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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코 우리는 성냥불을 밝히면서 그 찰나의 불빛을 통해 인류와 문명의 진화라는 그 원초적 기억을 반짝 환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심코 우리는 성냥불을 밝히면서 그 찰나의 불빛을 통해 인류와 문명의 진화라는 그 원초적 기억을 반짝 환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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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 몰래 '천상의 보물'이었던 '불'과 '지혜'를 훔쳐서 인간에게 전해준 것은 프로메테우스였다. 진노한 신은 그를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묶고,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내렸지만, 인간은 그 보물에 기대어 오늘날의 문명을 창조했다. 

프로메테우스가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서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 불이 인류 문명의 발전과정에서 얼마나 중요한 구실을 했는지는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다. 불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에너지양의 지속적인 증가와 인간이 불을 제어하는 것이라는 현대 과학기술사'의 특징은 그만두고서라도 불이 없는 인간의 일상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 난만한 21세기에도 인간은 불 없이 음식을 익히고 어둠을 밝히거나 공간을 덥힐 수 없다. 불은 현대기술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 형태를 띠기도 하지만, 불꽃의 모습이라는 본질적 형태는 잃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불을 얻었지만, 현대인은 지금도 휴대할 수 있는 몇몇 발화(發火) 도구의 도움을 받아 간단히 불을 만들어낸다. 

성냥이 보여준 '신세계'

불을 일으켜 붙이는 도구로서 성냥과 라이터가 그거다. 라이터만 해도 꽤 진전된 기술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지만, 성냥은 의장(意匠)과 형태만 조금씩 달라졌을 뿐 마찰로 불을 일으키는 방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성냥'은 산부인과 계통의 의서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1608년)에 나온 옛말 '석류황(石硫黃)'에서 유래했다. "유황(硫黃)을 돌[石]처럼 굳혀 불을 붙이는 도구"라는 뜻의 '석류황'이 음운 변화 단계를 거쳐 오늘날의 '성냥'이 된 것이다.

성냥은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승려 이동인이 들여왔다. 부싯돌보다 사용하기 편해서 큰 관심을 모았으나 성냥의 대중화는 강제합병(1910) 이후부터다. 당시의 '대중화'가 어느 수준을 이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부싯돌로 불을 붙여온 이들에게는 성냥이 보여준 실용성은 '신세계'였을 것이다.

마찰로 불을 일으키는 원리야 다를 게 없었지만, 성냥개비를 두어 번 갑(匣)의 마찰 면에 그으면 매캐한 화약 냄새를 풍기며 불이 붙는 그 신식 물건이 주는 감동은 남달랐을 것은 분명하다. 성냥불 켜기는 여러 차례 부싯돌을 긋고 부싯깃에 불이 붙어 연기가 나면 입바람을 불어서 불씨를 살리는 기존의 불붙이기에 비기면 꽤 혁명적인 방식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어른들은 성냥을 '다황'이라고 불렀다. 그게 '당황(唐黃)', 예전에 성냥을 이르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훨씬 뒷날이다. '당'은 당나라, 즉 중국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당나귀'나 '당나발', '당면(唐麪)' 등에서와 마찬가지 뜻으로 쓰였다. 쉽게 발음하려다 보니 '당'에서 이응이 떨어졌다. '황'은 유황[磺]의 뜻으로 쓰였으니 '당황'은 "당(중국)에서 들어온 유황"이라는 의미인 셈이다. 

1960년대만 해도 성냥은 그리 흔한 물건은 아니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조리하고 군불을 넣으며, 방마다 호롱불을 밝히던 시절이다. 손바닥만 한 성냥갑은 이방 저방으로 옮겨가며 불을 밝혀야 했고, 습기를 막고 찾는 수고를 덜고자 공중에 고무줄로 매달려 있기 일쑤였다. 

