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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서지현 검사의 성폭력 고발로 시작된 '미투 운동'에 많은 남성들이 당황했다. 미투는 단순히 성폭력 가해자를 단죄하는 것을 넘어서, 성폭력을 용인하고 방조했던 남성 중심사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남성들은 "미투가 지겹다"는 말 등으로 미투 운동에 균열을 내려 했으며, 이후에는 '피해자다움'을 근거로 '진짜 미투', '가짜 미투'를 자의적으로 판별하려고 했다.

미투 운동은 남성 중심적 성 문화를 흔들었지만, 역설적으로 기존의 성 문화가 얼마나 공고하게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를 구축했는지 알려줬다. 특히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김지은씨와 '비공개 촬영회 성폭력'의 피해자 양예원씨가 겪고 있는 극심한 2차피해는 '미투 이후'에 대한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미투 혁명'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서 한국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책 <미투의 정치학>은 "미투 운동의 성장을 기록하고 이후를 모색"하기 위해 '연구모임 도란스'(권김현영, 루인, 정희진, 한채윤)가 쓴 책이다. 네 명의 저자들은 미투 운동을 둘러싼 여러 쟁점과 인식론을 분석하며, 일상적인 성폭력을 은폐시켜온 통념들에 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미투의 정치학>은 지난 1년간 각계에서 벌어진 미투 운동 중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사건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안희정 사건'은 한국 사회가 성폭력을 바라보고 다루는 방식의 전형이 잘 드러난 경우였다. 또한 2심 이후에도 그의 부인 등 안 전 지사 측의 여론전이 펼쳐지며 '논란'을 만드는 상황에서 이 텍스트는 중요하다.
 
 책 <미투의 정치학> 겉표지
 책 <미투의 정치학> 겉표지
ⓒ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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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언제나 '피해자'에게 물었다

'안희정 사건' 재판을 방청해온 권김현영은 '꽃뱀 담론'을 내포한 진영론과 '여자 문제'라는 프레임이 안 전 지사를 옹호하는 수단이 됐다고 지적한다. "안희정 쪽 변호인단은 이 사건을 최대한 '불륜'으로 몰아갔고, 피해자의 정치적 성향을 의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장"했다. 더불어 1심 재판부 역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의심하고 추궁해, '피해자 재판'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안희정 사건'은 가장 사회의 주목도가 높은 '권력형 성범죄' 재판이라는 점에서 중요했다. 수많은 미투들이 이 범주에 포함되며, 재판부가 위력의 여부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다른 재판은 물론 사회적 시선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안희정 사건' 1심 재판부는 "위력이 존재하지만 남용하지 않았다"며 위력의 행사를 부정했다.

이에 대해 권김현영은 "위력은 매일 매 순간 행사됐다. 다만 행사되는 방식이 그때그때 달랐다"고 반박한다. 김지은씨의 일관된 주장에 따르면 안 전 지사는 수행비서에게 단답형 단어로 지시했고, 언짢은 기색을 메시지 세 개의 점(...)으로 표시했다. 김지은씨는 안 전 지사에게 "너는 나의 기억보조장치"라는 말을 들었다고 법정에서 진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위력의 존재와 행사를 '쪼개버리고', 김지은씨에게만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남성중심사회의 오래된 질문을 던졌다.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
 
"1심 재판부는 안희정이 아니라 김지은에게 물었다. 당신처럼 고학력의 스마트한 여성이 어째서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았냐고. 하지만 김지은은 일관되게 진술했다. 네 번 모두 명시적으로 동의한 적이 없고, 거부의사를 표현했으나 무시당했다고. 이것이 바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방법이 아닌가."  (72p)

얼마 전 KBS2의 설날특집 예능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박원순 서울시장 출연분이 논란이 됐다. 특히 무릎 수술을 두 번이나 하고, 발목에 통증을 느끼는 비서관이 군말 없이 박 시장의 새벽 마라톤에 동행하는 장면이 논란이 됐다. 심지어 비서관의 부인이 박 시장에게 "(남편이) 걱정된다"고 이야기하자, 오히려 비서관은 "마라톤 좋아하는데 왜 그런 불편한 이야기를 시장님께 하냐"고 대꾸하기까지 했다.

이 방송을 본 대부분은 사람들은 박 시장이 '갑질'을 한다고 비난했다. 비서관에게 "왜 아프다고 말 못했냐"고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같은 위력의 행사였지만 대중의 반응은 '안희정 사건'과 사뭇 달랐다.

이유는 무엇일까? 한채윤은 여성에게 '정조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미 강간죄의 보호법익은 1995년도에 '정조'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변했다. 이를 두고 한채윤은 가해자가 동의를 구하려고 했는지가 아니라, 피해자가 '얼마나 저항했는지'를 중요시하는 법적 관행이 항거 불가능성을 지닌 '위력'을 간과한다고 지적한다.
 
