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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통일맞이는 방북 30주년을 맞아 당시 전대협, 노동계, 기독교, 학계, 통일운동, 일반 대학생 등 각 부분별로 7명의 기고문을 통해 판문점선언, 평양공동선언 시대에 '늦봄의 방북사건'을 재조명하고, 판문점선언시대 문익환 방북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찾고, 이를 재평가하고자 합니다. 이인영 의원의 첫 번째 글에 이어, 두 번째 글은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이 보내왔습니다.[편집자말]
3.1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민주화에 뛰어든 문익환 목사는 시인, 신학자, 목사 그리고 민중을 뜨겁게 사랑하는 선지자였다.
▲ 거리에 선 목사 3.1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민주화에 뛰어든 문익환 목사는 시인, 신학자, 목사 그리고 민중을 뜨겁게 사랑하는 선지자였다.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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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이전까지 문익환은 개혁적인 신학자였고 좋은 목사였다. 한신대 신학과 교수로 출중했고 한빛교회 담임목사로 신도들의 존경을 받았다. 성서 공동번역을 하며 시와 더욱 가까워지고 박정희 치하의 나라꼴에 대한 걱정이 깊어가고 있었다.

성서 번역 작업에 매달리던 문익환은 1970년 11월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문익환은 전태일의 죽음을 통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가 그의 정신을 움직였고 그 다음은 전태일이 그의 육신을 움직였다. 한 청년노동자는 죽었지만, 전태일이 민중의 삶 속에서 부활했음을 문익환은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숭실학교는 물론이고 한신대에서도 함께 공부하며 고락을 나누었던 벗 장준하를 다시 만난다. 장준하의 비보가 전해진 것은 1975년 8월 17일, 그의 나이 58세 때였다. 박정희 독재에 온몸으로 맞서 싸우던 장준하의 죽음을 대하며 책상이나 강단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소명의식을 느끼게 된다. 전태일과 장준하가 목숨을 바치면서 문익환을 행동하는 투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문익환은 8월 2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장준하 영결식에서 박정희 유신체제를 거침없이 비판하고 장준하 죽음의 책임을 물으며 정면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중요한 투쟁의 현장에 함께하며 힘을 실었다. 탄압 받는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갔다.
"전태일 아닌 것들아/ 다 물러가거라/ 눈물 아닌 것 아픔 아닌 것 절망 아닌 것/ 모든 허접한 쓰레기들아/ 당장 물러들 가거라/ 온 강산이 한바탕 큰 울음 터트리게"(문익환 시 '전태일' 일부).

감옥을 여러 번 드나들며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때리면 때릴수록 더 힘차게 도는 팽이처럼 담금질을 할수록 더 단단해지는 쇠처럼 문익환은 더 강해졌다. 그리고 더 넉넉해졌다.

통일운동이 시기적으로 중요하며 핵심이라는 인식을 하면서도 그의 중심은 확실했다. 전태일로 표상되는 노동의 가치와 중요성 위에서 민중 중심의 운동관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다음의 시구가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국의 하늘아/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내 이름은 전태일이다// ... //백두에서 한라에서 불어오다가/ 휴전선에서 만나 부둥켜안고 뒹구는/ 마파람아 높파람아/ 동해에서 서해에서 마주 불어오다가/ 태백산 줄기에서 만나 목놓아 우는/ 하늬바람아 샛바람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이라고 뭐 다르겠느냐/ 우리의 이름도 전태일이다"(문익환의 시 '전태일' 일부) 

문익환의 그 순수하고 티 없이 맑은 표정과 언행을 잊을 수가 없다. 필자가 무지렁이 교사로 학생들의 아픔 때문에 교육운동의 말미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어디선가 만나기라도 하면 덥석 손을 잡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표정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조금이라도 힘이 되려고 하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마 어설픈 나에게서 이 땅 노동자의 모습을 보았으리라. 아니 어쩌면 나를 전태일로 보려고 했으리라. 1983년 초대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회장으로 쓴 '이 아픔, 이 진실, 이 사랑'이란 제목의 전태일 평전 발간사가 그걸 잘 나타내고 있다.
"젊은 노동자 전태일의 이야기는 6천만 겨레의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눈물로 풀어져 흐르는 맑은 강이 되어야 합니다. 앞을 죽음처럼 가로막는 절벽을 무너뜨리고 흐르는 민족사의 물줄기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은 땅속을 흐르는 이 물줄기 속 한 방울로서...... "(발간사 일부)

[문익환 방북 30주년 특별 기고 ① 이인영 의원]
어찌나 죄송하던지... 문익환 목사 방북 직전 벌어진 일들  

   
전태일재단 이수호 이사장
 전태일재단 이수호 이사장
ⓒ 이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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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문익환, #문익환방북3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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