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차별금지법",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21일 성탄절을 앞두고 위와 같은 슬로건으로 거리기도회를 진행하였다. 당일 모인 많은 사람들을 통해 예수의 정신이 결코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일부 보수개신교 단체들은 차별금지법을 왜곡하고 종교의 이름으로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는 결코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 오히려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한 세상이야말로 진정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길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정신을 담아 차제연 12월 평등UP은 성탄절을 맞아 '종교와 차별'을 주제로 한 기고글을 연재한다. - 기자말
 

  
 12월21일 시청광장에서 열린 차별금지법제정을 위한 거리기도회
 12월21일 시청광장에서 열린 차별금지법제정을 위한 거리기도회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관련사진보기

 
'황금의 입'으로 불릴 만큼 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37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톰은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와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에 맞서 바른 말을 하다가 유배당해 외로운 폰투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우리를 억압하고 나아가 죽이기까지 할 수 있는 아무리 강력한 원수라 할지라도, (인간 가치의 본질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한다"고 했다.

또 "참 교회는 국가가 떠받쳐 주는 교회에 의해 박해받는다. 사제가 자신의 교회를, 늑대가 양 떼를 해치는 것보다 더 못되게, 파괴하고 있다"고 말했다.* 타자를 차별하고 약한 자를 착취하는 제도교회에 의해 참 교회가 박해받는 사건은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그렇다면, 참된 교회들이 실천할 제자도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앞선 세대의 페미니스트이자 바이섹슈얼인 신학자 레티 M. 러셀의 <공정한 환대(여금현 역, 대한기독교서회, 2012>를 인용해 이 세계의 다양성이 있는 그대로 환대받는 기독교 공동체로서 교회적/목회적 실천이 성서의 본질적(참된) 정신으로 돌아가는 길임을 밝히고자 한다.

차이를 가로지르는 이해

레티는 교회가 자폐적이고 세속의 가치에 속박된 'of, but not in, the world(세상 밖의, 세상에 속한)' 상태를 벗어나 고린도전서 7:29-21에 나타난 바, 'in, but not of, the world(세상 속의,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사명 공동체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속적 혐오와 편견에 갇힌 채 정작 '세상' 그 자체와는 단절되어 있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안과 밖을 뒤집어내기를 성서는 요청하고 있다.

특별히 세계의 변두리에서 다양한 Misfits(맞지 않는 사람들)를 발견해 내고 그 이름을 불러 목소리를 경청하는 한편 스스로 Misfit으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것은 작은 변화의 혁명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눈에는 아무도 Misfit일 수 없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Misfits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혁명'으로 이끄는가? 불신자들 사이에도 널리 알려진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자.

인간사회가 타락하여 높은 탑을 쌓다가 하나님의 벌을 받고 세계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는 이 우화는 기술의 발전을 '교만'으로 손쉽게 등치하고 그 자리에 전근대적 가치로 돌아가자는 훈계와 꾸지람을 채워 넣는 구실로서 호출되곤 한다.

그러나 바벨탑 이야기는 보다 구조적인 인간사회의 욕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강력한 은유다. 레티는 바벨의 인간들이 단일한 언어와 정치적 구조를 수단으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강제로 균일한' 일치를 달성하려는 권력에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창세기 기자는 이 욕망에 대해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다', '하나님과 경쟁했다'는 말로 표현한다. 불행히도 바빌론과 로마와 1세계의 제국주의들에게서, 오늘날 한국사회의 지배그룹에게서 바벨의 욕망은 거듭 반복되었다.

바벨 사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균일한' 인간의 언어를 교란하고 '모든 땅의 표면'에 작은 무리로 분산시키는 것, 즉 보다 많은 차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는 처벌이자 선물이었는데, 그 이유는 지배계급에는 비극적 종말인 동시에 탑 쌓기에 동원되고 착취당했을 피지배계급들에게는 하나님의 해방의 도래로 여겨졌을 터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하나의 체계로 구축하고자 하는 제국적 욕망의 반복 속에서 인종, 성별, 성적 지향, 언어, 혹은 문화의 차이는 창조세계 속에 있는 유쾌한 다양성이라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또 중요한 저항의 방법으로 제시된다.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뒤 방언으로 이야기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모국의 언어와 관습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다. 성령의 사람은 다양성의 세계 속에서 '차이를 가로지르는 이해'를 은사로 받아 사람들을 오해와 편견에 가두는 구조를 깨뜨리고 공동체로 하여금 전적인 환대의 가능성으로 나아가게 한다.