"가부장제가 만든 강력한 정조 이데올로기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원하지 않는 성관계는 최선을 다해 거부할 것이라고 전제한다. 마치 기계가 스위치만 누르면 작동하듯 여성은 정조를 지키려고 본능을 작동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런 까닭에 법은 거부의 행동은 즉각적이고 동의는 침묵으로도 표현된다고 이해하며 항거 불가능성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다룬다." (136p)
   
한채윤은 '성적 자기결정권' 역시 '성관계의 동의 혹은 거부 행위' 자체로 오용될 것을 우려한다. "남자와 여자에게 다르게 작동되는 사회의 성 규범이 승낙 형식 자체에도 영향을 미쳐 남성 중심적으로 사건을 해석하게" 될 수 있어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미국의 사례를 예시로 든다. 미 일부 주에서는 성폭력 사건 발생 시, 가해자가 피해자의 '명시적인 동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피해자가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가해자가 존중했는지'가 성폭력 사건의 판단 기준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서부지법앞 항의시위 '안희정이 무죄면, 법원은 공모자' 14일 오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성폭행 혐의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가운데 페미당당, 불꽃페미액션, 한국여성단체연합, 녹색당 등 여성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오후 7시부터 서울 마포구 서부지법앞에 모여 '안희정이 무죄면, 법원은 공모자다' '한국남성들은 오늘 성폭행 면허를 발부 받았다'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지난해 8월 14일, 당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성폭행 혐의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가운데 페미당당, 불꽃페미액션, 한국여성단체연합, 녹색당 등 여성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오후 7시부터 서울 마포구 서부지법앞에 모여 "안희정이 무죄면, 법원은 공모자다" "한국남성들은 오늘 성폭행 면허를 발부 받았다"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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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식론'이 필요하다

정희진은 여성이 겪는 성적 폭력은 '여성이라면' 겪는 상시적인 일이지만, 그것을 드러내려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미투 이후에도 '가해자에게 할 질문을 피해자에게 하는 상황', '조사를 가장한 피해자 비난', '통념에 근거한 여론 재판', '피해자다움의 증명 요구'는 여전하다는 뜻이다.

그는 미투 운동이 여성에 대한 폭력이 결코 사소화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렸지만, 현실적인 한계도 있다고 설명한다. 현재 미투가 젠더 폭력의 극히 일부인 '유명한 가해자, 수많은 피해자, 문단 등 특정 커뮤니티의 관행, 미디어를 통한 폭로, 가해자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피해자보다 압도적인 경우'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가정폭력과 성 판매 여성에 대한 폭력은 미투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가정 폭력은 '집안일'로 간주되므로 남성 사회의 이해관계와 얽혀 있지 않아서 '피해자'로서의 지위를 얻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정희진은 "젠더가 '여자 문제'나 '여성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모순이면서 권력 관계"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미투의 이해에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젠더화된 사회' 속에서 남성들이 새로운 '성 역할'을 받아들이고, 궁극적으로 남성사회가 변화하는 것이 진정한 미투 혁명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루인은 '트랜스젠더퀴어'가 겪는 폭력을 언급하며 '개인에게 특정한 젠더 범주를 지정하고, 젠더 역할 수행을 강압하는 것'으로 젠더 폭력을 재해석한다. 이와 같은 개념은 아내가 '성별화된 정체성과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발생한 '아내 폭력'처럼, 기존의 젠더 폭력 개념과도 만난다.

특히 "'여성'이 겪는 폭력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이어야 해서, 여성으로 환원되면서 발생하는 폭력이 아닌지 재검토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미투 이후 페미니즘 운동의 방향에 있어서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김지은씨의 추천사

<미투의 정치학>은 원래 김지은씨의 글을 실을 계획이었다. 실제로 김씨는 당사자의 경험을 살려 원고지 150장이 넘는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재판이 진행 중인 점을 고려해 최종적으로는 책에 원고를 싣지 않기로 했다. 대신 김씨는 책 뒷면에 추천사를 썼다.
 
"성폭력을 당하고 사람과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됐다. 미투는 마지막 외침이었다. 이 싸움의 끝에 정의가 있기를 바란다.

(...) <미투의 정치학>을 계기로 또 다른 가해자를 막고, 현재의 피해자를 위로할 수 있는 마법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아마 그가 말하는 '마법'은 미투 운동을 지지하고, 김지은씨를 지지했던 많은 이들의 바람과도 일치할 것이다. 부디 <미투의 정치학>이 미투 이후의 공론장을 만들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했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 <미투의 정치학>(권김현영, 루인, 정희진, 한채윤 지음/ 정희진 엮음/교양인/2018.02/1만 2000원)


미투의 정치학

정희진 외 지음, 교양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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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마이뉴스 박정훈 기자입니다. stargazer@ohmy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