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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 제주에 살고 있어도, 가끔은 물 건너 여행을 떠나고 싶다.

휴가를 길게 쓰기 어려운 직장인에게 주어지는 현실적인 선택지는(그렇다, 가끔 잊곤 하지만 제주 역시 조선 반도의 일부다) 넓지 않다. 오사카까지 직항이 다니는 일본을 낙점했다. 티켓팅 후, 설레는 마음으로 가이드북을 훑으며 여행 일본어 한 마디를 외웠다.

"나마비루 쿠다사이(생맥주 주세요)."
 간사이 공항
 간사이 공항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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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떠난지 한 시간 사십 분 만에 간사이 에어포-오트에 도착했다. 육지 나들이 가는 것에 시간과 비용을 조금씩만 더 보태면 충분한 거리였다. 한 번씩 서울에 갈 때마다 번화한 도시의 풍광에 깜짝 깜짝 놀라는 섬여자에게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는 서울 같기도, 부산 같기도 했다.

10여 년만의 일본이었다. 초행이나 다름없었지만, 대도시의 시스템이란 어디나 비슷하기 마련이라 크게 낯설지는 않았다. 서울 공항철도처럼 표를 끊고 오사카 시내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서울 지하철에서는 이제 없어진 종이 회수권의 촉감이 서울 지하철을 처음 탈 때의 생경함을 상기시켜주었다.

일본 주택가의 작은 가게들

숙소가 있는 미나미(난바역, 신사이바시역, 도톤보리 등이 있는 오사카의 명동)로 향하는 길, 관광지와는 상관없는 애매한 주택가에서 전철을 내렸다. 화로구이(야끼니꾸)를 먹기 위해서였다.

남자친구가 일전의 가족여행 때 눈물을 흘리며 먹었다는 인생 고깃집이 있다고 했다. 미나미에도 고깃집이야 있겠지만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곳보다야 현지인 맛집이 믿을만한 법. 일본 내에서는 유명한 흑우 화로구이 전문점이라고 했다.

오사카는 일본의 부엌이라고 불린다. "먹다가 망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식 문화가 발달해 있다. 사람 많은 관광지를 딱 싫어하는 우리는 그 유명한 오사카 성도, 금각사도, 청수사도 가지 않았다. 일정도 짧았지만, 그보다 이 골목 저 골목 구경하고 다니며 "먹다가 망"할 듯이 우리만의 맛집을 발견해내는 일이 더 즐거웠기 때문이다.

전철역에서 화로구이 식당까지 십여 분 걷는 동안 일본의 아기자기한 주택가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해질녘 주택가의 골목마다에는 영화 <심야식당>을 연상시키는 작은 가게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달랑 하나 있는 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주인장과 마주 앉아 나폴리탄 접시를 받아들어야 할 것만 같다.

 작은 가게들이 점점이 박혀 있던 오사카의 주택가
 작은 가게들이 점점이 박혀 있던 오사카의 주택가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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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다고 느껴질 정도로 작은 가게들이 많은 이유는 임대료 때문이겠지. 한국에 작은 가게, 작은 카페 열풍을 일으킨 진원지도 일본이었다. 개인주의적인 일본인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작은 공간 안에서 타인과 어깨를 부대낀다. 아니, 어쩌면 이 좁은 공간 때문에 일본인의 개인주의가 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속사정이야 모르지만 주택가 작은 식당의 주 고객이 동네의 단골 손님이라는 것만큼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눈에 띄게 화려한 간판도 없지만 작은 가게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이미 서로 잘 아는 사이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는 정겨운 눈빛을 교환한다. 일본에 노포가 많은 이유는 한 번 믿고 이용하기 시작한 가게를 꾸준히 애용하는 단골 문화가 있다.

한편 한국은 유행이 빠른 나라다. 오랜 단골집도 '뜨는' 집, '요즘 핫한' 집을 이기지 못한다. 가늠할 수 없이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과는 달리, 답답하리만치 느리게 변하는 일본 사회의 특징을 소박한 골목길 풍경이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속도 차. 일본에 도착해서부터 떠날 때까지 이것을 생각했다.

일본의 부엌에서 맛본 인생 화로구이와 간접흡연
 화로구이(야끼니꾸)
 화로구이(야끼니꾸)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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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로구이는- 아아- 입에서 살살 녹았다.

