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에 이어, 이번에는 <상도길>이다. - 기자말

▶ 코스안내 : ①숭실대학교 - ②부부독립운동가 박영준·신순호 집 터 - ③김영삼대통령기념도서관과 사저 - ④상도동 철거투쟁의 현장 - ⑤현대판 송덕비 <동작을 빛낸 인물> - ⑥복개천(상도천, 대방천) - ⑦장승배기 장승 - ⑧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과 우덕주 대령
 
장승배기 장승 '정조 전설'에 등장하는 장승배기 장승은 1991년 이 자리에 복원되어 여러 차례의 수난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곳에서 매년 개최하는 <장승제>는 서울시의 서울미래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 장승배기 장승 "정조 전설"에 등장하는 장승배기 장승은 1991년 이 자리에 복원되어 여러 차례의 수난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곳에서 매년 개최하는 <장승제>는 서울시의 서울미래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장승배기는?

상도동과 노량진동의 경계를 가르는 이곳 장승배기도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다.

1960년 4·19혁명 당시에는 숭실대생들이 이곳 장승배기를 거쳐 한강인도교를 넘어 시내로 진출했다. 1965년에는 한일회담반대투쟁에 나선 성남고 학생 1200여 명이 이곳 장승배기 방면에서 노량진 3거리를 향해 행진을 시작하기도 했다.(<대체 노량진삼거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참조)

장승배기는 1973년 중앙대생 500여 명이 학교 후문을 통해 진출하여 반유신투쟁을 벌인 곳이자, 1978년에는 서울대생 600여 명이 반유신투쟁을 벌인 곳이기도 했다. 김대중과 더불어 대표적인 야당 지도자였던 상도동계의 김영삼 집이 인근에 있었던 점도 하나의 요인일 것이다.

1980년 5월 민주화의 봄 당시에는 숭실대, 서울대생들이 5월 14일과 15일 이틀 동안 이곳 장승배기를 거쳐 한 번은 영등포 방면으로, 다른 한 번은 한강인도교 방면으로 행진했다.

1987년 대통령선거 이래 한동안 집회 명소로 사용되었던 보라매공원의 집회가 끝나고 행진이 시작되면 서울역 방면 진출을 시도하는 시위대의 행진은 반드시 이곳 장승배기를 거쳐야 했다.

한편, 1974년 유신시절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유인태도 이곳을 찾았다 가까스로 체포를 면한다. 장승배기 사거리 파출소 앞에서 불심검문을 당하지만 태연하게 먼저 다가가서 경찰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아까 이미 검문을 받았다"고 받아치는 대담함을 발휘해서 위기를 극복했던 것이다.

비록 당시에는 서 있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그곳을 지키고 있던 장승배기 장승의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조 전설'로 널리 알려진 장승배기 장승

이곳은 원래 장승배기 장승으로 더 유명하다. '정조 전설'에 따르면 화성에 있는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행차 하던 정조가 잠시 쉬어가던 곳이 지금의 장승배기였다.

정조 시대에 장승배기는 인가도 드물고 아름드리 나무숲이 우거진 곳이라,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이에 정조는 숲이 울창하고 인가도 드물어 으슥한 그곳에 장승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그러면서 하나는 남자의 형상을 한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다른 하나는 여자의 형상을 한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이름 붙이도록 명했다는 것이다.

장승배기 장승은 왕명에 의해 만들어져서인지 다른 장승들하고는 급이 달라 전국의 장승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대방장승'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방동이라는 지명이 나왔다는 설도 있지만, 세워진 장소부터 대방동이 아니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대방동의 옛 이름은 번대방리였는데, 번대방리는 지금의 대방초등학교 자리에 큰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을 둘러싸고 마을이 형성되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런데 전설과 달리 영조 재임 시절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동지도>에 장생현로(長栍峴路)가 이미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조 이전부터 장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장승배기 장승과 관련한 정조 전설이 역사적 사실이기보다는 후대에 만들어진 설화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변강쇠와 옹녀, 그리고 장승배기 장승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포스터(2018년 판) 변강쇠와 옹녀 이야기는 영화나 연극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포스터(2018년 판) 변강쇠와 옹녀 이야기는 영화나 연극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 국립극장 국립창극단

관련사진보기


신재효의 판소리 <가루지기타령>(변강쇠타령)에도 장승배기 장승이 전국 장승의 우두머리인 대방장승으로 등장한다.

