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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땡 하면 뛰어가 배식대 앞에 서서 재잘거리는 모습. 미디어에서 마냥 즐겁게만 묘사되는 학교 점심시간이지만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줄지어 급식실로 향하던 초등학교 때와 달리 중학생이 된 후 원하는 친구들과 밥 먹을 자유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건 함께 먹을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 시절 삼삼오오 모여 놀던 친구들은 다투기도 잘했다. 사소한 이유였다. 함께한다는 의미의 밥은 따돌림의 주된 방식이었다.

점심시간 홀로 남은 친구가 어느 날부터 보이더라도 나서서 같이 밥 먹자 말하는 친구들은 없었다. 나도 용기 있는 친구가 아니었다. 이유 없는 따돌림의 화살이 나에게 돌아올 것 같았다. 무엇보다 혼자가 되었을 때 손 내밀어줄 친구가 없다는 게 큰 이유였다.

사람들의 말처럼 관계에 서투른 학생들의 한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그때 내가 겪은 감정은 공포에 가까웠다. 공포는 오래갔다. 지켜보기만 했는데도 그랬다.

학교에서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자살한 선생님에 관한 시사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한 학생의 인터뷰가 기억에 남는다.

"식당 테이블 끝에 혼자 앉아 밥을 먹는 선생님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어요."

언젠가 봤던 익숙한 장면이었다.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배제를 택하는 건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배제는 일상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예멘 난민을, 성소수자를, 가난한 사람을 우리로부터 따돌리고 있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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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외면에 아이는 고통받는다. 어른들은 '세상 살아내려면 그 정도는 이겨내야지'라는 말로 모든 잘못을 혼자 남은 아이에게 전가한다. 그런 폭력의 말들이 쌓여 지금 우리가 마주한 상황을 만들어 낸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관계마저 경쟁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살아남거나 도태되거나 둘 중 하나 말이다. 이런 우리를 보고 자란 아이들이 배제의 상황에서 택할 방식은 어쩌면 당연했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 배제해버리는 선택. 학창시절 내가 그랬듯 말이다.

남보다 강해져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이 아닌 홀로 앉은 친구 옆에 앉아 함께 밥 먹을 수 있는 용기를 가르쳐야 한다. 그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나마저 혼자가 되는 건 아니라는 걸 경험하게 해줘야 한다. 그래야 그 모습을 지켜본 아이들이 스스로 배제될까 두려워 배제하는 편에 서는 걸 막을 수 있다. 

밥상이라는 일상의 공간으로부터 사회는 조금씩 바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외면했던 배제의 화살이 돌고 돌아 언젠가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때도 우리는 이겨내지 못하면 도태되는 게 맞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태그:#배제, #우리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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