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종로 영풍문고 앞 전옥서 터에 세워진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전봉준이 교수형을 당하고 꼭 123년 만에 ‘무라카미 텐신’이 처형 2달 전 일본영사관에서 법무아문으로 이송될 대 촬영한 모습으로 건립되었다.
▲ 녹두장군 전봉준 종로 영풍문고 앞 전옥서 터에 세워진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전봉준이 교수형을 당하고 꼭 123년 만에 ‘무라카미 텐신’이 처형 2달 전 일본영사관에서 법무아문으로 이송될 대 촬영한 모습으로 건립되었다.
ⓒ 정덕수

관련사진보기

 
나중에 밝히겠지만 1년 동안 어디에도 글 한 꼭지 쓰지 않았다. 처음 얼마 동안 글을 쓰지 않겠단 생각을 한 뒤 다섯 달 정도 지나서 '이젠 글을 써야지'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한 번 멈춘 걸 다시 시작하기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곧 4월이 된다. 2018년 4월 하순부터 글을 안 썼으니 이미 한 해가 다 된 이야기다.

2018년 4월로 접어들고,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어 가시화될 무렵 가장 먼저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광화문광장에 촛불이 밝혀지던 토요일은 물론이고, 다양한 현장에서 만나던 효봉 여태명 서예가(원광대학교 교수)께서 전옥서 터에 건립된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의 글씨를 썼다는 소식이 확인됐다.

4월 23일 오전이다. 여태명 교수께서 페이스북에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제막식 소식을 전하며 그간의 소식을 알렸다.
 
비문 서체 2018년 4월 23일 여태명 교수께서 공개한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작업과 비문과 관련된 여러 장의 사진 가운데 사용이 확정된 글씨다. 서체를 받아 미리 촬영해 두었던 돌에 올려 보았다.
▲ 녹두장군 전봉준 비문 서체 2018년 4월 23일 여태명 교수께서 공개한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작업과 비문과 관련된 여러 장의 사진 가운데 사용이 확정된 글씨다. 서체를 받아 미리 촬영해 두었던 돌에 올려 보았다.
ⓒ 정덕수

관련사진보기

 
전봉준 장군 동상 제막식

일시 : 2018년 4월 24일
장소 : 종로 네거리 영풍문고 입구(전옥서)

1894년 조선은 외세 침략을 막아내야 나라가 보존되는 절박한 시기였습니다.
전봉준 장군은 경복궁을 침범하고 내정을 간섭하는 일본세력 축출을 위해 전면 봉기했습니다.
마침내 전봉준 장군은 붙잡혀 전옥서에 갇혔고 권설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은 다음 날 처형되었습니다.
1895년 4월 24일 새벽입니다.
순국 123주기를 맞아 그 자리에 국민 모금으로 동상을 건립, 제막식을 합니다.

동상제작 : 김수현(충북대학교 명예교수)
동상 글씨 : 여태명(원광대학교 교수)
완판본 글씨체로 씀

그리고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4월 27일엔 누구랄 거 없이 모두 뉴스를 봤다. 뉴스 화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기념식수를 한 뒤 기념비가 공개되는데 글씨체가 낯이 익었다. 즉각 여태명 교수의 페이스북을 확인했다.
 
2017년 3월 4일 토요일 오후 광화문광장 해치마당에 세월호 사고로 생명을 잃은 이들을 의미하는 304개의 구명조끼와 국화가 놓였다. 광화문 미술행동 일원으로 활동하던 여태명 교수께서 구명조끼에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등의 글을 썼다.
▲ 여태명 교수 2017년 3월 4일 토요일 오후 광화문광장 해치마당에 세월호 사고로 생명을 잃은 이들을 의미하는 304개의 구명조끼와 국화가 놓였다. 광화문 미술행동 일원으로 활동하던 여태명 교수께서 구명조끼에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등의 글을 썼다.
ⓒ 정덕수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어떤 내용도 이 부분에 대해 언급되지 않았다. 12시가 넘어서 '김정은 위원장이 방문록에 쓴 글씨에 대한 '여태명의 생각'이란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한글은 자·모음 초·중·종성의 구조를 조합(결합)형 글자인데 '김정은' 글씨에서 '김' 자는 해체(분리)형 '정은' 글자는 조합형 글씨입니다.

특히 자음에서 초성과 종성에서 겹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에서 초성과 종성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독특하다.

