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늦봄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항일 투쟁의 현장인 북간도를 답사(8월 25일-29일)를 하였다. 특히 명동(촌)은 문익환목사와 동무인 독립투사 송몽규, 민족시인 윤동주가 어릴 적부터 함께 뛰놀며 조선의 독립을 꿈꾸던 현장이자 동북공정이 추진되는 지역이다. (사)통일맞이 주최로 최교진 교육감과 썬웨이주식회사 관계자 등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직장인 등 60대까지 전국에서 모인 18명이 함께 하였다.   <기자말>

대일항쟁 시기 조선인들은 일본의 통제를 벗어나 만주로 이동한 후 농사를 지으며 조선의 독립에 위한 훈련 및 전투를 통해 치열한 투쟁을 하였다. 간도(봉금령 당시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섬처럼 있는 땅이라 간도라 불렀다는 설과 조선인이 새로 개간한 땅이라 간도라는 설 등) 지역은 독립군의 양성장이자 식량 등 군수물자의 공급처로써 엄청난 역할을 하였으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의 조선독립군의 대승리는 일본군들이 북간도지역의 조선인들에 대한 초토화(독립군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몰살하는 작전)계획을 추진하였던 현장이기도 하다. 그 현장에서 중국은 조선 독립투쟁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동북공정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로 조선인의 독자적인 대일 투쟁의 역사도 지워지고 있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 답사단들은 충격을 받았다.

1920년 북간도 지역에서 무장투쟁의 현장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이다. 그 현장은 우리의 역사에 기록되어 조국을 잃은 민족의 아픔과 함께 독립에 대한 조국애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한 역사의 현장중 하나인 봉오동전투 진적비가 훼손되어 있었다.
 
1920년 대한군 북로독군부과 신민단 독립군 등 연합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과 싸워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전적비로 2013년 6월에 산 중턱으로 이전하여 새로이 조성되었으나 앞쪽 비문이 원형 톱날로 모두 지워져 있고, 바닥에는 톱날이 널려 있다
▲ 비문이 다 지워져 버린 봉오동 항일 전적비 1920년 대한군 북로독군부과 신민단 독립군 등 연합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과 싸워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전적비로 2013년 6월에 산 중턱으로 이전하여 새로이 조성되었으나 앞쪽 비문이 원형 톱날로 모두 지워져 있고, 바닥에는 톱날이 널려 있다
ⓒ 박진우

관련사진보기

 

   
길림성 도문시의 상수원 구역에 있는 봉도동(홍범도 장군) 항일 전적비로1993년 6월에 중공도문시위통부와 도문시박물관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공사로 인해 주변의 흙이 다 쓸리고 기단부가 밖으로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봉오골 반일 전적지'비
▲ 1993년에 설치된 봉오동 항일 전적비 길림성 도문시의 상수원 구역에 있는 봉도동(홍범도 장군) 항일 전적비로1993년 6월에 중공도문시위통부와 도문시박물관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공사로 인해 주변의 흙이 다 쓸리고 기단부가 밖으로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봉오골 반일 전적지"비
ⓒ 박진우

관련사진보기

   
상수원구역으로 지정 되어 관리가 필요한 곳이기는 하지만, 1993년에  '중공도문시위통전부'에서 설치한 '봉오동 반일 전적비'는 상수원 지역 정비로 방치되어 있었으며, 2013년에 높은 곳으로 이전하여 새로이 설치된 전적비는 모든 글귀가 다 지워져 있었다. 바닥에는 전적비의 글귀를 지웠던 원형 통날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조선동포들의 이주사와 문화사, 혁명사를 알리는 연변박물관에서도 조선인의 독자적인 대일 항쟁과 관련한 전시구역에는 출입금지 팻말과 함께 줄을 쳐 진입을 차단하고 있었다.

  
중국 동북에 있는 조선인 자치구인 길림성 연변의 연변박물관으로 1920년대 조선인 항일 투쟁과 관련한 전시관이 빨간 줄로 차단되어 있고 관람객의 출입을 금지 시키고 있다
▲ 연변 박물관내 조선인 항일 투쟁 전시관 중국 동북에 있는 조선인 자치구인 길림성 연변의 연변박물관으로 1920년대 조선인 항일 투쟁과 관련한 전시관이 빨간 줄로 차단되어 있고 관람객의 출입을 금지 시키고 있다
ⓒ 박진우

관련사진보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정든 고향을 뒤로하고 정착한 용정은 북풍한설로 살을 에었지만 국가를 잃은 민족은 독립의 의지를 키웠고, 용정을 가르며 흐르는 해란강은 독립군들의 식량을 생산하는 기름진 땅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그 용정의 중심에는 명동(밝은 조선 민족의 새 공동체 明東)이 있다.

명동(1899년 문병규, 김약연, 남위언, 김하규, 윤하현 등 5대 집안이 이주하여 형성)은 헤이그에 밀사로 갔던 이상설과 신흥무관학교를 이끌었던 이동녕이 설립한 서선서숙이 있었고, 이를 계승한 명동학교(1908년)는 민족주의적 기독교계로 많은 독립투사들을 탄생시켰다.

