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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0월 5일 (둘째 날) - 착한 막내 동생

어젯밤에는 잡다한 꿈을 꾸었다. 16mm 영화가 상영되는 게 나오고, 내가 대학을 1학년을 마쳤다가 2학년 때 어떤 사유로 학점을 못 따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는 게 나오고, 그 문제로 갈등하고 불안해하던 내 모습이었다. 이상하게도 어머니 꿈은 꾸지 않았다. 아침에는 아버지께서 손수 차리신 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밥을 몇 수저 드시더니 또 다시 그릇을 그대로 들고나가 개(세파드 잡종)에게 갖다 주었다. 어머니는 겨우 세수를 하고 나더니 가만히 있질 못하고 마당에서 계속 움직이셨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1년전 고향집의 모습
▲ 내 고향집(2010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1년전 고향집의 모습
ⓒ 이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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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그런 어머니를 보며 한 마디 하셨다.

"뒤 안(뒤뜰)을 스무 바퀴만 돌아!"

그러자 어머니는 아버지 말대로 뒤뜰을 두 바퀴 정도 도시다가, 또 다시 마루를 닦더니 밖으로 나가시려고 하였다. 이미 대문을 열쇠로 잠가 뒀기 때문에 어머니는 대문 앞에 서서 계속 문을 열려고 애썼다. 내가 다가가니, "문을 열어야지" 하고 웅얼거리셨다. 할 수 없이 문을 열어 드렸다. 밭에 가신다고 어머니는 머리에 수건까지 쓰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를 부축해 동네를 가로질러 우리 밭으로 모시고 갔다. 지나가던 동네 아주머니께서 안 돼 보이는지 혀를 찼다. 어머니는 아직 마르지 않은 밭의 이슬 길을 걸었다. 그 밭은 어머니가 평생 고구마 등 농작물 기르고 가꾸던 곳이다. 나는 어머니와 그 밭 주위를 한 바퀴 돈 뒤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 막내 말로는 어머니는 매일 그 밭에 가신다고 했다. 그래서 하루는 그곳에 주저앉은 어머니를 막내가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피곤해서 방에 누우신 듯하더니, 다시 일어나 마당으로 나와 뭔가 일거리를 찾으시다 '션듀'라는 쥬스를 마시고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신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수건을 머리에 쓰시더니, 또 대문을 열고 나가려하시며, 나에게 "문 열어 주라!"라고 계속 얘기하신다.

아버지께서 '그냥 열어 주라'로 하자, 나는 다시 어머니를 모시고 또 밭을 한 바퀴 돌았다. 저 쪽 길에서 평소 친했던 동네 아주머니가 "박실댁!'하고 어머니 택호를 불렀지만, 어머니는 별다른 반응도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 오셨다. 어머니는 땀을 흘리시며 잠시 누워계시다 일어나 이것저것 먹고 마셨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노래를 부르며 어머니에게 따라 부르라고 했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 집이여..."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란 노래는 아버지 회갑 때 아버지가 부르시던 애창곡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징용에 끌려가 고생하시고, 6.25전쟁 때는 참전 군인으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신 아버지는 술 만 드시면 그 노래를 부르시곤 했다.

그 노래를 어머니가 웃는 듯 우는 듯한 목소리로 따라 부르신다. 아버지가 노래 부르다 말고 갑자기 나에게 '너 결혼 언제 할래?'라고 물으셨다. 나는 뭐라고 대답을 못했다. 31살이지만, 아직 감독 데뷔도 못하고, 백수나 마찬가지인 나로선 결혼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논이 있는 조성평야의 동네앞 전경
▲ 고향 들판 우리 논이 있는 조성평야의 동네앞 전경
ⓒ 이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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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오늘도 끊임없이 '논에 가자' '밭에 가자' 고 중얼거리거나, 아버지나 내가 하는 말을 반복해 따라하곤 하셨다. 나는 그때 비로소 한 인간이 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때 그 본인뿐 아니라, 그 주변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깨달았다.

어머니가 초점 없는 눈빛으로 중얼거리며 뒤뜰을 돌고 계신 모습은 정말 가련하게 보였으나, 더 이상 어제처럼 감상적으로 보며 슬퍼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간 나까지 미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나가려고 하시는 어머니에게 나는 대문을 열어 줄 수 없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나에게 '쇠때(열쇠) 주라!'고 반복해서 말하셨다. 너무 애처로웠다. 오늘 아버지는 논에 갔다 오셨을 뿐, 방 안에 누워만 계셨다. 나도 답답해서 작은 방에서 책을 보다가 간혹 내다보면 어머니는 계속 나가려고 대문 앞에 서 계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멀거니 마루에 서서 바라보며 서 있기도 했다.

시골 고등학교에서 태권도 선수인 막내 동생은 늦게까지 운동하다 밤늦게 집에 들어왔다. 그 막내가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에 난 감동했다. 나는 나보다 13살이나 어린 그 막내 동생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보아왔다. 그런 막내가 어머니를 안방 아랫목에 눕히며 '자, 엄니, 자세(주무세요), 잉' 하며 다독거린다.