차별과 배제를 넘어 교회를 확장하여야

한편, 구약을 토대로 한 유대-기독교 전통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선민사상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본래적 '선민'은 힘이 없는 자들의 인간적 정체성을 위한 하나님의 안배다. 즉, '아무것도 아닌(nobody) 존재'로 여겨졌던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 온전한 가치와 존엄성을 지닌 하나님의 백성/자녀로 선택되는 은혜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선택되지 못한 민족이나 인간 유형'을 배제하고 피지배 계급으로 고착하는 방식으로 기형화되었다. 이 끔찍한 왜곡이 복음서에서 어떤 방식으로 극복되는지 살펴보자.

마가복음 7장과 마태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에게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찾아갔다가 큰 모욕을 당한다. 예수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며 그녀의 요청을 거절했다. 즉, 이스라엘은 예수의 사역 대상이지만 이방 여인은 거기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여인은 주눅도 들지 않고 "주여 옳소이다. 그러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항변해 메시아의 편협함에 도전한다. 예수는 즉시 수로보니게 여인의 요구를 수용했다. 예수와 수로보니게 여인의 '차이'가 논쟁을 통해 확장되고 명징해지는 순간 레티가 "모두가 자유롭게 되기 전에는 아무도 자유로운 게 아니다"라고 표현한 전 인류적 구원과 해방의 지평이 드러난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이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재현되는 장면은 없다. 이러한 예수의 모범은 다양한 Misfit들이 차별과 배제를 넘어 용감하게 도전하고 도발해 나갈 근거인 동시에 교회가 끊임없이 자신을 열어 환대하고 포용함으로서 스스로의 경계를 확장해야 할 이유가 된다.

환대의 식탁이 차려지기를 바라며

'환대'를 뜻하는 헬라어 '필록세니아(Philoxenia)'는 '낯선 자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낯선 자를 미워함' 혹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미워함'이라는 뜻을 가진 '크세노포비아(xenophobia)'의 반대말이다. 바울은 로마서 15:7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환대하듯 우리도 서로를 환대하라'고 권면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보여주는 바, 낯선 자와 여성과 장애인과 이주민과 성소수자를 2등 시민으로 격하하거나 미워함으로써 얻는 일치감은 일시적일 뿐 아니라 비 성서적이고 비 복음적인, '손쉬운 일치'에 불과하다.

나는, 처음에는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나아지겠거니 생각했다. 교회가 차별을 선동한다는 게 얼마나 그릇된 일인지 금방 알아채고 자신들의 흑역사를 뉘우치며 괴로워할 때가 올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급격한 속도로 퍼져버리고 만 '동성애' 혐오는 교회가 책임져야 할 모든 과제를 밀어내고 제1의 프로파간다로 자리잡아버렸다. 이제 나는 솔직히 한국교회가 아무리 회개하고 땅을 치며 울어도 다시는 '차별과 혐오 없는 하나님 나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세상을 다양하고 아름답게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십자가 위에서 벽을 허물고 화해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약한 이들을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시는' 보혜사 성령 앞에 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참여하는 일련의 순례만이 가능할뿐이다.

이 순례의 실천은 크리소스톰의 인생이 그랬듯 '하나님 나라의 찰나적 완성과 최후의 실패'가 약속된 아나키즘적 전망에 포섭될 것이다. 예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던 케노시스(자기비움)에의 요청에 순종하는 급진적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느 좋은 날 척박한 절망의 자리에 환대의 식탁이 철푸덕 하고 차려지면 그곳에서 사랑하는 그대들과 나와 못나고 별나고 낯선 온갖 존재들이 깃들어 먹고 마시는 기적이 베풀어지기를 고대 해 본다.
 
주석
*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226쪽,루돌프 브랜들레 저, 이종한 역, 분도출판사, 2016.

** 교회를 '눈에 보이는 교회'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로 나누는 것은 도나투스 파를 반박하기 위해 때 사용했던 성 어거스틴의 개념과 이를 차용한 프로테스탄티즘에 기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라떼님은 목회자로서 감리교퀴어함께, 인천퀴어문화축제 비상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고글은 차제연 홈페이지 equalityact.kr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헌법의 평등이념과 포괄적인 차별금지를 실현하는 인권기본법인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자 실천하는 연대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