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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무죄 규탄 대규모 집회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 1심 무죄 선고에 항의하는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과 시민들이 18일 오후 서울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었다.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 1심 무죄 선고에 항의하는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과 시민들이 18일 오후 서울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었다. 2018.818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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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한국사회를 들썩거리게 한 사건으로 '미투'를 꼽는 데 주저하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거대한 물결이 있었다는 점만을 기억한다면 미투는 사건으로서 소비되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미투가 보내온 신호가 무엇인지 살피며 각자의 자리에서 변화에 도전하는 것은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다. 미투에 대한 응답은 이어져야 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반차별운동은 무엇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까? 세계여성의날이 다가온다는 걸 핑계 삼아 숙제를 시작해본다.

미투가 남긴 숙제  

미투는 성폭력 피해경험에 대한 말하기라는 점에서 오래 전부터 있었던 성폭력 피해생존여성들의 말하기와 이어져 있다. 이들의 말하기는 피해를 호소하고 가해를 고발하는 것을 넘어서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왔다. 김학순과 김부남과 김지은의 말하기가 드러낸 현실에서 같은 점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다른 점을 찾는 것이 필요한 이유도 그것이다. 그들의 용기와 뒤따른 연대가 남긴 변화의 씨앗을 소중히 기억하려면 더욱.

흔히 성폭력은 성차별의 구조로부터 비롯되므로 성차별에 맞선 더욱 근본적인 싸움과 변화가 이어져야 한다고도 주장된다. 그러나 차별이 더 근본적이므로 반차별운동이 이어져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할 생각은 없다. 성폭력과 성차별은 따로 있지 않다. 성폭력이 성차별의 한 현상이자 성차별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는 점에 오히려 주목해야 한다.

'혐오의 피라미드'가 보여주듯 차별과 폭력은 하나의 스펙트럼에 놓여 있으며 이를 구분하는 경향은 피해의 경중을 따지며 피해자의 말하기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성폭력에 맞서는 싸움이 바로 성차별에 맞서는 싸움이다.

이 글에서는 성폭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 함께 살펴야 할 세 가지를 짚어보고 싶다. 성폭력에 맞서기 위해 다른 모든 차별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는 점, 미투의 과제를 이어가기 위해 노동구조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 미투의 말하기에서 말하기 이상을 살펴야 한다는 점. 조금 더 들여다볼수록 반차별운동에 어떤 도전이 필요한지도 분명해질 듯하다. 이것은 아마 미투운동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차별에 맞서려면

모든 차별은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은 새삼스럽지만 대개는 추상적인 수준에서만 동의되는 데 그치곤 한다. 그래서 공통의 과제로 여겨지지는 않는 편이며, 장애여성이나 나이가 어리거나 많은 여성들이 겪는 문제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안희정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 주장과 1심 재판부 판결은 모든 차별에 반대할 때에만 각각의 차별에 대해서도 맞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안희정과 1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어리지도 않고 장애가 있지도 않고 학력이 낮지도 않은 여성'이라며 피해를 부정했다. 이런 논리는 그간의 성폭력 사건 판결에서 반복되어온 것이기도 하다. 덕분에(?) 성폭력 피해생존여성이 청소년이거나 장애가 있을 때 유죄 판결을 받기 그나마 수월했던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장애여성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취약'하므로 '저항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근거한 판례들은 장애여성에게도 장애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따져묻는 이유가 됐고, 모든 여성이 '저항했다는 증거'를 제시하도록 하는 인식틀을 강화해왔다.

피해생존여성이 일정한 연령 이하인 경우 강간으로 간주하는 '의제강간 연령'도 마찬가지다. 스쿨미투의 흐름을 이어간 청소년들은 성폭력을 고발하기도 했지만 미성숙하다며 청소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억눌러왔던 사회를 고발한 것이기도 하다. 청소년은 '말할 수 없다'는 전제는 선거권 연령 문제와 성폭력 사건 판결에서 이어진다.