오랜 시간을 겪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귀찮아하거나 지겹다는 표정을 하지 않고, 항상 다정다감하게 어머니를 어린 아이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대했다. 어머니가 그 막내를 업고 다독거리며 키운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어머니가 그런 막내아들의 보살핌 아래 잠드시다니... 어제는 내가 어머니를 옆에 끼고 누웠지만, 오늘은 막내가 나란히 누워 어머니를 재워드렸다. 나는 지친 나머지 작은 방에서 누워 잠들었다.
 
당시 아버지 52세, 어머니 47세, 막내동생 7살
▲ 막내와 함께한 부모님(1977년) 당시 아버지 52세, 어머니 47세, 막내동생 7살
ⓒ 이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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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0월6일 (3일째) - 어머니의 설거지, 그리고 추석

오늘은 무척 좋은 날씨다. 어제에 비해 어머니가 밖에 나가시려는 의욕이 덜 하신 것 같아 나도 편했다. 아침엔 어머니가 직접 설거지, 개밥 주는 일, 닭 모이 주는 일, 마루 닦기 등 일상적인 일을 서투르고 느릿한 몸짓으로 하셨다.

물론 설거지는 모두 내가 다시 해야 했다. 그동안 더러워진 수건도 빨아서 널었다. 어제 어머니가 '썬듀'라는 쥬스를 자주 찾았다는 걸 생각하고, 아랫집 구멍가게에 가서 션듀 3개와 베지밀 하나를 샀다. 먼 친척 할아버지인 그 가게 주인 어르신은 '니 엄니가 참...' 하면서 어머니를 걱정해 주셨다.

나는 문득 빨리 서울 올라가서 시나리오에 전념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떠한 불행이 주변에 닥쳐도 자신의 일을 절대 소홀이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점심을 위해 라면을 끓였다. 요즘은 시골이라도 연탄이나 가스레인지는 다 갖추고 사는 듯, 우리 집에도 가스레인지가 있어 요리하기 편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라면을 드시지 않았다. 어제와 달리 밖에 안 나가시고 마루에 누워 계시곤 하였다.

나는 작은 방에 누워 자다가 잠시 나와 보니 마루에 어머니께서 주무시고 계셔서 내가 덮던 이불을 들고 가 어머니께 덮어 드렸다. 모처럼 나도 휴식 시간을 갖고, 감나무에 열린 홍시 감을 따먹기도 하는데, 동생이 일찍 돌아왔다. 시골에 온 지 며칠 만에 모처럼 동생과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둘러보았다.

해질녘 집에 돌아오니, 리어카가 마당에 놓여있었다. 아버지 말로는 어머니께서 밭에 콩 베러 가시려고 헛간에서 끌어 내놓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또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은 뒤 수건을 둘러매고 '똘뚝(밭)에 가자!' 하신다. 모시고 나가고 싶었지만, 어머니 옷차림이 너무 후줄근해 보여 방안으로 모시고 들어왔다. 션듀 빈 봉지를 자꾸 빨대로 빠시는 걸 보고 동생에게 베지밀과 썬듀를 더 사오게 해서 어머니께 드렸다.
 
동네 친구분들과 어머니, 당시만 해도 밝고 건강하셨다.
▲ 돌아가시기 1년전 여행 가신 어머니(가운데)  동네 친구분들과 어머니, 당시만 해도 밝고 건강하셨다.
ⓒ 이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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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친척이신 애평댁께서 내일이 추석이라며 떡을 해 가져 오셨다. 우리는 추석 명절을 위해 아무 준비도 하지 못했다. 광주에 사는 둘째 형님이 내일 아침 일찍 떡을 해올 거라고 한다.

어머니는 자꾸 개에게 먹다 남은 빵이나 떡을 개밥그릇에 담아 주었다. 개는 어머니가 오면 좋아서 꼬리를 흔들곤 하였다. 그 개는 쇠줄에 항상 묶여서 좁은 공간을 왔다 갔다 하는데, 그 모습이 집안에서 밖에 못 나가고 안에서 맴도시는 어머니 모습과 겹쳐져 안타까웠다. 마을 회관에서는 추석맞이 콩쿨 대회를 한다고 노랫소리로 요란스럽다. 저녁 늦게 서울에서 큰 형님이 왔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다

어머니와 함께한 3일간을 기록한 내 일기는 여기서 끝났다. 다음 일기는 일주일 후 서울 충무로에 있는 영화사에 시나리오 들고 찾아 간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는 4일째 되는 날 서울로 올라 온 것 같다.

당시는 요즘처럼 요양원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어머닌 항상 시골집에만 머물며 아버지와 막내 동생, 그리고 간간히 들리는 광주 둘째형 및 형수님의 돌봄을 받고 계셨다. 고향을 떠난 나는 계속 서울에서 공립 도서관에 다니며 시나리오 쓰느라 여념이 없었다. 물론 어머니 걱정 때문에 집중이 잘 안되어 힘들었지만... 다음 일기는 시골에서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고서야 다시 시작됐다.

(*다음 편에 계속)

[남을 울린 내 영화, 나를 울린 어머니 ①] 
내 영화에도 눈물 안 났는데... 당신만이 저를 울렸습니다
[남을 울린 내 영화, 나를 울린 어머니 ③] 어머니 생전에 한번도 못해본 말, 이제야 합니다

태그:#어머니, #대흥마을, #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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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세종대영화예술학과 교수/ 영화는 나, 우리, 사회,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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