<가루지기타령>에 따르면 옹녀와 부부가 된 변강쇠가 경상도 함양의 지리산 자락에서 화전 생활을 하게 된다. 어느 날 변강쇠가 옹녀의 성화에 못 이겨 나무를 하러 가지만, 빈둥거리다가 결국 빈손으로 돌아오게 된다. 옹녀의 잔소리가 걱정된 변강쇠는 마을 어귀에 있는 장승을 베어 옹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궁이에 던져 넣는다. 당시로서는 파격을 넘어 금기에 도전한 행동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졸지에 땔감으로 전락하고 만 천하의 지리산 장승은 정신을 수습하고 서울로 올라와 장승들의 우두머리인 장승배기 대방장승에게 하소연하게 되었고, 이에 깜짝 놀란 대방장승이 전국 팔도의 장승들에게 한강변 새남터에 집결하라고 통문을 보낸다.

한강 새남터에서 개최된 전국장승대회에서는 지리산 장승의 증언도 있었을 것이고, 이에 격분한 전국의 장승들이 차례로 나와 변강쇠를 규탄하는 성토대회로 발전했을 것이다. 결국 장승배기 대방장승은 전국 장승들의 분노와 의지를 모아 모든 장승이 변강쇠에게 병을 하나씩 넘겨주는 최고의 형벌을 내리기로 한다. 변강쇠가 갑자기 수백 가지 병을 앓다가 사망한 배경에는 이런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변강쇠타령을 단지 정력 좋은 남녀가 만나 벌이는 문란한 성생활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꾸민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변강쇠 이야기를 잘 분석해 보면, 민중들이 토지에서 쫓겨나 유랑민이 되어 삶의 극한까지 내몰리다가 결국은 죽어나가는 조선 후기의 사회상이 적나라하게 반영된 것을 알 수 있다.

평안도 출신인 옹녀가 15살 때부터 결혼하거나 상대한 남자들이 족족 죽어나가서 결국 경상도 함양까지 쫓기는 장면이나 죽은 변강쇠의 시신을 치우면서 여러 사람이 죽는 장면 등이 그렇다. 논밭을 잃고 떠돌아다니던 사람이 길거리에 흔했고, 심지어는 길바닥에 굶어 죽고 얼어 죽은 시체들이 즐비했던 19세기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변강쇠타령의 원제는 가루지기타령인데, 가루지기라는 말엔 시체를 거적에 말아 진다는 뜻이 담겨 있고 장승을 베어 가로진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왜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만 수난을 당했을까

장승배기 장승은 1930년대 일제가 '미신타파'라는 명분으로 전국의 장승을 없앨 때 수난을 당하면서 없어진다. 장승이 사라지는 데에는 초기 미국 선교사들의 역할도 컸다. 당시 기독교 선교사들이 샤머니즘과 민간신앙을 구별하지 않고 자신들의 선교활동에 장애가 된다고 장승제, 산신제, 성주·터주 등을 배척하였는데,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선교사들의 몰이해와 편견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다.

장승배기 장승은 해방 이후 복원되지만, 6·25한국전쟁 때 다시 사라진다. 지금의 장승배기 장승은 1991년에 다시 복원되면서 새로 세워진 것이다.

1982년 장승공원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 동작도서관이 건립된 관계로 오래 가지 못하고, 지금의 자리에 장승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도 장승배기 장승의 안착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개신교 일부에서 '우상숭배'라며 장승 설립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한겨레신문>의 <장승 개신교 반대로 반년 째 낮잠>(1991. 10. 9)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한겨레신문>은 "개신교 동작구교구협의회 소속 목사·신도들이 '우상숭배'라며 반발하고 나서 한달 이상 장승 건립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데, "장승 건립에 반대하는 침묵시위를 계획하는 등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고 당시 기독교계의 움직임을 전하고 있다.
 
