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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 위에 사람이 있다
 굴뚝 위에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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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텍을 처음 알게 된 때는 작년인 2017년 11월 12일 전국노동자대회 아침이었다. 전날 여의도 전야제 때만 해도 아무 일이 없었는데 다음 날 새벽에 목동 서울에너지공사 열병합발전소 75m굴뚝에 노동자 두 명이 올라갔다는 소식이 퍼졌다. 그로부터 404일째 되는 날, 금속노조 충남지부 파인텍지회 다섯 사람을 만나러 갔다.

김옥배 수석부지회장
 
김옥배 금속노조 충남지부 파인텍지회 수석부지회장
 김옥배 금속노조 충남지부 파인텍지회 수석부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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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선은 늘 가장자리로 맴돈다.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람, 소리 없이 움직이는 사람, 티 나지 않게 일하는 사람, 단식농성장에서 그런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김옥배는 1977년생으로 2002년 12월에 한국합섬에 입사했다. 그에게서 한국합섬에서부터 스타플렉스, 스타케미칼, 파인텍까지의 역사를 들었다. 12년간의 싸움이었다.

파인텍은 한국합섬으로부터 시작한다. 1987년에 설립된 한국합섬은 경상북도 구미시 공단동에 있는 직물 폴리에스테르 제조업체였다. 1994년 11월 3일 민주노조 역사를 세운, 노조원 800여 명의 회사는 이후 무리한 합병, 분할, 회생 등을 거치다가 2007년 4월에 파산했다. 자본이 떠난 빈 공장을 500여 명 남은 노동조합원들이 지켜냈다. 3년을 버텼더니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기업이 나타났다.

2010년 10월, 스타플렉스는 노조원 104명을 승계해 자산가치 870억 원인 한국합섬을 399억 원에 인수했다. 2013년, 스타케미칼이라는 자회사로 바꿔 재가동했다. 당시 신입사원 68명 포함 조합원 168명이었다. 그러나 스타케미칼은 2014년 5월 26일 폐업을 했고, 희망퇴직을 거부한 28명을 해고했다. 다음 날, 차광호 지회장은 스타케미칼 45m 굴뚝에 올라 사측과 합의를 보고 408일 만에 2015년 7월 8일 땅으로 내려왔다. 3년 투쟁에 28명이 11명으로 줄었다.

당시 스타케미칼 주식회사와 전국금속노동조합의 합의서를 보면 회사는 별도의 법인을 설립하여 11명을 고용승계하고 최저임금+1,000원을 초임으로 하고,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노조의 활동을 존중하고 보장하며, 단체협약은 2016년 1월 내 단체교섭을 진행하여 체결하기로 했다.

스타케미칼의 모 기업인 스타플렉스는 2016년 1월, 아산에 '파인텍'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노조원들은 구미에서 아산으로 이동해야 했기에 11명 중 가정이 있는 3명이 올 수 없었다. 8명이 도착한 곳은 원사도 직물 생산도 아닌, 생산된 천을 천막으로 조립 공정하는 공장이었다.

20년 된 중고기계는 처음 보는 것이었고, 생활보장을 위해 제공한다던 기숙사란 곳은 가구 하나 없는 방이었고, 가족 떠나 생활하는 직원들에게 제공되는 식사는 점심 한 끼였다. 그날 그들이 직면한 자본의 야박하고 몰상식함에 대한 참담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최저임금에서 천 원 더한 시급 7030원으로 수당과 상여금 없는 월급은 보험료 빼면 100만 원 남짓이었다. 8명 중 3명이 어쩔 수 없는 가정사 때문에 또 떠났다. 한 달 내 한다던 단체교섭이 열 달이 되도록 이루어지지 않자 2016년 10월, 다섯 명은 합의 불이행으로 파업을 했다.

그런데 그때 촛불집회가 시작됐다. 그래서 그들은 '박근혜 퇴진 광화문 캠핑촌'에 입성했다. 박근혜 퇴진과 구속 이후에도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휴업 중이던 회사는 2017년 8월 30일 기계를 반출했으며 임대기간도 연장하지 않았다. 다섯 명이 돌아갈 곳은 사라졌다.

2017년 11월 12일, 마침내 홍기탁과 박준호는 75m 굴뚝에 올랐다. 그들이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을 택한 건 스타플렉스 본사가 1.9km 거리 CBS건물 15층에 있기 때문이었다.