'흰 뫼(백두산)가 우뚝 솟아 은택이 호대한 한배(단군)검이 깃 차신 이 터에 그 씨앗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
명동(중)학교는 대한(간도)국민회의 중심 인물인 마진, 남세극, 마룡하, 최기학, 마천룡을 배출하였고, 영화 '아리랑'을 제작한 라운규와 한국인 최초의 항공기 조종사인 서왈보, 그리고 민족시인 윤동주와 독립투사 송몽규, 통일운동가 문익환 등을 배출할 정도로 북간도 지역에서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진 독립투사들을 배출한 요람이다.

 
1920년대까지 조선의 독립 투사들을 배출한 민족주의 명동(중)학교
 영화 '아리랑'을 제작한 라운규와 조선인 최초의 항공기 조종사 서왈보, 그리고 민족시인 윤동주와 독립투사 송몽규 등을 배출한 독립투사들의 요람
▲ 북간동 명동(촌)에 복원된 명동(중)학교 1920년대까지 조선의 독립 투사들을 배출한 민족주의 명동(중)학교 영화 "아리랑"을 제작한 라운규와 조선인 최초의 항공기 조종사 서왈보, 그리고 민족시인 윤동주와 독립투사 송몽규 등을 배출한 독립투사들의 요람
ⓒ 박진우

관련사진보기

 

명동(중)학교는 복원되어 당시 항일투쟁의 분위기를 알려 주고 있었고, 학교 운동장 맞은편에는 313의사탑과 함께 그네 등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자 하는 모습들이 있었다. 윤동주의 생가와 송몽규의 생가(미고증)는 복원되어 탐방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명동(중)학교 입구에는 윤동주 생가와 윤동주기념관이 있고, 윤동주와 명동 출신들의 항일 투쟁 역사를 소개해 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역사적 현장인 윤동주생가 입구인 명동교회는 문이 폐쇄되어 있었고, 문익환 생가의 위치를 알려 주는 안내판이나 해설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음은 안타까움을 더했다. 장재촌에는 오래된 한옥들이 있었는데 한옥의 막새기와에는 천지인을 상징하는 삼태극과 겨레의 꽃인 무궁화 등의 문양이 아직도 명확히 남아 있어 120여년 전 이곳이 항일 투쟁과 민족정신을 지키기 위해 헌신해 온 조선인 마을임을 답사단에게 알려 주었다.

 
120여 년전 한반도에서 이주해 온 조선인들이 명동을 만들면서 건축한 한옥으로 막새기와에는 천지인을 상징하는 삼태극과 겨레의 꽃인 무궁화 등의 문양이 아직도 명확히 남아 있어 이곳이 항일 투쟁과 민족정신을 지키기 위해 헌신해 온 조선인 마을임을 알려 주고 있다
▲ 북간도 명동 장재촌 마을에 있는 120여년된 한옥 120여 년전 한반도에서 이주해 온 조선인들이 명동을 만들면서 건축한 한옥으로 막새기와에는 천지인을 상징하는 삼태극과 겨레의 꽃인 무궁화 등의 문양이 아직도 명확히 남아 있어 이곳이 항일 투쟁과 민족정신을 지키기 위해 헌신해 온 조선인 마을임을 알려 주고 있다
ⓒ 박진우

관련사진보기

 

일본 제국주의는 731부대 등 여러 곳에서 생체 실험을 하면서 사람들을 죽였는데 일본내에서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학생들을 포함해 후쿠오카 감옥에서 피 대신 생리식염수를 수혈할 수 있는지 생체실험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약 1,800여 명을 죽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 중에는 명동(중)학교에서 항일 의식과 민족주의를 배운 항일투쟁가인 송몽규와 민족시인 윤동주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윤동주 기념관에는 일본의 생체실험을 통해 죽였다라는 내용도 설명을 해 주고 있었다.

해방직전에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은 두 젋은이는 10대의 꿈을 꾸었던 캐나다 선교사들이 운영했던 은진중학교가 있는 영국 자치구인 동산공원내 기독교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었다.

공동묘지 입구에는 한글로 윤동주 묘를 안내하고 있었으며, 윤동주의 묘 옆에는 한 집에서 태어나 함께 성장하였고, 같은 감옥에서 죽은 영원한 친구인 송몽규도 함께 하고 있었다. 당초 송몽규 묘는 명동 장재촌 동구 입구에 있었으나 1990년 4월 5일에 평생 친구인 윤동주 묘 옆으로 이장하였다. 윤동주의 좌측 건너편에는 건국훈장을 받은 현석칠목사(2004년 건국포장후대전 현충원으로 이장)의 묘도 있었다.