'새로운 력사' 의 초성 '로, 력'자의 'ㄹ'과 '출발' 글자 종성 'ㄹ'에서는 초성과 다르게 '3'자를 반대로 쓴 것 같은 독특한 글씨 형태로 새로운 종성 'ㄹ'을 변화시킨 것이 새롭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전 '김대중·김정일' 회담 시 두 분의 서명 사인에 대해 모 일간지 인터뷰의 평을 곁들인다(김대중 대통령님 서명은 진중하고도 정중한 글씨, 김정일 위원장님 서명은 힘차고 활달하면서 거침이 없다)라고 평한 바 있는데…

이번 김정은 위원장님의 방명과 서명을 평한다면 방명록에 남긴 글씨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올라가게 써서 희망과 진취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글씨이고, 김정은의 서명은 본인의 사인의 의미를 담아 활달하면서도 과감하고 솔직담백함이 그대로 표현되어 신뢰감이 느껴지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내용과 함께 올린 사진들에서는 판화가로 활동하는 김준권 화백의 대작 판화 '산운'도 보였다.

이전 녹두장군 전봉준의 비문 작업에서 여태명 교수께서는 9가지 형태의 글씨체를 다시 3종류로 나눠 쓴 뒤,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었다. 마찬가지로 '평화와 번영을 심다'의 서체도 수없이 반복적인 작업을 한 뒤 세 종류를 최종적으로 놓고 신중하게 선택했겠다.
 
전봉준의 동상이 건립된 뒤 나흘 지난 2018년 4월 27일 오후 종각 맞은편 영풍문고 앞 전옥서 터를 찾아 지나가는 이에게 부탁해 기념촬영을 했다. 많은 이들이 이용하는 인도와 지하철 출입구가 있음에도 대부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 전봉준 동상 전봉준의 동상이 건립된 뒤 나흘 지난 2018년 4월 27일 오후 종각 맞은편 영풍문고 앞 전옥서 터를 찾아 지나가는 이에게 부탁해 기념촬영을 했다. 많은 이들이 이용하는 인도와 지하철 출입구가 있음에도 대부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 정덕수

관련사진보기

 
2018년 4월 29일 서울로 갔다. 판문점에야 당장 못 가더라도 종로야 작정하면 왜 못 가겠는가. 마침 두릅을 비롯해 이때 시작되는 산나물을 부탁한 이가 있어 택배가 아닌 직접 가져다주기로 작정하고 나섰다.

서울에 도착해 지하철로 을지로3가에 내려 종로를 향해 걸었다. 청계천3가에서 종각을 어림잡아 동아일보 방향으로 거슬러 걷다 종각으로 향했다. 거기에 동상이 있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1855~1895)의 사진을 바탕으로 건립된 동상은 4월 하순의 막 피어난 나뭇잎들과 묘한 대비를 이뤘다.

전봉준이 41살의 젊은 나이로 죽음에 이르러 남긴 유시(遺詩)를 떠 올려 본다.
 
시래천지개동력(時來天地皆同力)
운거영웅불자모(運去英雄不自謀)
애민정의아무실(愛民正義我無失)
위국단심수유지(爲國丹心誰有知)

때가 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를 내라.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일 뿐 나에게는 과실이 없나니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리.

십수 년 전 함양을 갔을 때다. 고부군수로 있을 때 학정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봉기하게 했던 조병갑의 선정비가 거기 있었다. 그리고 조병갑은 물론이고 그 시대 불과 몇 달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했던 자들의 선정비와 송덕비들도 봤다. 이 선정비와 송덕비들은 삼남 지방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고르게 남아있다. 그들이 과연 각 고을의 실정이나 제대로 파악했을까 싶은 짧은 기간을 머물고 떠나며 세워진 송덕비나 선정비는 또 다른 수탈의 증거 아닐까.

말 그대로 부임과 동시에 자신의 치적을 후세에 전할 비를 세우는데 사용할 적당한 돌부터 찾게 했겠다. 그리고 글 좀 제법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담은 치적부터 적게 하고 새기도록 하지 않고서야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런 풍토 속에서 일본까지 야욕을 드러내며 백성들의 원성은 자연스럽게 높아갔고, 전봉준과 같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봉기하는 동기가 됐다. 1차 봉기는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 이란 배경으로 탐욕을 일삼던 고부군수 조병갑으로 인해 시작됐다면, 2차는 일본을 몰아내고 나라의 안위를 위한 봉기였다.