(주)스타케미칼 대표는 김세권 사장이고 신설법인 파인텍 대표는 (주)스타케미칼 전무이사인 강민표다. 강민표 전무이사는 김세권 사장의 친척이자 (주)스타플렉스의 창립멤버라고 한다. 파인텍지회 노조는 스타케미칼이 있던 구미도, 스타플렉스가 있는 음성도 아닌, 아산에 공장을 덜렁 차려놓고 다섯 명의 노조원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지 않고 단체협약조차 이행하지 않는 실세인 김세권 사장에게 합의한 내용을 지키라고, 즉 결자해지하라고 한다.

파인텍지회 다섯 명은 페이퍼 컴퍼니 같은 파인텍 말고 모 회사인 스타플렉스 공장으로 직접 고용해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500명이 아닌 5명의 일자리를 확보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측은 노동자 300여 명 중 과반수이상이 이주노동자인 스타플렉스에 이들이 들어가면 금속노조지회가 생길 게 뻔하니 전면봉쇄하고 있는듯 하다.

크리스마스이브 도보행진 후 밤 8시 반, 굴뚝 아래 문화제에서 김옥배가 사회를 보았다.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수줍은 그가 느릿한 목소리로 마이크를 잡고 나설 수밖에 없는 건, 위로 세 선배가 고공투쟁과 단식중이니 막내를 빼면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음 날 409일째 고공농성 진료 중 굴뚝 아래 방송 인터뷰도 오롯이 그가 감당해야만 했다. 그의 귀여운 얼굴에 눈가 주름이 눈에 띄었다. 2002년 12월 한국합섬에 입사한지 만 16년이 지났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래 세 명이 모두 단식에 돌입하면 위의 두 명까지 들어갈까 봐 그와 조정기가 굴뚝 위와 아래의 모든 바라지를 감당하고 있었다.

조정기 총무
 
조정기 금속노조 충남지부 파인텍지회 총무
 조정기 금속노조 충남지부 파인텍지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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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굴뚝 아래 농성장에서 오른쪽 팔꿈치를 소독하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상처가 꽤 심했다. 전기장판 없이 침낭에서 핫팩 두 개 끼고 잤는데 핫팩이 맨살에 닿아 3도 화상을 입어 이식수술을 해야 할 상태였다. 대구사람으로 1982년생인 그는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00년 3월에 실습생으로 한국합섬에 입사했다. 어언 30대 후반으로 넘어가고 있는 그는 인생 절반을 거리에서 보냈다. 왜냐고 물었다.

"정 때문이요. 그리고 정당성. 못 떠나서, 떠날 수 없어서요. 의리 때문이라고 하기엔 많이 늦었죠."

승리를 확신한 적은 없지만 운동사적 승리로 전례를 남기고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서 라고도 했다. 포기하기엔 멀리 왔다고.

다음 날인 12월 21일 오후 5시에 <마음은 굴뚝같지만>책을 사러 다시 농성장으로 갔다. 문을 열었더니 수녀님과 신도님과 그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벌써 굴뚝위로 밥을 올린 후였다. 구룡마을에서 빈민선교를 하시는 이루시아 수녀님은 매월 금요일 식사당번을 하시느라 굴뚝 위 두 사람의 식성도 알고 계셨는데, 박준호는 소시지를, 홍기탁은 나물과 된장을 좋아한다고 하셨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고공농성 408일 도보행진 때 조정기는 선두에서 차광호지회장을 태운 승합차를 운전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오후 2시 반쯤, 굴뚝으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최규진과 청년한의사회 김지민, 나승구 신부님과 이동환 목사님이 올라갔다. 싸락눈을 맞으며 기다리는 동안 조정기에게 몇 가지 물어보는데 목소리가 이상했다. 2~3일째 감기를 앓고 있다고 했다. 하루 두 번, 오전 10시와 오후 5시에 음식과 물품을 굴뚝으로 올리고 내리고, 다녀가는 무수한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고, 집회 준비와 회의 등 이 상태로 가다간 건강이 버텨내지 못할 게 훤했다. 그부터 병원에 데려가고 싶었다.

두 시간여 진료가 끝나고 아래 위 동시에 기도회가 진행되었다. 다시 네 분이 올라갔던 사다리를 되밟아 내려왔다. 그리고 보고가 이어졌다. 먼저 의사의 소견이었다.

"의학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분 스스로 양호하다고 했습니다. 청진기를 대려고 윗옷을 올렸는데 뼈밖에 없었습니다. 활력징후 안 좋고, 혈압, 혈당 모두 너무 낮습니다. 당장 건강 검진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의료진으로서 간곡히 요청합니다. 빨리 내려와서 건강검진 받을 수 있도록 시민여러분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이어진 한의사 소견은 다음과 같았다.