장애나 연령 같은 특정한 조건이 성관계에 '동의할 능력'을 제한하는 것으로 여겨 '저항의 증거' 기준을 완화하는 것보다, 어떤 여성이든 '동의할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 '동의의 결여'를 성폭력의 구성요건으로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처럼 '동의하지 않았음'을 결사적으로 밝히는 것이 여성이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기 때문이다.

작년 7월 스웨덴은 <성관계 동의법(sexual consent legislation)>을 통해 '부주의 강간(neglignet rape) 및 부주의 성학대(negligent sexual abuse)'라는 항목을 신설했다고 한다*. 상대가 성관계 및 성접촉에 자발적이지 않음을 인식해야 하는데도 그것을 게을리하여 상대가 원치 않는 성적 행위에 연루된다면 그 역시 폭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거꾸로 성폭력의 구조에 관심을 기울일 때 다양한 차별에 맞설 더 많은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성폭력은 성에 대한 폭력이 아니다. 삶에 대한 폭력이 성을 통해 자행되는 것이다. 성관계에 동의할 능력을 자신의 삶을 결정할 역량의 한 요소로 보자. 장애인이 '신체적,정신적으로 취약하다'는 전제는 자립생활에 대한 권리를 기각하는 핑계가 되는데, '시설에 살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 한 누군가 시설에 거주해야 하는 상황을 차별로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동시에 '동의할 능력'이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사회적 역량이라는 점도 분명해질 것이다.

여성들이 일하는 세계가 일의 세계

여성주의자들이 반복해서 말하지만 늘 무시되는 진실 중 하나는 대부분의 성폭력이 '아는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점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17년 상담통계에 따르면 성인의 경우 직장 내 관계가 가장 많았다*. 일로 얽힌 '아는 관계'일수록 가해자는 굳이 물리적으로 강제하지 않더라도 피해자를 제압할 수 있게 된다. 대부분의 피해자가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서야 자신의 폭력 피해를 고발할 수 있게 되는 이유도 그것이다.

2018년의 미투나 그에 앞선 #ㅇㅇ계_성폭력 고발의 흐름에서 주목해야 할 것 중 하나는 여성들이 '일'하는 세계다. 미투는 폭력을 고발하기 위해 일하는 세계를 떠나는 대가를 더이상 치르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여기에 응답하기 위해 일터에서 성폭력/차별을 없애는 과제로 충분할까?  

일터에서의 성폭력은 주로 '성희롱'을 통해 조명되어 왔다#. 성희롱을 신고하고 대응할 수 있는 법제가 마련된 지 20년이 흘렀지만 피해를 주장하고 권리를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자가 많았는데 여기에는 젠더 인식의 부족함 외에 다른 원인도 있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되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가 사실상의 사업주에게 성희롱을 당하거나, 판매 업무를 맡은 감정노동자가 고객에 의해 성희롱을 당하는 경우 등이 그렇다. 설령 법의 적용을 받는 경우라도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이 종료되어버리거나 5인 미만 사업장이라 해고당하고도 항의할 수 없거나 기업의 불이익조치가 '인사조치'로 인정돼버리거나 하는 상황은 문제제기를 어렵게 만들었다**.

미투는 젠더의 문제이자 노동의 문제다. 미투는 여성이 일터에서 겪는 폭력이 성희롱에 그칠 리 없다는 진실을 드러낸 한편, 성폭력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노동의 구조도 바꿔야 함을 보게 했다.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특별조사단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중 70.6%가 '프리랜서'라고 답했다***.

문화예술계의 특성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일하면서 겪는 문제를 기존의 고용/근로계약 관계에 기반을 둔 접근으로 해결하기 점차 어려워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일터의 성차별 구조, 즉 여성에 대한 채용과 승진 차별, 성별임금격차 등을 바꾸기 위한 도전만큼 '일'이 누군가를 착취하기에 더욱 효과적인 형식을 갖추는 것에 대응하는 활동이 중요하다. 여성의 노동 문제는 언제나 노동 문제 그 자체다. IMF 경제위기를 떠올려보면 여성은 먼저 해고당했고 먼저 비정규직이 됐고 더 많이 최저임금이라는 상한선에 갇혔다.

