을 지펴 빨래를 삶아 모래 위에 길게 널었다. 그 흰빛의 빨래들이 햇볕에 마르는 동안 사람들은 다리 아래 그늘 여기저기 나뉘어 밥을 먹고 낮잠도 길게 잤다.

해가 지면 다리 위쪽 웅덩이가 생긴 곳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인근 여자들이 멱 감으며 철벙대고, 깔깔댔다. 그 다음은 소리 안 내고 하루치의 땀을 씻어내는 남자들 차례였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한국전쟁 바로 뒤 제 몫을 다하던 삼성교와 맑은 물이 흐르던 대동천 그리고 열심히 살아내던 사람들에 관해 짧게 추억한 것이다. 이제 그 자리엔 반세기가 지난 철근 콘크리트 다리와 잔뜩 흐린 물이 있다. 또한 추억 속의 바로 그 다리도 함께 낡아간다.

이면우

시인, <저 석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십일월을 만지다> 등 노작문학상 수상 현재 대전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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