"굴뚝이 원형이라 기울어서 잠을 자니 다리 펼 공간이 없습니다. 박준호 씨는 허리통증을 호소합니다. 공장에서 굴뚝 사용할 때마다 떨림이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어느새 울음이 터져버린 나는 내내 울었다. 바보 같은 나는 그들이 괜찮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다. 견딜 만하다고 해서 정말 그런 줄 알았다. 그 둘과 통화한 건 2, 3일 전이었다.

홍기탁 전 지회장
 
굴뚝 위에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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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2일 토요일, 밤 9시 5분. 홍기탁과 통화를 시작했다. 먼저 고공생활을 물었다.

"육체적으로 가장 괜찮을 때는 잠잘 때, 힘들 때는 운동할 때. 운동하지 않으면 허리와 무릎이 굳어서 하기 싫을 때도 오전 오후 한 시간씩 운동이 필수다. 배변은 추워서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하는데 기온이 영하 6~7도로 내려가면 소변을 봐도 떨어지면서 고드름이 된다. 샤워 대신 물티슈로 닦는데 물티슈도 얼면 새 걸 보내줘야 닦을 수 있다. 버너로 물을 끓여 머리를 감고 나면 얼고 발을 씻어도 살얼음이 생긴다.

몸은 더러워도 주변 환경은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 겨울에 좁은 공간에서 국이라도 쏟으면 큰일이라 조심해야 한다. 침낭 안에 핫팩 두 개를 넣으면 5~7시간은 온기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머리와 얼굴은 호흡 때문에 침낭 안에 들어갈 수 없으니 춥다. 12월초 온도가 영하 15~17도, 1월에 영하 21도까지 내려가던 작년 겨울엔 정말 추웠다. 올가을에 비닐을 보강해서 바람을 좀 더 막았다.

정신적으론 어떤 날은 기분이 좋기도 하고 어떤 날은 잡생각이 나서 하루하루 따질 수가 없다. 위에서는 기사를 많이 검색하는데 가장 분노가 치밀어 오른 때가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출소하던 날이었다."

그는 촛불정국 이후 뻔뻔스런 정치인들과 묻혀버린 적폐청산 등에 대한 울분을 털어놓았다.

상주가 고향이고 18대 종손에 1남 4녀 중 넷째인 그는 1995년에 구미공단 게시판에 난 상여금 최고에 3교대인 한국합섬에 지원했다. 필기와 면접에 합격했다. 첫 직장이었다.

그런데 수습기간 후 12월에 산재사고가 났고 1996년 4월, 38일간 옥쇄파업을 했다. 38일 동안 그는 한 번도 공장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경찰들이 정문에서 쇠파이프를 들고 들어오고 헬기로 최루탄을 뿌렸다. 1996년 5월, 노동자 두 명이 분신을 했다. 구류도 살았다. 첫 경험이 '의리'였다. 파산한 한국합섬을 지키던 5년 동안 가장 힘들었다. 그 때 함께 마지막까지 공장을 지켰던 7명 중 차광호와 조정기와 자신이 있었다.

5명 중 차광호와 홍기탁은 기혼자이고 홍기탁은 자녀가 셋이다. 6천만 원에 분양받은 첫 아파트를 팔아서 빚 갚고 임대주택으로 들어갔다. 남은 800만 원으로 1년 반을 살았다. 보험 안 들고 학원 안 보내고 고향 상주에서 주말에 농사일 돕고 가져온 쌀과 고춧가루 등으로 생활하니 가능했다. 네 살부터 아홉 살까지 아빠의 투쟁을 본 큰딸이 현재 고등학교1학년, 아들은 중1, 막내딸은 초등학교 6학년이다.

2016년 1월, 파인텍에서 기본 생계비도 안 되는 세후 100만 원의 월급을 받았다. 1월 29일 첫 상견례를 하고 2차 본 교섭이 2월 첫째 주였다. 사측은 공장 돌아간 지 20일만에 적자라고 했다. 기계도 제품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원사 만들던 사람들에게 다 만들어 놓은 천 붙이는 작업을 시켰다. 5월 이상 못 넘어갈 것 같다고 했다.

애초에 정상적으로 공장 경영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파인텍 설립부터 휴업 및 기계반출, 임대종료까지 상식적이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플렉스 김세권 사장의 합의는 법에 저촉되질 않는다. 누구를 위한 법인지 모를 법망을 빠져나가서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지적하니 그가 말했다.

"승리의 개념이 많습니다."