노동이 위계를 생산하고 강화하는 고리가 되는 한 성차별은 사라지기 어렵다. 위계는 언제나 차이를 타고 흐르기 때문이다. 성차별뿐만 아니라 인종, 장애, 연령 등을 이유로 한 차별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구조를 그대로 두고 차별만 시정하는 전략은 이미 미끄러져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별에 맞서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방식의 변화는 차별의 모습으로 가장 먼저 드러난다. 이주노동자가 최저임금을 적용받지 못하거나 여성노동자를 먼저 외주화하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운동이라면 소수자의 노동현실을 살펴야 하고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는 운동이라면 노동현실을 바꾸기 위한 싸움에 도전해야 한다.

말하기 이상인 말하기

미투는 '말하기'다. 누구나 살면서 어떤 방식으로든-음성으로, 손짓으로, 문자로 등등- 말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미투의 말하기가 말하기 이상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2018년 1월 30일부터 5월 30일까지 전국의 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된 상담일지를 분석한 보고서는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폭로'하거나 법제도를 이용한 고소에 이르지 않더라도 '미투하였다/하겠다/하고 싶다'고 표현했음을 보여주었다*. 이때 '미투'의 용례는 누군가의 말하기로 '힘을 얻고' 누군가에게 '처음 말함'이라는 공통점을 가졌다. 그러므로 미투에 응답하려면 누군가 말하기 어렵게 만드는 조건을 밝히고 그것을 바꾸기 위한 고민을 이어가야 한다.

성폭력 피해경험을 말하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다*.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다면 어려움을 무릅쓰고 말해야 할 까닭이 없다. 거꾸로 말하면, 사회는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에 나서지 않으며 말하기를 후회하도록 만든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 시작했다는 이유로 공격을 당하기까지 한다.

(그 법적인 형식이 '역고소' '무고죄'다.)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 '내가 드러날까 두려워서'는 성폭력 피해생존자뿐만 아니라 소수자의 말하기를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다. 소수자들이 제기하는 문제란 언제나 사회가 고수하려는 틀을 흔들기 때문에 사회는 문제제기 자체를 수용하지 못한다. 폭력/차별이 있음을 인정하고 바꾸기 위한 대안을 경합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차별이 '없음'을 확인시키려고 한다.

젠더폭력을 "각 개인에게 여성이나 남성과 같은 특정 젠더 범주를 지정하고 이렇게 지정한 젠더에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강압하는 일상의 실천"으로 해석하자는 제안****은  누군가 말하기 어렵게 만드는 조건을 들여다보는 데 도움을 준다.

'해군 성폭력 사건'에 대한 반동적인 판결에 피해생존여성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가해자인 해군 장교가 의도했듯 사회가 지정한 자리를 벗어난 여성을 단죄하려는 의지가 있지 않고서야 무죄 판결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여성'이라는 역할을 강압하기 때문이라고 관점을 전환한다면, 어떤 정체성들에 본질적 속성이 있는 것처럼 접근하는 시선이 누군가의 말하기를 억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애인인데 당당하네?' '어린데 주관이 뚜렷하네?' '다른 나라에서 왔는데 한국말 잘하네?'와 같은 시선들이 칭찬이 아니라 말하기를 가로막는 말들일 뿐이라는 것. 말하기 위해 '무결'함을 증명하도록 하는 사회에서 여성을 향한 폭력에 이유를 다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말하기의 자격을 요구하는 사회를 바꿔야 한다.

