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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을 꾸어본 적이 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꿈이 있다면, 어떤 꿈이었는가?"


"당신은 어떤 기억을 지우고 싶은가? 혹은 가지고 싶은가?"
 꿈과 기억을 소재로 한 작품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꼽는다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다. 서로 사랑했던 기억을 지우고 지워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도돌이표처럼 돌고 돌아 결국 만날 수밖에 없다는 이 낭만의 서사를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영원하고 싶은 사랑의 존재 앞에서 기억은 제 아무리 사라지려고 발버둥 쳐도 또 다른 새로운 사랑의 기억으로 싹을 틔워 내고야 만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기억을 지울 수 있는가? 혹은 지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은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이 될 수 있는가?

  
<기억 거래소>
 <기억 거래소>
ⓒ 알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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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차원에서만 상상하던 기억 거래는 어느덧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결코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게이미케이션 전문가이자 로봇공학과 인지과학을 전공하는 김상균 교수의 소설 <기억 거래소>를 읽으면, 기억 거래는 더 이상 SF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현실이다.

막 대학을 졸업한 주인공 완우는 한 달 만에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고향 춘천으로 내려간다.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한 완우가 본인의 담당 교수였던 김상균 교수에게 그가 차린 회사 더 컴퍼니에 들어올 것을 제안 받으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더 컴퍼니는 뇌과학을 이용해 인간의 기억을 조합하고 바꿔주는 곳이다. 한마디로 이곳에서는 기억을 거래한다. 상품명 <조작몽 동반 안락사>, <브로카 & 베르니케 이식술>, <트라우마 기억 재설정술> 등 이름만 들으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사실 이 상품이 말하는 기술들은 현재 수준에서도 구현 가능하다.

기술적 차원의 문제보다는 심리적 차원의 문제에 더 가까운 듯하지만, 어쨌든 이 정도의 기억 제거력과 최면술은 우리의 삶을 조금 더 긍정적으로 만들어 주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인간이 만드는 기술력과 시스템은 매번 현재의 법과 윤리⋅도덕적 체계를 넘어서기를 시도한다. <기억 거래소>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이 점이다. 우리의 기억(과학)이 본래의 시스템(법, 도덕, 윤리)을 넘어선다면 어디까지 통제가 가능하며 어디까지 허락이 가능한가?
"불치병에 걸린 사람에게 조작된 꿈을 꾸게 해서 평온하게 생을 마감하게 한다면?"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의 기억을 조작하여,
본인이 저지른 죄의 기억 속에서 평생 고통을 맛보게 한다면?"
 누구나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은 태어났으면 죽는 게 생의 논리이다. 그러나 본질을 조금만 비틀면 우리는 무한대의 윤리⋅도덕적 한계를 경험해야 한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의 꿈을 조작하는 게 그것이 아무리 평온하게 생을 마감하게 한들 옳은 일인가? 우리는 어느 곳에 방점을 두고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할까? 평온한 생의 마감? 기억의 조작?

다른 예로 큰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평생 동안 죄에 대한 고통을 맛보게 하는 건 과연 옳은 일일까? 그 사람에게 그런 고통을 주는 게 과연 피해자의 삶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일까?

발전해가는 시스템(과학)과 시스템 위로 쌓이는 윤리적 문제 앞에 결국 시스템(과학)과 윤리 중 무엇이 원인과 결과인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 가중될 뿐이다. 소설 <기억 거래소>는 바로 이와 같이 있을 법한 일들의 문제를 꼬집는다.

우리는 과연 기억을 어느 선까지 거래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물음의 끝에는 인간의 한계이자 생의 한계인 '죽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안락사부터 조력 자살까지, 자살을 금기시하던 사회는 어느덧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를 두고 존엄사라는 표현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표현을 두고, 이 행위를 두고 여전한 논란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역으로 묻고 싶다. 죽고 싶지 않아서 평생 살고 싶은 건 '존엄한 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소설 <기억 거래소>는 독자를 붙잡고 묻는다. 태어났다면 당연히 죽어야 하는 사람의 '생' 앞에서 불멸을 꿈꾸며 살아가는 기억은 가능한 것인가? 육신은 죽었지만, 기억만큼은 컴퓨터와 접속해 그 속에서 의식을 찾고 살아간다면 이는 또 다른 존엄한 생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존엄사'와 '존엄한 생',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와 '스스로 목숨을 평생 동안 유지하는 행위', 이는 실재가 될지도 모르며 곧 다가올 우리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미래 앞에서 우리는 시스템과 윤리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메워 나가야 할 것인가?

<기억 거래소>는 인공 지능, 인간 복제 등 발전하는 과학을 사이에 두고 어디까지 인간의 욕망은 뻗어나갈 것이며, 또 생명의 존엄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지 묻는다. 현실은 영화 <이터널 선샤인>처럼 낭만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물론 과학의 발전으로 낭만적이고 감동적인 일들이 더 많아진다면야 그 가능성에 대해서 더 큰 꿈을 꿀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 모두의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일 테니까.

기억 거래소

김상균 지음, 알렙(2018)


태그:#인공지능, #기억거래, #조력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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