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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 5시 전용 열차를 타고 평양역을 출발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약 60시간 예정으로 중국대륙을 종단해 하노이로 이동한 과정을 두고,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과 닮은 꼴 행보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일성도 1958년과 1964년 열차 편으로 베트남을 방문했다. 지도자의 외국 방문이 드문 나라에서, 할아버지 외모를 빼닮은 손자가 동일한 나라를, 동일한 방식으로 방문하니 그런 평들이 나올 만도 하다.

김정은은 외모나 말투뿐 아니라 리더십에서도 김일성을 닮은 면이 있다. 군대에 비해 노동당을 훨씬 중시한다는 점도 그렇다. 제2대 김정일과 달리 제1대 김일성과 제3대 김정은은 당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더 중시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당을 중심으로 국정 운영한 김정은
 
백두산 중국측 영역에서 찍은 사진.
 백두산 중국측 영역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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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개정된 현행 북한 헌법 제11조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북한은 이 조문대로 노동당을 공화국 정부의 상위에 두므로, 김일성·김정은뿐 아니라 김정일도 노동당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노동당을 중시하는 게 김일성·김정은의 공통점이라고 해서, 김정일이 노동당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김정일 시대에는 노동당이 비교적 위축됐을 뿐이다.

김정일 때는 당대회나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리지 않았다. 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원의 결원도 보충되지 않았다. 이렇게 당의 비중을 낮춘 것은 1990년대의 동유럽 공산권 붕괴에 더해 1993년의 제1차 북·미 핵대결이라는 비상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군대를 앞세우는 선군 정치로 난국을 돌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북한 전문가 진희관·진희권의 논문 '김정은 시대의 현지료해 연구'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90년대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김일성 사망, 경제위기, 핵개발로 인한 대외관계 경색 등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상황이라는 외적 요인과, 반대 및 대안세력이 부재한 유일지배체제와 김정일의 조직장악 능력과 카리스마라는 내적 요인이 결합한 결과, 선군 정치라는 독특한 정치형태가 탄생하게 되었다."
-'21세기 정치학회'가 2015년 발행한 <21세기 정치학회보> 제25집 제3호.
 
1990년대의 특수 상황 때문에 비대해진 군부의 비중을 낮춘 당사자는 다름 아닌 김정일이다. 2009년 1월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된 직후부터 김정일은 이 작업을 개시했다. 자기 때 비대해진 군부를 자기가 친히 약화시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너무 강력해진 군부를 그대로 물려줄 경우, 김정은이 부담을 느낄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그래서 김정은을 위해 노동당에 힘을 실어주는 작업을 벌인 것이다.

이때 김정일은 신중을 기했다. 군부가 막강해진 상황에서 갑자기 당에 힘을 실어주면 반발이 생길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오극렬·이영춘·이영호 같은 친(親)김정은 세력을 중심으로 정부와 군부를 개편한 다음에 노동당을 강화하는 순차적 접근법을 구사했다. 김정은 세력이 군부와 정부를 일단 장악하도록 해놓은 뒤 그 여세를 몰아 노동당을 강화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김정은은 할아버지처럼 당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 정상적인 공산주의 시스템 속에서 나라를 이끌 수 있게 된 것이다. 1980년 이후 열리지 않았던 당대회가 2016년 열린 것은 김정은과 노동당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은둔의 지도자'에서 벗어나다

김정은은 정책결정 방식이 공식적이라는 점에서도 김일성을 닮았다. 김정일이 비공식 라인을 통한 의사결정을 선호한 것과 대조된다. 김정은의 북한에서는 김일성 때처럼 시스템 정치가 중시되고 있는 것이다. 임재천 고려대 교수의 논문 '북한 지도자 리더십 비교'는 이렇게 말한다.
 
"김정은 시대에는 당 정치국이나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통해 중요한 정책들이 수립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일성 시대와 유사하며, 비공식 회합을 통해 정책을 결정한 김정일 시대와는 많이 다른 점이다."
-조선대 사회과학연구원이 2014년 발행한 <동북아 연구> 제29권 제1호.
 