초등학교 졸업으로 학력을 마감한 동무들은 남 먼저 배운 담배를 피우려고 나무하러 갈 때 호주머니에 성냥개비 몇 개와 성냥갑에서 떼어낸 적린(赤燐)이 칠해진 마찰 면 일부를 챙기곤 했다. 나무꾼들만이 아니라 성냥을 휴대할 필요가 있을 땐 누구나 그런 방식을 썼다. 휴대용 작은 성냥갑이 일반화된 건 1970년대나 되어서였기 때문이다. 
 
 성냥개비를 두어 번 갑(匣)의 마찰 면에 그으면 매캐한 화약 냄새를 풍기며 불이 붙는 성냥이 주는 감동은 남달랐을 것이다.
 성냥개비를 두어 번 갑(匣)의 마찰 면에 그으면 매캐한 화약 냄새를 풍기며 불이 붙는 성냥이 주는 감동은 남달랐을 것이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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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부터 성냥은 이사한 집에 들르며 으레 사 가는 집들이 선물이었다. 성냥불처럼 '살림이 불 일 듯 일어나라'고 하는 의미를 담았는데, 이는 요즘 휴지를 사가는 뜻이 '술술 잘 풀리라'는 의미인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대구의 중학교로 진학하여 형님댁에 기숙하던 무렵, 집에서 쓰던 성냥은 길쭉한 직사각형에 갑을 빼서 쓰는 '돈표 성냥'이었다. 살림이 불 일 듯 피라고 건네는 성냥마저 '돈표'니 '돈표 성냥'은 더 이를 게 없는 선물인 셈이었다. 

노랑 바탕 성냥갑 윗면의 중앙에는 엽전으로 그린 원에 빨간 글씨로 '돈표'라 적혔다. 성냥갑 디자인으로 지폐 비슷한 도안을 썼는데, 오른쪽엔 정자관을 쓴 노인, 왼쪽에는 30000원이라 적혀 있었다.

'영화인촌산업사(榮華燐寸産業社)'. 내 기억에는 그게 한자로 씌어 있었던 듯한데,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니 대부분 한글로 된 이미지 자료밖에 보이지 않는다. 국어사전에는 없지만 '도깨비불 인(燐)자'를 쓰는 '인촌(燐寸)'은 일본에서 성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성냥의 전성시대도 끝나고

1970년대 초중반에 시골에도 전기가 들어오면서 성냥의 쓰임새는 훨씬 줄었다. 그러나 방은 전기로 밝혔지만, 아궁이에는 여전히 땔감을 지폈으므로 방에 쓰이지 않는 성냥은 부엌으로 밀려났다. 연탄이 땔감 대신 연료로 쓰이기 시작한 때는 80년대 들어서이니 성냥의 전성기는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1980년대만 해도 담뱃갑의 반의반 크기인 휴대용 성냥을 쓰는 이가 적지 않았다. 장구를 치는 고운 여인의 모습이 그려진 이 성냥은 천안의 조일산업이 생산한 제품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이면 이 휴대용 성냥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일회용 가스라이터로 유명한 상표 '불티나'가 출시된 게 1986년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엔 다방에 가면 탁자 위에 재떨이와 성냥이 기본으로 놓여 있었다. 젊은이들은 성냥개비로 우물 정(井)자를 겹쳐 탑을 쌓으면서 시간을 죽이곤 했다. 여흥으로 성냥개비를 이용한 도형 만들기 문제를 풀기도 했다. 

그러나 금연문화가 급격히 확산하면서 이제 다방을 대신한 커피숍에도 담배를 피울 수 없다. 금연 공간이니 당연히 성냥 따위를 비치할 이유가 없다. 성냥은 술집에서 홍보용으로 제작해 거저 주는 휴대용 성냥이 고작이다.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shop)이 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 따르면 개항 이후 조선에서는 등유와 성냥의 수입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 신식의 외국상품이 보여준 놀라운 효능이 조선 양반들을 매료한 것이다. 
 
