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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대학의 예당. 좌파 민족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김원봉은 1935년 이 대학(당시는 금릉대학) 강당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난징대학의 예당. 좌파 민족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김원봉은 1935년 이 대학(당시는 금릉대학) 강당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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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강폭해져가는 일제와 싸워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민족운동진영의 통합으로 혁명역량을 강화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런데 1920년대 해외의 민족진영은 이념ㆍ지역ㆍ인맥ㆍ항일전의 방법론 등으로 산산히 조각나고 흩어져 있었다. 이념적으로 동색(同色)끼리도 갈라지고 대립하였다.

각 조직과 단체들의 결성시기와 지역, 인적구성과 긴박하게 돌아가는 대륙의 정세 등 여러 가지 상황의 복합적인 산물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적(大敵)을 상대로 하는 전선에서 분산된 조직으로는 성과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임시정부도 일부 보수우파 세력의 집단일 뿐 좌파나 중도계 인사들을 불러모으지 못한 상태였다. 윤봉길 의거 후에는 그나마 많이 달라졌지만 임시정부에는 여전히 우파 진영의 일부만이 참여하고 있었다.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규식(자료사진).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규식(자료사진).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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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뿐만 아니라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1920년대 후반기부터 중국 관내와 만주지역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1929년 12월 남만주에서 조선혁명당, 1930년 1월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동년 7월 북만주에서 독립당이 각각 결성되었다.

이러한 지역별 당조직을 하나로 묶기 위하여 김규식ㆍ안창호ㆍ이동녕ㆍ최동오 등이 중심이 되어 상하이에서 독립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중국침략이 급속도로 진전되면서는 1932년 10월 상하이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되었다. '통일동맹'은 1934년 3월 동당 제2차 대표대회에서 '단일대당(單一大黨)' 결성안이 의결되면서 통합운동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1934년 3월 1일 열린 통일동맹 제2차 대표대회는 조직을 해체하고 신당을 결성하기로 결정하면서, 4월 12일 통일동맹 중앙상무위원인 김규식, 한국독립당대표 김두봉ㆍ이광제, 조선의열단 대표 김원봉ㆍ윤세주ㆍ이춘암, 조선혁명당 대표 최동오, 김학규, 만주 한국독립당과 한국혁명당이 통합한 신한독립당 대표 윤기섭ㆍ이청천ㆍ신익희 등 11명이 통일동맹 3차 대회를 열고 민족혁명당 창당을 의결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에 큰 방점이 찍히는 최대 규모의 좌우연합 정당인 민족혁명당은 이같은 과정을 거쳐 1935년 6월 20일부터 7월 3일까지 중국 난칭시 긍릉대학 대례당에서 창당대회를 열어 독립운동 진영의 오랜 숙원을 현실화시켰다. 거기까지에는 진통이 적지 않았다.

좌우익 통일전선 정당인 신당의 당명은 조선의열단 등 좌익 쪽에서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주장했고, 한국독립당 등 우익 쪽에서는 한국민족혁명당을 주장해서 일치하지 않았다.

절충을 거듭한 결과 중국 쪽에 대해서는 한국민족혁명당으로, 국내 민중에 대해서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해외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Korean Revolution Association으로, 그리고 당내에서는 그냥 민족혁명당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약산 김원봉 장군 약산 김원봉 장군은 1920년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열단’을 창설한 인물이다. 1930년대엔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운 뒤 애국지사를 직접 길러냈다. 이후엔 항일운동의 선봉을 맡았던 조선의용대를 창설, 총대장을 맡았다. 일본은 약산에게 지금 가치로 320억 원 이상의 현상금을 걸었다.
▲ 약산 김원봉 장군 약산 김원봉 장군은 1920년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열단’을 창설한 인물이다. 1930년대엔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운 뒤 애국지사를 직접 길러냈다. 이후엔 항일운동의 선봉을 맡았던 조선의용대를 창설, 총대장을 맡았다. 일본은 약산에게 지금 가치로 320억 원 이상의 현상금을 걸었다.
ⓒ KBS 다큐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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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이 민족혁명당의 주석으로 선임되었다. 다양한 계파가 참여한 민족혁명당 창당의 주역들이 이념과 노선을 뛰어넘어 포용력이 있고 의회주의자인 그를 대표로 선임한 것이다. 실권자는 당세가 강한 의열단의 김원봉이었으나 당대표는 김규식이 맡았다.  

민족혁명당은 「당의(黨義)」에서 "본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서 구적(仇敵) 일본의 침탈세력을 박멸하고 5천년 독립 자주해온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여 정치ㆍ경제ㆍ교육의 평등에 기초를 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며, 국민 전체의 생활평등을 확보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고 선언했다. 조소앙의 3균주의 원칙을 수용하였다.

