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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취재단 신나리 기자]

딸아이의 얼굴을 보는 데 '6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아장아장 걷던 아이는 구부정한 할머니가 돼 있을까. 몇 번을 생각하며 떠올려보지만, 속 모르고 흐른 세월 탓에 얼굴을 그려보기가 쉽지 않다.

황우석씨는 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다. 이산가족상봉 신청이 가능했던 30년 전부터 신청을 한 건 그 때문이다.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대한적십자사는 지난 4일 오후 판문점에서 8·15 계기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 최종명단(남 93명, 북 88명)을 교환했다고 밝혔다. 최종명단에 포함된 남측 방문단 93명은 오는 20일부터 22일까지 재북가족을, 북측 방문단 88명은 24일부터 26일까지 재남가족을 금강산에서 상봉하게 된다. 사진은 대한적십자사와 북측 조선적십자회 실무진들이 이산가족 상봉행사 최종 대상자 명단을 교환하는 모습.
 대한적십자사는 지난 4일 오후 판문점에서 8·15 계기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 최종명단(남 93명, 북 88명)을 교환했다고 밝혔다. 최종명단에 포함된 남측 방문단 93명은 오는 20일부터 22일까지 재북가족을, 북측 방문단 88명은 24일부터 26일까지 재남가족을 금강산에서 상봉하게 된다. 사진은 대한적십자사와 북측 조선적십자회 실무진들이 이산가족 상봉행사 최종 대상자 명단을 교환하는 모습.
ⓒ 대한적십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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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0일부터 26일까지 북한 금강산에서 남북 이산가족이 만난다(20일부터 2박 3일 1차상봉, 24일부터 2박 3일 2차상봉). 제21차 이산가족 상봉이다. 4.27 판문점 선언에 따라 2년 10개월여 만에 이산가족간 만남이 성사됐다.

남북 적십자는 지난 4일 광복절 계기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위한 최종명단을 교환했다. 남측 93명, 북측 88명이 가족의 얼굴을 어루만질 수 있게 됐다. 황우석, 이수남, 박기동씨 역시 각각 북한에 사는 딸과 형, 남동생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이 세 사람은 1차 상봉 때 가족을 만나게 된다.

[황우석씨 이야기] 68년 만에 보는 딸, 아버지의 심경

황우석씨 황우석씨
▲ 황우석씨 황우석씨
ⓒ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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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이 내려오면서 37도선까지 우리가 밀렸잖아요. 그리고 1.4 후퇴가 있었고요, (상황 따라) 끌려다니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3개월만 피난하고 고향에 들어가자는 생각으로 나왔는데, 그게 68년이 됐어요."

그의 나이 여든아홉, 황우석씨가 딸의 얼굴을 보는 데 68년이 걸렸다.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된 때를 기준으로 잡아도 30년이 필요했다. 

진퇴가 반복되는 전쟁통에서 그는 피난을 생각했을 뿐이다. 가족과의 영원한 생이별은 생각도 못했다. 여동생 세 명도 그 후로 볼 수 없었다. 북한에 있던 세 동생은 세상을 떠난 것으로 확인됐다. 황씨의 아버지는 예순에, 어머니는 일흔일곱에 북한에서 숨을 거뒀다. 어린 딸의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걔가 고생이 많았을 거잖아요. 외로웠을 거고. 가까운 친척도 없고... 그 어려운 일을 전부 다 얘가 겪어야 했을 것 아니에요. "

딸에게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다 드러낼 수 있을까. 그래서 황씨는 마냥 고마워했다. 지금까지 살아준 딸에게 모든 게 고마웠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줘서 감사하다고 얘기해야죠, 딸아이까지 죽었으면 내 혈육을 찾을 길이 없잖아요"라며 "유일하게 살아서 상봉까지 할 수 있어서 고마워요,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줬으니 진짜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얼굴이 가물가물한 딸, 그러나 마음에서 지워본 적 없는 딸이다. 그 딸을 이제라도 만날 수 있다니 딸에게도 세상도 고마웠다. 그는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고마워요. 여러분들이 고생해서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킨 거잖아요. 감사해요."