 
영국(캐나다)인들의 자치구인 동산공원내 기독교 묘역에 안장된 민족시인 윤동주 묘로 1935년에 조성되었다
▲ 민족시인 운동주 묘 영국(캐나다)인들의 자치구인 동산공원내 기독교 묘역에 안장된 민족시인 윤동주 묘로 1935년에 조성되었다
ⓒ 박진우

관련사진보기

   
1990년 4월에 과거 영국(캐나다) 자치구인 동산공원내 민족시인 윤동주 묘 옆으로 이장되어 안치된 독립투사 송몽규 묘
▲ 독립투사이자 사상가인 송몽규 묘 1990년 4월에 과거 영국(캐나다) 자치구인 동산공원내 민족시인 윤동주 묘 옆으로 이장되어 안치된 독립투사 송몽규 묘
ⓒ 박진우

관련사진보기

 

명동마을 주변에는 항일 투쟁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항일투쟁의 흔적은 1919년 만세투쟁 당시 희생자들의 묘역인 '313 반일 의사릉'과 '탈취 15만원 사건유지'다.

1919년 3월 1일 조선에서의 만세투쟁에 영향을 받은 북간도

조선인들이 3월 13일 용정 벌에 모여 명동(중)학교 브라스밴드를 앞세우고 만세 시위를 하였는데 그 수가 8천 여명에 이르렀고, 용정일본총영사관으로 향하는 도중 일본군과 일본 경찰들의 총에 14명이 사망하고, 15명이 부상, 30여명이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였는데 이때 희생된 14인의 의사들이 안장된 능이다. 명동의 이날 집회로 북간도 지역은 3.13 만세 투쟁이후 크고 작은 시위가 47차례나 진행 되었다. 명동에서의 3.13 만세 투쟁시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도 남편 문재린 목사와 집회에 참석하였다. 당시 문익확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는 첫 돐 갓 넘은 문익환을 업고 313 만세 투쟁에 참여하였는데, 아마도 만세 투쟁에 참여한 최연소중 한 명일 것이다.

 
1919년 3월 13일 북간도 명동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 투쟁을 하다 일본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의사 14인의 능
▲ 313 의사 능 1919년 3월 13일 북간도 명동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 투쟁을 하다 일본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의사 14인의 능
ⓒ 박진우

관련사진보기

 

15만원 탈취사건은 명동(중)학교 출신 4인 등 6명(항일투쟁단체 철혈광복단)이 1920년 1월 4일 일본이 길회선(길림과 회령을 잇는 철도) 부설 비용(3십만 원) 호송 마차를 명동 주변에서 탈취한 사건으로 윤준희(30세), 임국정(27세), 한상호(23세)는 192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당시 30만원이면 현재 80억원 정도의 규모라고 하며 15만원으로도 장정 5000명을 완전 무장시킬 수 있는 금액이다. 15만 원 탈취사건이후 1920년 6월에 봉오동전투가, 10월에는 청산리 지역 8개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어 내지만 일본은 명동을 비롯해 북간도 지역의 조선인 마을에 초토화작전(경신대참변(을 추진하여 조선인들을 몰살한다.

 
15만원 탈취사건은 항일투쟁단체 철혈광복단이 1920년 1월 4일 일본이 길회선(길림과 회령을 잇는 철도) 부설 비용(3십만 원) 호송 마차를 명동 주변에서 탈취한 사건
▲ 15만원 탈취 사건 기념비 15만원 탈취사건은 항일투쟁단체 철혈광복단이 1920년 1월 4일 일본이 길회선(길림과 회령을 잇는 철도) 부설 비용(3십만 원) 호송 마차를 명동 주변에서 탈취한 사건
ⓒ 박진우

관련사진보기

 

한민족의 정신 계승과 항일 투쟁의 현장인 명동마을을 가려면 장재촌 입구인 바위산을 지나야 하는데 이 바위산의 이름은 선바위로 명동학교 학생들이 소풍을 가던 곳이기도하다. 하지만, 선바위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앞장섰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와도 깊은 관계가 있는 곳이다.

안중근의사는 1907년 명동에 석달간 머물다가 1908년 러시아 연해주로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국내 진공을 감행했으나 회령에서 참패 한 뒤 다시 명동 장재촌으로 찾아가 문치정(문익환 목사 조부)집안에 거주하면서 절치부심하며 문암골 선바위에서 권총 사격연습을 하였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북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수 있도록 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발해와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소수민족화 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조선동포들의 항일 투쟁의 현장을 지우려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그 소중한 역사를 사라져 버린다. 내년이면 5개 가문 150여 명이 엄동설한에 두만강을 건너 명동 마을에 이주하여 6백여만 평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독립투사들을 배출하기 시작한지 120년이 되는 해이다. 역사 시간에 배우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의 승리의 뒤에는 북간도에서 헌신한 선배들의 고귀한 삶의 현장이 있고, 그 역사의 한복판에 명동마을이 있음을 함께 기억했으면 한다.

이번 답사는 통일운동가인 늦봄 문익환목사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사업중 하나로 (사)통일맞이가 준비를 하였는데 문재인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과의 남북 정삼 회담을 통해 남과 북이 평화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역사의 현장을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진행하고, 이를 교훈화하여 다시는 국가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하는,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 되길 기대해 본다.

태그:#북간도, #명동, #송몽규, #윤동주, #문익환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헌법에 보장된 정의의 실현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실천하는 시민들의 다양한 노력이 지속될 때 가능하리라 믿는다. 지방자치는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토대이며,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라 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