장승백이 장승이 세워졌음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91 .10 .26)  전통문화와 기독교 간 갈등의 상징에서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상징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 기독교계의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 장승백이 장승이 세워졌음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91 .10 .26)  전통문화와 기독교 간 갈등의 상징에서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상징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 기독교계의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개신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겨우 장승을 세우지만, 며칠 후에는 실제로 <서울동작구기독교청년회> 소속 회원 70여 명이 <장승철거를 위한 연합기도모임>을 거행하기도 한다. 결국 새로 세워진 장승은 두 차례에 걸쳐 불에 타기도 하고 톱에 잘리기도 하는 수난을 당한다.
  
불에 탄 장승배기 장승(경향신문, 1991. 11. 3) 새로 세워진 장승배기 장승은 두 차례 수난을 당하는데, 한 번은 불에 타고 다른 한 번은 톱으로 잘린다.
▲ 불에 탄 장승배기 장승(경향신문, 1991. 11. 3) 새로 세워진 장승배기 장승은 두 차례 수난을 당하는데, 한 번은 불에 타고 다른 한 번은 톱으로 잘린다.
ⓒ 경향신문

관련사진보기


<경향신문>의 <장승백이 장승 복원 이번에 세 번째...>(1991) 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지난 1월 23일 새벽 신원불명자에 의해 전기톱으로 몸체가 잘리는 등 수난을 당했던 동작구 노량진동 동작도서관 앞 지하여장군이 3일 복원됐다"면서 이는 "한국전쟁 동안 없어졌다가 지난 91년 10월 처음 원형 회복된 이 장승은 그 후 10일 만에 몸체 전부가 방화를 당한 뒤 2번째 복원된 데 이어 3번째 제 모습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대목은 천하대장군은 아무런 훼손을 당하지 않는데 유독 지하여장군만 그런 수난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경향신문>도 "특히 지난 1월 피습 후엔 '왜 계속 여장군만 당하는가', '누구의 소행인가'에 대한 의문과 궁금증을 불러일으켜왔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장승을 훼손한 기독교인의 믿음이 부족했던 것일까? 이들도 가루지기타령에서 변강쇠가 당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지 힘세 보이는 천하대장군은 차마 건드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만만해 보이는 지하여장군에게만 위해를 가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표적으로 삼는 최근의 '강남역 살인사건'을 비롯한 여성혐오 범죄를 보는 듯하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미국 선교사들의 무지와 편견을 맹목적으로 수용하여 장승을 '우상숭배'라고 배척한 기독교인들 역시 가루지기타령을 이해하는 한국인이었던 모양이다.

'지하여장군'이 '지하대장군'으로 바뀐 이유?

지금 장승배기에는 장승배기 장승 중 '지하여장군'이 '지하대장군'으로 이름을 바꾸어 서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성평등의 관점이 반영된 결과일까? 애석하게도 그게 이유는 아닌 듯하다.

전국의 장승을 연구·분석하여 '전국의 장승 중 지하여장군이라고 한 비율보다 지하대장군이라고 한 비율이 높다'고 한 아무개 연구자의 보고를 기계적으로 받아들인 어처구니없는 결과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왜 '지하여장군'이 '지하대장군'으로 바뀌었는지 설명해주는 푯말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장승배기 4거리 중앙쉼터와 장승배기역 지하역사에는 장승배기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두 개의 장승 중 하나는 '천하대장군'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지하여장군'이라고 이름 하라고 명했다"는 정조 전설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은 표석(동작구청 설치)과 설명판(도시철도공사 설치)이 붙어 있을 뿐이다.
 
<장승배기의 유래>를 담은 표석(동작구청 설치) 동작구청에서 설치한 <장승배기의 유래> 표석은 장승배기 4거리 중앙 쉼터에 있다. 이곳에도 '지하대장군'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으며, '지하여장군'만 등장할 뿐이다.
▲ <장승배기의 유래>를 담은 표석(동작구청 설치) 동작구청에서 설치한 <장승배기의 유래> 표석은 장승배기 4거리 중앙 쉼터에 있다. 이곳에도 "지하대장군"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으며, "지하여장군"만 등장할 뿐이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장승배기 장승에 대한 기록이 당시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정조 전설로만 전해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전설에 등장하는 '지하여장군'이 아니라 낯선 '지하대장군'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유감스럽기까지 한 일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 <동작민주올레 가이드북> 등이 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