[이수남씨 이야기] 큰형은 얼마나 늙었을까... 약 챙기는 동생

이수남씨 이수남씨
▲ 이수남씨 이수남씨
ⓒ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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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남씨가 가진 큰형의 사진은 단 두 장뿐. 그마저도 동네 어른들과 형이 찍힌 사진에서 큰형 부분만 잘라 크게 복원했다. 빡빡머리에 셔츠 차림이던 형은 이제 87세를 맞았다. 차분하고 자상했던 열 살 위 형을 떠올리면 애틋한 마음뿐이다.

이씨는 곧잘 형을 쫓아다녔다. 남산이 야산인 시절, 여우와 늑대가 거기에 살았다. 형과 산에 올라 여우 두 마리를 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별 이야기 없는 기억일지라도 이씨에게는 형과 함께한 몇 안 되는 추억 중의 하나다.

"그때, 북한 사람들이 병력을 만들기 위해 젊은 사람들을 데려갔어요. 서울 장충단 공원에 가다가 거기로 데려간 거예요. 어디로 모이냐고 하니까 남대문 초등학교인가 그랬나 봐요. 어머니가 거기서 형을 마지막으로 보고 헤어진 거죠."

이씨는 형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한다. 형과 어머니가 함께 집을 나섰는데, 돌아온 건 어머니뿐이었다.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부모님이 한 대화를 듣고서야 어떤 게 된 일인지 이해했다. 부모님은 한평생 형을 그리워하다 돌아가셨다.

"사실 전에는 이산가족을 신청한 적이 없어요. 그 전쟁통 속에서 어떻게 살아있겠어 하는 마음 때문에요. 희망을 놓고 있다가 내가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신청하게 된 거예요."

일흔일곱의 이씨는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뭐가 됐든 생사확인은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이번 만남이 이뤄졌다. 피부가려움증, 소화제, 연고, 진통제...그는 형을 위해 이런저런 약을 선물로 챙겼다. 살아생전에 또 만날 수 있을까. 이산가족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는 마음을 담아 형을 볼 날을 준비하고 있다.

[박기동씨 이야기] 머슴이 된 형... "부모님 비석이라도 만들고 싶지만"

박기동씨 박기동씨
▲ 박기동씨 박기동씨
ⓒ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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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동씨는 두 동생을 만난다. 어느 이산가족도 헤어짐을 준비할 수 없었겠지만, 서울 배재중에 다니며 떨어져 살았던 그는 더욱 이별을 생각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고향인 강화도에서 두 동생을 데리고 찐 쌀을 가지러 갔다 인민군에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정도다.

"부모님은 100세가 넘었을 테니 돌아가셨을 거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남동생은 나보다 나이가 어렸으니까 살아있지 않을까 싶었죠. 그게 맞았네요."

박씨는 두 동생이 각각 두 살, 여섯 살 때 헤어졌다. 사실 동생들의 얼굴이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남동생의 왼쪽 이마에 있던 반점과 여동생이 서양사람을 닮아 소련 여자라고 놀리던 기억을 품고 있을 뿐이다.

박씨를 포함한 5남매 중 두 동생과 부모님은 북한에 나머지 두 동생은 박씨와 한국에서 살았다. 강화도 피난민 수용소에서 어렵게 찾은 동생들이다. 누군가의 선택도 아니고 의지도 아니었다. 그렇게 박씨 3남매는 고아가 됐다. 당시 서울에서 유학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그는 남은 동생들과 먹고살기 위해 머슴이 됐다. 1년에 쌀 세 가마니를 받으며 동생들과 생계를 이어갔다.

"동생을 만나면 부모님들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묻고 싶어요. 저는 전혀 모르는 상태니까. 묘지가 어디 있는지 제일 궁금하죠. 부모님 비석이라도 만들고 싶지만, 그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할 거고요..."

부모님에게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고, 이곳에서 자신과 남은 동생들을 잘 보살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이 말은 전할 수 없게 됐다. 그래도 북한의 동생들이 남았다. 얼굴 볼 날이 일주일도 안 남았다는 생각에 밤에 잠을 설칠 지경이다. 북쪽이니 더 춥지는 않을까, 자신은 입어본 적 없는 비싼 겨울 잠바를 챙기며 그 날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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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