미투는 '달라질 것 같아서'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미투는 과거의 성폭력 피해경험 말하기일 뿐만 아니라 '달라질 때까지 싸우겠다'는 선언의 말하기임을 기억해야 한다. 피해경험과 싸우겠다는 선언 사이에는 자신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자신의 언어를 얻는 과정이 필수적인데 이 과정에서는 '듣는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소중한 변화의 기회를 누군가의 용기에 기댈 것만이 아니라면 우리가 이어가야 할 숙제는 '듣기'에도 있다. 누군가의 말하기를 '있는 그대로' 듣는 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어떤 정체성이나 경험은 사회의 특정한 위치로 우리를 배치시키며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란 언제나 각자의 위치에 제한당한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 듣기 위해서는 다짐만이 아니라 훈련이 필요하다. 반차별운동은 이런 듣기를 촉진하고 그럼으로써 더욱 많은 말하기를 북돋는 역할을 해야 한다.

말하고 듣는 자리로서의 차별금지법  

차별 당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더 잘 이해할까? 그렇지 않다. '차별당한다'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기 어려운 조건과 위치에 놓인다는 것이고, 서로 다른 위치를 살피거나 이해하기는 더욱 어려운 고립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차별운동이 서로 다른 경험을 가로지르고 나누는 자리가 되는 힘은 역지사지 같은 도덕이나 교차성 같은 이론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을 듣기 위해 먼저 스스로 변화하는 실천으로부터 나온다.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반차별운동의 자리는 여러 차별에 맞서는 운동의 총합이거나 총론이기보다는 여러 차별 경험이 마주치고 겨루고 기대는 자리다.

서로 다른 차별 경험은 내가 겪는 차별 경험을 해석할 언어를 쥐어주며 결국 우리가 어떤 사회를 살고 있는지 깨닫게 한다. 미투가 그렇듯 말하기가 시작될 때 이미 그것은 개인의 경험에 대한 말하기를 넘어선다. '또 다른 피해를 막겠다'는 '공익제보'이자 문제와 해결책을 밝히고 제시하는 '탐사보도'와 같은 것이다. 피해자의 말하기를 피해의 호소로만 들으며 피해를 판정하려는 듣기의 태도는 피해자가 말하기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한 변화의 기회를 내다버리는 것이다. 반차별운동의 자리가 소란스러울수록 우리는 세상을 바꿀 더 많은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성폭력 관련 법제도가 미투의 모든 과제를 수렴할 수 없듯 차별금지법 제정이 반차별운동의 유일한 과제일 수는 없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더라도 법을 비껴나는 말하기와 듣기의 자리는 필요하다. 그러나 공식적인 말하기와 듣기의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필수적이며 이미 있는 자리들을 흔드는 것이 중요하다. 비정규직 차별 법제가 오히려 차별과 착취를 보증하는 문제를 살피며 '차별'의 언어가 노동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하고, 성폭력이 '성적인 폭력'으로만 해석되는 것을 흔드는 거점으로서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야 한다.

질문의 방향을 바꾸며 권력을 허무는 실천이라는 점에서 미투운동은 차별금지법제정운동과 닿아있다. 서로 다른 조건에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두 운동의 만남은 우리가 지금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꿈꾸게 하는 가능성을 열지 않을까?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한 숙제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 김보화, '생존'의 말하기:성폭력피해 상담일지의 의미와 분석, <'미투'가 말한 것 말하지 못한 것> 토론회 자료집, 2019.1.29.
# [필자 주] 놀리거나 추근거린다는 뜻의 '희롱'은 여성이 겪는 괴롭힘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문제를 가볍게 여기게 만드는 효과가 있으므로 '성적 괴롭힘'이 더욱 적절한 언어지만 현행 법제도가 규정하는 언어를 그대로 쓴다.
** 권박미숙, 뜨거운 #MeToo와 무력한 성희롱 법제도 사이에서, <바꿀 것은 성희롱 법제도 너머에 있다> 포럼 자료집, 2018.4.27.
*** 신희주, 성평등 일터를 위하여-문화예술분야, <#미투운동, 법을 바꾸다> 포럼 자료집, 2018.11.1.
**** 루인, 젠더 개념과 젠더 폭력, <<미투의 정치학>>, 교양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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