민족혁명당의 「강령」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민족혁명당 강령

 1. 일제의 타도와 한국의 독립.
 2. 봉건적이고 반혁명적인 세력의 숙청과 민주정권의 설립.
 3.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경제제도의 말살과 모든 서민이 평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경제제도의 확립. 
 4. 군(郡) 자치제의 확립.
 5. 국민개병(國民皆兵).
 6. 평등한 선거 및 피선거권의 확립.
 7. 언론ㆍ집회ㆍ출판ㆍ조직 및 종교의 자유. 
 8. 남녀평등.
 9. 토지의 국유화와 농민에 대한 토지분배.
 10. 대기업체와 독점기업체의 국유화.
 11. 국가적 경제계획 제도의 확립.
 12. 노동의 자유.
 13. 누진세 제도의 확립.
 14. 의무교육.
 15. 양로원, 탁아소 및 구제기관의 국영.
 16. 민족반역자와 국내 일본인 재산의 몰수.
 17. 전세계 피압박민족 해방과의 긴밀한 연락과 협조.


민족혁명당은 창당이념을 민족혁명과 민주주의혁명을 동시에 수행하여 '조선혁명을 완성'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이어서 민족혁명은 '일제 식민지통치의 전복과 민족자주 정권의 건립'을, 민주주의혁명은 '봉건유제의 완전 숙청과 인민자유정권의 건립'을 내세웠다.

또한 '혁명원칙'은 "민족의 자주독립 완성, 봉건제도 및 반혁명세력의 숙청과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건설,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剝削)하는 경제제도의 소멸과 민족 각개의 생활상 평등의 경제조직 건립"이었다. 

민족혁명당은 대일투쟁과 독립에만 국한하지 않고, 멀리 해방 후의 민족ㆍ민주국가 건설을 내다보면서 건국 방략의 청사진을 내걸었다. 이것은 임시정부가 일제 패망 직전에 제시했던 「건국방략」의 모태 역할을 하게 된다.

민족혁명당은 근대정당의 구색을 두루 갖추고 출범하였다.
정책, 당장(黨章), 당보(黨報)를 만들고, 당가(黨歌)를 제작하여 각종 행사 때에는 게양하고 합창하였다. 『민족혁명당 당보』는 여러 차례 발간되다가 『민족혁명』으로 개제하여 간행했다. 현재 이들 당보는 남아 있지 않고 일제 정보 자료에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금릉대학교(현 난징대학교) 김원봉 장군은 금릉대학에서 수학한 뒤 신흥무관학교를 거쳐 의열단을 만들었다.
▲ 금릉대학교(현 난징대학교) 김원봉 장군은 금릉대학에서 수학한 뒤 신흥무관학교를 거쳐 의열단을 만들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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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혁명당 정책

 1. 국내의 혁명대중을 중심으로 하여 내외의 전민족적 혁명전선을 결성한다.
 2. 국내의 무장부대를 조직하여 총동원을 준비한다.
 3. 적의 세력에 아부하는 반동세력을 박멸한다.
 4. 국외의 무장부대를 확대강화한다.
 5. 해외 우리 민족의 총단결을 촉성한다.
 6. 우리 혁명운동에 동정 원조하는 민족 및 국가에 대해서는 이와의 연결을 도모한다.


민족혁명당가

1. 일심일의 
   굳은 단결
   민족혁명당
   우리당은
   우리 민족의 전위
   희생 분투 유혈은
   우리들의 각오
   나가자 혁명정신으로.

2. 우리 동지 높이 드는 깃발 아래
  전진하는 역사에 발 맞추어라
  강도 일본은 타도하여 땅을 되찾고
  세우자 자유의 신국가를.


김규식이 민족혁명당을 떠난 후 당은 심각한 내분으로 진통을 겪었다.

1936년 2월 조소앙이 탈퇴하고, 1937년에는 최동오ㆍ홍진ㆍ이청천 등 만주 출신의 조선혁명당 계열이, 1938년에는 최창익 계열이 이탈하면서 민족혁명당은 김원봉이 주도하는 의열단 계열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로써 당초의 좌우연합체는 다시 깨어지고 분열로 나타났다.

1937년 7월 7일의 중일전쟁 발발을 앞두고 중국대륙은 폭풍전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일제는 대대적으로 군사력을 증파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중국 국민당정부와 공산당세력은 제2차 국공합작을 이루고 있었으나, 여전히 서로의 주적은 일제가 아닌 동족의 반대세력이었다.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거 후 상하이를 탈출하여 가흥ㆍ진강 등지를 거쳐 국민당정부를 따라 난칭에 머물고 있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난칭을 떠나 장사ㆍ광주ㆍ삼수ㆍ유주ㆍ귀향ㆍ준의를 거쳐 충징에 이르렀다. 흩어졌던 좌우진영은 얼마 후 임시정부로 통합하여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게 된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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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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