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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광주학생운동 90주년이 되는 해라, 항일운동기념사업 추진이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실제 정부는 지난 2018년 7월 대통령 소속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공식 출범하고, 적극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완도군 또한 일제강점기 함경도 북청과 부산 동래와 함께 항일운동 3대 강성지, 항일운동의 성지(메카) 등으로 불렸던 곳이다. 완도군은 이번 100주년 기념사업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며 100주년 기념행사와 3·15 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 항일운동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대중적인 행사도 중요하지만, 항일운동사 연구나 관련 학술대회 등을 지원하거나 미완의 항일운동역사로 남아 있는 '완도군 항일운동사' 내용을 보완해 개정·증보판을 다시 편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완도항일운동과 관련한 집단적인 자료 수집의 시초는 소안 선열들의 항일운동 역사 기록들을 발굴·정리해 발간한 '소안항일운동사료집'으로 사료된다. 해방 후 이념 대립이 격화되면서 후손들이 비극을 맞고, 특히 좌익계열 독립운동가를 부모로 둔 이들이 자랑스러운 선열의 역사를 숨기면서 항일운동의 빛나는 역사가 잊히게 됐다.

80년대 이른바 '연좌제'가 풀리고 나서 기억 밖으로 밀려난 소안의 항일운동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에 이르러서였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소안 항일운동의 역사가 잊혀져 간 것을 안타까워하던 소안노인회에서 1990년 '소안항일운동사료집'을 발간한 것이다.

'소안항일운동사료집' 이후 본격적인 완도항일운동사를 정리한 책은 차관훈 군수시절 완도군의 지원을 받아 2000년 발간한 '완도군 항일운동사'다. 이 책은 최초로 완도군 전역의 항일운동을 담아 정리하기 위한 역사편찬 작업으로, 완도 고장 사람들의 자부심을 담은 기록이다.

1998년 설립된 (사)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가 펴낸 이 책에는 완도의 항일운동과 관련한 ▲사진기록 ▲지도자 ▲항일노래 ▲관련논문 ▲재판기록 ▲신문기사가 충실히 담겼다. 

1998년 (사)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를 직접 전남도에 사단법인으로 등록하고, '완도군 항일운동사' 편찬에도 관여한 배철지 전 사무국장과 편찬위원장을 맡은 정병호 선생은 "완도항일운동사를 편찬하는데 고 김진택 회장의 자료수집과 박찬승 전 목포대 교수(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의 역할이 컸다"고 회고했다.

이어 "특히 박 교수가 나주항일운동사를 연구하다가 장석천 선생 등을 연구하다 소안 항일운동사를 발굴해 책을 발간하고 학문적 연구도 계속해 나간 점은 완도항일운동을 정리하는데 큰 보탬이 됐다"고 말했다.

군 예산도 6천만 원이나 지원되는 등 대대적인 항일운동 역사 정리 작업이었다. 편찬과정에서 자료집 출간을 위해 애쓰다 (사)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 김진택 회장이 고인이 되기도 했다. 모두 선열들의 소중한 업적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안타까움을 지닌 채 지내오다가 기회를 만나 분투한 결과가 바로 '완도군 항일운동사'였다.

자랑스런 항일운동 편찬 작업이었음에는 틀림 없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다시 살펴보면 아쉬움이 존재한다. 당시 정병호 편찬위원장도 편집 후기로 "아직 발굴하지 못한 재판기록과 참고문헌의 미비를 여백으로 남겨둘 수 밖에... 시간의 제한에 묶여 노화, 청산, 신지 등의 관련조사 논문이 빠지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남긴 부분이 그렇다. 또, 3·1 만세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다는 내용적인 논란도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고금의  3·1 만세운동이다. 완도읍과 소안에서 3월 15일 완도읍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3월 하순경 신지도 차종화·청산도 출신 김우진 선생이 완도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했으나 정보가 누설돼 모두 구속되는 바람에 시위가 무산된 재판 기록이 있다.

고금의 3·1 만세운동인데, 당시 재판기판 기록을 기반으로 1년 뒤인 1920년에 전개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광주학생운동 주동자 중 한 명인 민족운동가 이기홍 선생이 당시 고금 만세 현장에 있으면서 1919년 5월경 현장을 목격한 것을 유고집의 기록으로 남겨놔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다. 이기홍 선생의 유고집의 내용은 당시 고금의 만세운동 현장을 자세하게 기록해 굉장히 신빙성 있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완도항일운동사를 다시 정리하려면 중심 단체가 필요한데, 현재 단체가 유명무실한 것도 큰 난제다. (사)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이대욱 회장은 "완도군 전체적인 항일운동 기념사업을 위해서는 완도군 항일운동기념사업회가 재건돼야 한다. 기념행사의 저변을 넓히는 차원에서 3·15 만세운동의 경우도 신지, 고금, 약산 등 주민들과 완도읍에서 크게 재현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라며 '완도'라는 영역으로 항일운동 기념사업을 추진해 나갈 단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 완도로서는 미완의 완도군 항일운동사를 정리해 나가는 출발점에 서 있다고 보여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3.1운동, #항일운동, #완도, #3대 강성지, #완도항일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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