 2013년에 성광성냥(경북 의성), 2017년 기린표 성냥(경남 김해)이 차례로 문을 닫으면서 성냥의 국내생산은 종지부를 찍었다. 의성 성광성냥 공장에서.
 2013년에 성광성냥(경북 의성), 2017년 기린표 성냥(경남 김해)이 차례로 문을 닫으면서 성냥의 국내생산은 종지부를 찍었다. 의성 성광성냥 공장에서.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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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인천, 원산항으로 들여오던 수입 성냥을 대체할 국내생산 시설인 조선인촌주식회사가 인천 송림동에 문을 연 것은 1917년이었다. 그게 병사들이 즐겨 부른 저속한 노래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가 생긴 배경이었다. 

성냥공장은 한국전쟁 이후 200여 곳 넘게 생겼고 수출까지 했었지만 1990년대 이후 일회용 라이터가 등장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과거 지역별로 공작 성냥(광주), 비사표 성냥(논산), 돈표 성냥(영주), 조일·유엔 성냥(천안) 등 여러 상표가 경쟁했으나 2013년에 성광성냥(경북 의성), 2017년 기린표 성냥(경남 김해)이 차례로 문을 닫으면서 성냥의 국내생산은 종지부를 찍었다(관련 기사 : 딱 하나 남은 성냥공장, 이대로 보내야 할까요).

명멸하는 불빛이 환기하는 원초적 기억

 
 남포등. 호롱불에 비하면 훨씬 고급한 이 등불을 밝히는 데도 성냥은 필수적이었다.
 남포등. 호롱불에 비하면 훨씬 고급한 이 등불을 밝히는 데도 성냥은 필수적이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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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초 축에 들었던 내가 성냥을 졸업하고 일회용 가스라이터를 쓰기 시작한 것도 1980년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불을 켜려고 라이터 부싯돌을 긋는 게 거듭되면서 오른손 엄지 부싯돌에 닿는 부위에 굳은살이 박였다. 

2000년대 초반에 삼십 년 넘게 피워 온 담배를 끊었으니 어느새 십오 년이 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일상에서 성냥이든 라이터이든 그것이 일으키는 불과 멀어졌다는 뜻이다. 이제 내가 일상에서 불을 만나는 일은 가끔 라면을 끓이려고 가스레인지를 켤 때밖에 없다. 

무심코 우리는 성냥불을 밝히면서 그 찰나의 불빛을 통해 인류와 문명의 진화라는 그 원초적 기억을 반짝 환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잠깐 주위를 밝혔다가 사위는 불길 때문에 이내 무심한 일상으로 되돌아오고 말지만.

담배를 배울 때 사내아이들이 그린 '로망'은 대개 비슷하다. 내가 그린 장면은 중절모에다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손을 오므려 바람을 막고 성냥을 그어 담뱃불을 붙이는 사내의 모습이다. 그것은 영화 <카사블랑카>(1942)의 주인공 험프리 보가트의 모습과 오 헨리의 단편소설 '20년 후'의 한 장면과 어렴풋하게 겹친다. 어둠을 밝힌 담뱃불로 드러나는 진실의 순간은 우리네 곡절 많은 삶의 은유로 읽히지 않는가. 
 
"문에 선 사내가 성냥개비 하나를 긋더니 시가에 불을 붙였다. 그 불로 인해 어렴풋하게나마 각진 턱을 가진 예리한 사내의 눈과 그 사내의 오른쪽 눈썹 근처에 난 자그마한 상처가 보였다." 

내 서랍에는 시내 어떤 일식집 상호가 박힌 조그만 휴대용 성냥이 한 통 있다. 아마 이 도시로 옮아오던 해, 누군가와 만났던 자리였을 것이다. 담배도 피우지 않으면서도 계산대에서 그걸 하나 집어 주머니에 넣은 건 다만 습관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성냥, 혹은 불과 함께한 시간과 기억에 대한 미련, 아쉬움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지역 매체 <기록창고>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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