그는 기다리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감나무에 감이 열리면 누가 감을 먹을까요? 첫 번째로 감나무 주인이 따먹겠죠. 그 다음에 감 밑에서 입 벌리고 있다고 그 감이 떨어질까요? 자본가가 나무를 통째로 뽑아갑니다. 기다리면 다 뺏깁니다."

홍기탁은 차광호가 고공에 올라가 있던 지난 408일간 전국을 뛰어다니면 운동하던 때가 더 힘들었다고 했다. 지금도 단식하고 있는 차광호 지회장, 옥배와 정기가 더 힘들 거라고 했다.

"버티는 건 어려움 없습니다."

하지만 내려오면 제일 먼저 동지들과 함께 굴뚝에 오르기 전에 갔던 영덕에 놀러가고 싶다고 했다. 두 시간여 통화로 만난 그는 정치·경제 부문에 박식했고 물음에 막힘이 없었고 때론 우문현답을 했으며 논지를 재치 있고 매끄럽게 잘 펼쳐나갔다.

박준호 사무장

12월 23일 일요일, 그가 늦은 아침식사를 마쳤을 때쯤 전화를 했다. 홍기탁과 동갑으로 1973년생인 그는 대학 졸업 후 다른 직장에 다니다 자형의 권유로 2003년 서른한 살에 4조 3교대하는 한국합섬에 입사했다. 함께 다니던 자형은 2013년 폐업하면서 퇴사했는데 왜 지금까지 남아있느냐고 물었다.

"함께해 온 동지들 봐오면서 사람들을 저버리지 못한 거죠. 의리,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요."

힘든 점은 장기화되면서 노동의 기본권이 지켜져야 하는 정당성을 가진 투쟁인데도 가족과 친구들을 설득 아닌 이해시켜야 하는 점이라고 했고, 보람은 함께 연대해 주고 힘내는 동지들이라고 했다. 장기화된 투쟁 때문에 혼기를 놓친 것이냐고 물었더니 원래 결혼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인생의 꿈을 물었다. 그가 멈칫했다. 노래를 잘 부르는데 직업으로 민중가수를 할 생각은 없냐고 물었더니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다. 내려오면 먼저 밑의 동지들과 술도 마시고 밥도 먹고 싶고 가족들도 보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최선을 다하고, 나중엔 마음 편안하고 조용한 생활을 하고 싶다고 했다.

포근한 한낮인데도 전화기 너머 그의 조근조근한 목소리 뒤로 바람소리가 휭휭 들렸다. 나흘 후 한파가 몰아친 날, 하루 종일 걱정이 돼 어두워질 즈음 문자를 보냈다. 덤덤한 그가 답문을 보내왔다. '쪼매 춥긴 춥네요.^^' 그가 더 춥기 전에 내려오게 하기 위해서 나는 밤을 새고 글을 쓴다.

차광호 파인텍 지회장
 
차광호 금속노조 충남지부 파인텍지회 지회장
 차광호 금속노조 충남지부 파인텍지회 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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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음 본 건 2018년 1월 14일 일요일 오후 1시 '파인텍(스타플렉스) 노동자 문제해결 촉구! 75m 굴뚝고공농성자 건강 및 인권상황 보고 기자회견' 때였다. 굴뚝농성 64일째였다. 현수막에는 '김세권은 고용·노동조합·단체협약 3승계 합의사항 이행하라!'고 써있었다. 차광호 지회장의 발언 중 굴뚝 위 식사 부탁이 마음에 남았다.

3월 17일 토요일, 천안 풍산공원묘역 유성기업 한광호 열사 묘에 절을 올리는 그를 보자 그동안 밥 한 번 못 싸간 게 미안했다.

4월 5일 목요일, 오후 5시 식사시간에 맞춰 음식을 싸갖고 농성장으로 갔다. 전 날 유기농산물 재료를 사고, 비 온다고 부침개 부쳐서 집에 있는 접시 다 챙겨 가느라 이틀 걸린 밥상이었다. 굴뚝 위로 식사를 올리고 아래 농성장에도 동그란 밥상을 펴놓고 함께 밥을 먹었다.

이후에도 차광호 지회장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검찰 과거사 위원회 유성사건 조사촉구 집회에도, 유성기업 전면파업 서울사무소 앞 문화제에도 그가 왔다. 뿐만 아니라 웬만한 금속노조 집회에 그는 거의 등장했다. 파인텍지회와 그는 소수 장기투쟁의 상징이었다.

