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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련 작가의 단편소설집 <불면 클리닉>.
 황혜련 작가의 단편소설집 <불면 클리닉>.
ⓒ 문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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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입체적이다'는 황혜련 작가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최근 나온 황혜련 작가의 첫 소설집 <불면 클리닉>(문이당 간)에 담긴 8편의 단편을 읽고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느껴졌다.
 
재미있었다.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쉽게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각 단편을 읽고 나서 잘 쓴 시 한 편을 감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글 속 주인공들의 또 다른 이야기가 머리 속에 그려지기도 했다.
 
소설은 유방암에 걸린 여자 이야기를 다룬 <팔찌>, 기르던 염소를 도둑맞은 시골부부가 등장하는 <우리 염소>, 라디오 프로그램 모니터링 일을 하는 '나'가 겪는 불면에 다룬 <불면 클리닉>, 지하 셋방에서 십자수를 놓으며 살아가는 여인이 등장하는 <깊은 숨>이다.
 
또 장애인의 섹스를 다룬 <슬픈 아다라시>, 젊은 무직자가 여인의 개 노릇을 하는 일자리를 얻지만 그 여인을 독살하고 동반 자살한다는 이야기가 담긴 <굿바이 펫>, 돈에 쪼들리는 사람들의 잃어버린 꿈을 풍자한 <왕소금 주식회사>, 가장의 보호를 받지 못한 엄마에 이어 딸도 장마당에서 전을 구워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전>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어둡거나 '은둔'이다. 인물들은 병에 걸리거나 이혼했거나 돈이 없거나, 아니면 직장도 없고, 전셋집 구할 돈도 없다.
 
"남자는 여자의 가는 팔목에 채워진 푸른 색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이제 수갑과도 같은 이 팔찌를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이다. 남자는 호주머니에 있는 금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입원 전날까지 여자가 차고 있던 팔찌였다. 여자는 집을 나서면서 금팔찌를 빼고 병원에서 주는 비닐 팔찌를 찼다"(팔찌).
 
"당연하지요. 왜 장애인은 성욕이 없다고 생각하나요? 그날 당신은 그들이 얘기해주는 장애인의 성에 대해 아주 자세히 듣고 왔을 것이다. 그 후로 당신은 젖은 내 속옷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팬티를 갈아입히고 자위도구를 대줄 뿐 더 이상은 하지 않았다"(슬픈 아다라시).
 
"달근씨는 맘먹고 돈을 모으기로 했다. 3년 작정하고 꼬박 모으면 얼추 아파트 전세자금은 나올 것 같았다. … 계획대로 일이 잘되어 3년 후 목돈을 쥐게 된다면 이제 여자가 돈 없다고 달근씨를 괄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왕소금 주식회사).

 
그래도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쩌면 힘들고 찌질하게 살지만 놓지 않는 게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유방암 수술을 해도 살 수 있다는, 장애인이 섹스를 하기 위해 여자를 부르는, 돈을 모아 전세를 얻으면 결혼할 수 있다는 것 정도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난이 하얀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무관심 속에서도 난은 질기게 살아남았던 것이다. 여자는 비로소 가슴을 열어 볼 용기가 생겼다. 여자는 남자에게 휘장을 쳐달라고 하고, 잠시 나가달라고도 했다"(팔찌).
 
"잠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활동량을 늘이고 낮에 햇볕을 쪼이세요. 우유나 대추 같은 것도 도움이 되겠네요. 그래도 안되면요. 그대로 잠이 안오면 어떡하지요? 정 그러면 불면 클리닉의 도움을 받아 보라고 권하고 싶네요"(불면 클리닉).
 
"나는 전대에 있는 돈을 몽땅 꺼냈다. 하루 벌이가 꽤 쏠쏠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난전은 다 철거되고 점포마다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미란부티크라는 옷가게로 들어가서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것으로 엄마의 옷을 샀다. 엄마 생애 최대의 호사였다"(전).

 
흔히 소설은 작가의 경험이나 들은 이야기를 담는다고 한다. 황혜련 작가가 직접 경험했건 안했건, 들었건 아니든 간에 소설은 풍부한 인물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성준 소설가는 황혜련 작가의 작품에 대해 "대단히 입체적이다. 특이하게, 기억에 각인된 인상 묘사를 즐기고, 은둔형 인물을 잘 다룬다. 1인칭에서 전지적 시점까지를 두루 쓰고 있지만 특징적으로 내적 고백에 어울리는 거리를 교묘하게 밀고 당겨 큰 효과를 보고 있다. 그 결과로 과감한 생략도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다.
 
황 작가는 "늘 세상과는 한 발 동떨어져서 살았다. 그게 안분지족에서가 아니라 천성이 게을러서임을 나는 안다. 나는 애초부터 그들의 속도에 맞출 자신이 없어서 스스로 방향을 틀고 소설 속으로 숨어들었다"며 "나는 늘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산다. 그런데 그 어두운 기억들이 소설로 정화되어 나오면서 내게 살아갈 힘을 주었다"고 말했다.
 
황혜련 작가는 1000만원 고료 '진주가을문예'(2011년)에 <우리 염소>가 당선되었고, 2013년 장편소설 <촌>으로 대한민국 디지털 작가상 등을 받았다.  

태그:#황혜련, #불면 클리닉, #진주가을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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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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