조병갑과 관련해 봉기하게 된 동학농민운동사를 여기 옮기기보다 따로 이야기하는 게 옳겠다.

전봉준이 동학의 접주로서 농민운동을 전개했고, 123년이 지나 그가 교수형을 당한 바로 그 날 동상이 건립된 사실이 역사다. 전봉준의 동상 비문의 글씨를 여태명 교수께서 쓰신 일 또한 역사의 한 장이다.
 
노무현 대통영 서거 8주기를 사흘 앞 둔 2017년 5월 20일 광화문광장에서 여태명 교수께서는 평소 노무현 대통령이 말씀하시던 ‘사람 사는 세상’을 차운한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를 쓰는 현장 퍼포먼스를 했다.
▲ 여태명 교수 노무현 대통영 서거 8주기를 사흘 앞 둔 2017년 5월 20일 광화문광장에서 여태명 교수께서는 평소 노무현 대통령이 말씀하시던 ‘사람 사는 세상’을 차운한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를 쓰는 현장 퍼포먼스를 했다.
ⓒ 정덕수

관련사진보기

 
여태명 교수는 촛불이 광장을 가득 채워 밝히던 그때, 매회 오전부터 광장에서 누구보다 먼저 커다란 붓을 잡고 글로써 민중의 열망을 썼다. 혼탁한 세상을 맑히려는 몸짓, 여태명 교수의 붓이 그려낸 글씨체는 민중의 함성으로 보였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오기를 열망하는 민중의 염원이 담긴 몸짓으로 보였다.

과격한 언어도, 과장된 몸짓 하나 없이 두 손으로 움켜잡은 붓 한 자루에 듬뿍 찍어 하얀 천에 써나가는 한 획 한 획에 오롯이 민중의 열망을 담아냈다. 어떤 함성보다 큰 울림이 있었다. 두 손으로 움켜잡은 붓은, 그때도 여전히 거짓으로 일관된 언론들의 모순을 깨트리는 창이 됐다.
 
탄핵기간 매주 토요일과 3·1절 등 광화문광장에 촛불이 밝혀지던 날이면 세종대왕 동상 뒤에 어김없이 설치되던 길이 10m에 높이 3m의 가벽 두 개가 있었다. 여긴 그날의 촛불문화제와 관련된 대형 걸개그림들이 걸렸고, 때때로 현장에서 여태명 교수와 정고암 전각가, 박방영 작가, 김성장 서예가 등 여러 작가들이 현장 작업을 보여줬다.
▲ 여태명 교수 탄핵기간 매주 토요일과 3·1절 등 광화문광장에 촛불이 밝혀지던 날이면 세종대왕 동상 뒤에 어김없이 설치되던 길이 10m에 높이 3m의 가벽 두 개가 있었다. 여긴 그날의 촛불문화제와 관련된 대형 걸개그림들이 걸렸고, 때때로 현장에서 여태명 교수와 정고암 전각가, 박방영 작가, 김성장 서예가 등 여러 작가들이 현장 작업을 보여줬다.
ⓒ 정덕수

관련사진보기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 명예는 충분히 채워지겠다. 굳이 광장에 나와 행동하지 않더라도 신문 한 귀퉁이에 그의 생각만 적당히 밝혀도 대단한 힘이 발휘된다. 고생스럽게 무시로 영하를 오르내리는 광장에 먼 거리를 달려오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명 교수께서는 토요일 오전이면 어김없이 광장에 섰다. 거의 매번 광장 바닥에 비닐을 깔고 길게 풀어 고정한 흰 천이 바람에 광폭한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때마침 광장에서 활동하던 최병수 작가에게 부탁해 누름쇠로 쓸 무거운 쇠뭉치들을 빌려다 천을 고정했다. 그 천이 여태명 교수에겐 한 장의 화선지가 됐다.

때로는 길이 10m 높이 3m의 광장 설치물에 고정한 흰 천 한 부분이 화선지를 대신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태그:#여태명, #촛불문화제, #전봉준 동상, #광화문 미술행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고, 그보다 더 많이 생각한 다음 이제 행동하라. 시인은 진실을 말하고 실천할 때 명예로운 것이다. 진실이 아닌 꾸며진 말과 진실로 향한 행동이 아니라면 시인이란 이름은 부끄러워진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