10월 3일 수요일 개천절 '파인텍 일일조합원의 날'이 있었다. 마지막에 '함께할게!!'란 대형현수막에 글을 쓰는 순서가 있었는데 '힘내세요 함께할게요'라고 쓰고, 노란 손도장을 찍었다.

 
10월 3일 수요일 개천절 '파인텍 일일조합원의 날'이 열렸다. 참가자들이 마지막에 ‘함께할게!!’란 대형 현수막에 글을 쓰고 있다.
 10월 3일 수요일 개천절 "파인텍 일일조합원의 날"이 열렸다. 참가자들이 마지막에 ‘함께할게!!’란 대형 현수막에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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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2월 11일 화요일, 파인텍 4박5일 오체투지를 함께한 송경동 시인으로부터 전날부터 단식에 돌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2월 20일 목요일, 금속노조 차광호 지회장 단식 11일째, 동조단식 3일째 CBS앞 '스타플렉스 규탄 금속노조 결의대회'에서 그를 만나 악수를 했다.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는 것 외엔 딱히 무슨 말을 할 수 없었다.

2018년 크리스마스이브는 고공농성 408일째였다. CBS앞 단식농성장에 갔다. 4년 전 408일간 고공농성을 했던 차광호 지회장에게 몸은 좀 어떠시냐고 물었다. "견딜만합니다." 8kg 감량돼 71kg에서 더는 빠지지 않고 있다는 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저녁 7시에 향린교회에서 작은 기도회를 하고 성금을 드렸다. 차광호 지회장이 발언을 했다.

"참담한 심정입니다. 함께할 수 있는 게 단식뿐입니다. 최저임금 올려놓고 산입범위를 확대했고, 주52시간 근로기준법에 탄력근로제는 노동착취입니다. 대통령이 천지에서 물 떠온 날, '지역특화발전특구에 대한 규제특례법 전부 개정안'을 더불어 민주당이 날치기 처리했습니다. 그 뒤에 노동자가 떠안는 아픔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노동3권이 온전하게 이루어져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올 수 있도록 함께 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곧이어 굴뚝까지 한 시간여 도보행진을 했다. 맨 앞에는 동조단식 일주일째인 송경동 시인,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박승렬 목사(NCCK인권센터 소장)가 서고 그 뒤로 250~300명의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나승구 신부님은 구룡마을에 미사집전이 있어 함께하지 못했다.

연기가 나지 않는 굴뚝에 두 사람이 있었다. 아기 예수 누일 구유는 없는데 마굿간을 찾는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이브 밤에 굴뚝 아래에 모여 있었다.

12월 26일,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다시 그를 찾아갔다. 단식 17일째인 그의 심경을 직접 듣고 싶었다.

"참담합니다. 하루빨리 두 동지들 내려오게 하는 것을 바라고, 금속동지 단결된 힘으로 돌파해 가려고 하는데, 사회 모두 자본에 포섭되었습니다. 입법, 사법, 행정 모두 다요. 그렇지만 동조 단식해 주시는 분들 덕분에 견딥니다."

홍기탁이 알려준, 다양한 '승리의 개념'에 대해 다시 물었다. "합의여부 관계없이, 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투쟁 위에 지평이 넓혀졌기 때문입니다. 단 하루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날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에게 했던 공통 질문을 그에게도 역시 했다. 

"왜 지금까지 버티셨나요?"
"내가 처해진 환경에서 비켜서지 않은 것이죠. 어떤 삶을 살 거냐가 중요하잖아요. 나아지는 삶, 노동자 민중이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죠."


2018년 12월 27일 오전 10시 30분, 종교계의 주선으로 김세권 스타플렉스 사장과 파인텍지회의 최초 교섭이 있었다. 때마침 한파가 몰아친 날이었다. 나는 411일째 굴뚝 위에 있는 두 사람 걱정으로 하루 종일 동동거렸다. 보고 싶은 그들이 내려오면 홍기탁 씨와는 힘찬 포옹을, 박준호 씨와는 정중한 악수를 하고 싶다.

파인텍지회 다섯 사람은 다섯 손가락 같다. 차광호는 엄지로 든든한 맏형이고 홍기탁은 검지로 의리를 중시하고 박준호는 중지로 협력 관계를 유지한다. 김옥배는 약지로 사랑을 연대하고 조정기는 새끼지로 새로운 변화와 마무리를 함께 한다. 이 다섯 사람들은 500명 중 남은 1%, 한 명이 백 명 몫을 하는 일당백의 노동자들이다. 이 다섯 사람들이 다함께 영덕 바다에 곧 다시 갈 그 날을 간절히 바란다.

태그:#파인텍, #굴뚝 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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