2000년 6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앞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구라파에서 나를 은둔 생활 한다고 말한다는데, 나는 그동안 외국에도 많이 다녔다"면서 "이번에 김 대통령이 찾아오셔서 나를 은둔에서 해방시켰다"는 농담을 건넸다. 이처럼 자신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김정일은 은둔자 이미지를 많이 풍겼다. 소련과 중국을 은밀히 방문한 적도 있다.

그런 아버지에 비해 김정은은 대외 활동을 비교적 활발히 하고 있다. 할아버지를 닮은 부분이다. 임재천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은밀성을 강조했던 김정일과는 달리 공식 석상에서 연설을 한다든지 현지지도에서 주민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접촉하는 모습을 보인다든지 하는 것은 김정일과는 많이 다르며 김일성과 유사하다."
  
창업의 리더와 수성의 리더,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김일성 가족사진.
 김일성 가족사진.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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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손자가 할아버지를 모든 면에서 빼닮은 것은 물론 아니다. 대조되는 면들도 있다. 지도자의 이미지라는 면에서도 그렇다. 외형적 이미지는 할아버지를 닮았지만, 이와 별도로 북한 국민들에게 비쳐지는 내면적 이미지 측면에서는 김일성과 다른 면모를 띠고 있다.

조선시대 군주들은 통치자인 동시에 철학자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경연이라는 세미나를 통해 성리학(유교 철학) 수양에 매진했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들이 각국의 왕이 되지 않는 한, 또는 오늘날 왕이라고 불리고 통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진실로 또는 충실히 철학을 연마하지 않는 한, ······ 그 나라에는 불행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대목을 연상케 하듯이, 조선시대 군주들은 성리학적 철학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데 열심이었다.

김일성도 그랬다. 주체사상이라는 철학 체계를 수립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국민들이 볼 때 그는 정치가인 동시에 사상가였다. 그가 철학자적 면모를 보유했다는 점은 주체사상 이론가인 황장엽도 인정했다. 1997년에 남한으로 망명한 그는 2006년에 펴낸 <황장엽 회고록>에서, 1960년대 초반에 김일성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주체사상을 정립하던 시기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일성은 체계적인 고등교육을 받지 못해서 학술용어를 정확하게 쓸 줄 몰랐지만, 이론은 중시했다. 그리고 실천에 필요한 이론을 나름대로 구성할 수 있는 능력도 갖고 있었다."
 
김정은의 철학적 역량은 아직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앞으로 나이가 듦에 따라 어떻게 변모할지 확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다. 지금까지를 기준으로 할 때, 김정은은 하드웨어 측면(외모·말투)에서는 할아버지와 닮았다는 것을 입증했지만 소프트웨어 측면(철학적 역량 등)에선 아직 '물음표'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차이점이 이 정도에 그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새로운 나라를 세운 창업(創業)의 리더와, 혈통을 무기로 그 나라를 이어받은 수성(守成)의 리더는 천지 차이로 다를 수밖에 없다. 국내외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자기 혈통 중심으로 권력을 구축한 사람과, 형제나 친척들과만 경쟁하면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 사이에는 국가에 대한 지식이나 관점, 권력 획득 또는 위기 극복 방식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창업의 리더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국가건설 과정을 다 지켜보고 참여하는 데 반해 수성의 리더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기회도 없으므로, 두 유형의 리더는 지식이나 관점 또는 역량 면에서 근본적 차이점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과 김정은의 차이점을 찾다 보면 한도 끝도 없게 된다.

실상은 한도 끝도 없는 차이점이 있지만, 김정은은 외모나 말투뿐 아니라 노동당 중시나 공식 라인 의존 등을 통해 할아버지와 닮은꼴임을 증명하고 있다. 거기다가 할아버지가 했던 방식대로 열차를 타고 중국을 종단하며 베트남을 방문하는 모습까지 거의 비슷하게 연출하고 있다. 그렇게, 할아버지 닮은꼴임을 내세우며 그는 북미수교, 나아가 권력 안정의 길로 전진하고 있다.

태그:#김정은, #김일성, #북미정상회담, #김정은 전용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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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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