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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공무원에 임용된 후 나의 첫 발령지는 전라북도 정읍이었다. 학창시절 근현대사 수업 시간에 어렴풋이 초대 대통령의 '정읍발언'을 배워 본 기억이 나지만 여전히 나에겐 생소하고 낯선 지명이었다.

단풍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선선한 가을, 그곳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고 외로움을 함께 달래 줄 이도 없었지만 직장동료들의 정서적 지지와 격려로 인해 나는 점차 그곳 생활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지금까지 살면서 눈이 펑펑 내리고 수북이 쌓인다는 문장을 몸소 실감하는 순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출근했다. 걷는 속도가 느려지면서 주변의 사물들도 느리게 움직였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부지런한 직원들은 청사 앞 길목에 쌓인 눈들을 치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덩달아 나에게도 삽 한 자루가 주어졌다. 친절한 과장님께선 목장갑도 건네주셨다.

호남이 연고지인 사람들은 폭설로 인해 펼쳐지는 이런 광경이 익숙하나 폭설을 난생처음 겪어 본 나로선 당황스러웠다. 기술이 아닌 힘으로 삽질을 하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새로 신은 어그부츠가 눈에 흠뻑 젖어 소위 총체적 난국이 되었다.

1시간쯤 지나자 눈도 그치고 사람들이 인도를 걸을 수 있게 됐다. 상황이 마무리되자 소장님께서 내려와 수고했다며 직원들 한 명씩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주셨다.

그리고 폭설로 인한 야간 근무 시 시설보안관리에 철저를 기해야 한다는 서무계장님의 전달사항을 듣고 직원들은 다시 업무 정상화에 들어갔다.

창문 밖으로 바라본 세상은 새하얀 도화지 같았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설국의 풍경은 마치 내가 얼음왕국의 공주가 된 듯 들뜬 기분을 선사해주었다.

오후가 되자 점차 눈이 그치기 시작했고, 회색 먹구름들이 걷히고 눈부시게 시린 푸른 겨울 하늘이 펼쳐졌다.

이 산뜻한 기분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 앞에 놓인 젖은 어그부츠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 폭설에 취약할 줄 알았으면 최저가라도 구매하지 않는 건데..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책상 안쪽으로 신발을 밀어 넣었다.

퇴근 1시간 전 소장님께서 소장실로 나를 호출하셨다. 나는 옷매무새와 표정을 가다듬고 노크를 한 뒤 조심스럽게 소장실로 들어갔다.

인상 좋으신 소장님께선 오늘 엄청 눈이 내렸다며 구수한 사투리를 시작으로 아침에 어떻게 출근했는지 등 이것저것 물으시다 나에게 검은 봉지 하나를 건네셨다.

"여기가 눈이 엄청 오는데여... 잘 몰랐지? 우린 익숙한데 장 주임은 처음이라 겁나게 당황했을 거여. 이거 장화인디... 출근길에 꼭 신고 다녀. 타지까지 와서 자네가 고생이 많아.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주변에 놀러도 많이 댕기고 좋은 추억도 많이 쌓아."

환하게 웃으시는 소장님의 모습에 나는 어쩔 줄 몰라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답변으로 수줍게 인사를 하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손에 쥔 검은 봉지 안의 장화를 꺼내보았다. 내 발에 쏙 들어가는 분홍색 장화는 제 주인을 찾은 듯 반짝반짝 윤을 내며 웃고 있었다.

그날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고 분홍 장화가 감싼 내 두 발은 따뜻한 아랫목처럼 온몸에 훈훈한 온기를 전달해주는 것 같았다.

태그:#따뜻한격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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