오사카의 명물 흑우(검정소) 특유의 부드러운 식감과 마블링을 중시해 유난히 부드러운 일본 소고기의 특징이 더해져 그야말로 '살살 녹음'. 마블링이라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한 수 배웠다.

제주에도 흑우가 있다. 천연기념물로도 지정돼 있는 고급 육류인데 쉽게 접할 기회가 없는 것이 아쉽다. 음식문화축제 때 제주 흑우를 시식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무척 부드럽고 맛있었다. 대중화가 시급합니다. 아아.

자리마다 놓인 화로에서 고기를 굽는 식당 안의 풍경은 우리나라 고깃집과 비슷했다. 금요일 저녁, 가족 단위로 외식을 나온 모습도 꼭 같았는데,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진풍경에 놀랐다. 아이들도 있는데 버젓이 재떨이도 준비돼 있다.

일본은 의외로 흡연자의 천국이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문화지만 흡연에 관대한 것은 미투 운동 무풍지대였다고 할 만큼 보수적인 탓일까. 여성의 지위가 낮은 것과 관련이 있을까. 섬나라라 변화의 속도가 느린 걸까.
 취객을 염려함인지 선로와 나란한 방향으로 설치된 오사카의 지하철 벤치
 취객을 염려함인지 선로와 나란한 방향으로 설치된 오사카의 지하철 벤치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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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엔이 넘는 호사스런 식대를 지불하고 다시 전철에 올랐다. 오사카의 지하철 플랫폼에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벤치가 선로를 마주보지 않고 선로와 나란한 방향으로 배치돼 있는 것이다. 안내 포스터를 보니 이해가 됐다. 벤치에서 졸던 사람이(아마도 취객) 전철을 타러 일어나다가 어버버 하고 선로로 툭 떨어지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만큼 취해서 전철을 타는 사람이 많은가? 일본 직장인들도 우리나라 직장인 못지않게 야근도 많이 하고 피곤하겠지? 하지만 아이들이 떨어져 다치는 사고도 있을 텐데 스크린 도어를 설치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일본은 역시 신기한 나라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우연한 행운

 도톰보리의 상징 글리코상 전광판
 도톰보리의 상징 글리코상 전광판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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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 오사카의 명동인 신사이바시 거리와 먹자거리인 도톤보리는 불야성이다. 도톤보리의 상징 글리코상 앞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기념 촬영을 하느라 바쁘다. 도톤보리 강을 따라 가게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에 여행은 어렵지 않다. 가까운 나라인 만큼 한국인도 많다.

도톤보리 강을 내려다보며 타코야키를 먹고, 인형뽑기 가게에서 순식간에 3000엔을 날려 인형 하나와 흰둥이 동전 지갑을 뽑았다.
 골목길 작은 가게에서
 골목길 작은 가게에서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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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들 곳은 골목길의 조그만 노점이었다. 할머니 혼자 하시는 작은 포장마차로, 일본어로 쓰인 간판이 있지만 읽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그저 이름 모를 노점이다.

우리나라 포장마차 스타일로 바 테이블이 있고 플라스틱 의자가 놓인 간이 테이블이 두어 개 더 있었다. 주인 할머니는 바 안쪽에서 안주를 만들고 생맥주를 뽑는다. 혼자 온 손님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자연스레 옆자리에 앉아서 각자의 술과 일인분의 안주를 먹고 즐기다 돌아간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혼술집이 점점 늘어나고는 있지만 일본에서는 이미 매우 일반적인 형태인 것 같다.

파파고 번역기를 믿고 당당하게 들어갔건만 손으로 적은 메뉴판은 해독이 안 된다. 우물쭈물 자리에 앉아 두리번거리는 우리에게 할머니는 뜻밖의 한국어로 "이런 데는 빨리빨리 술부터 시켜야 돼"라는 가르침과 함께 손때 묻은 한국어 메뉴판을 건네주셨다.(!) 오사카에는 한국 교포가 많고 한인타운도 꽤 큰 규모로 형성되어 있다고 들었다. 자이니치이신가?
 손때 묻은 한국어 메뉴판
 손때 묻은 한국어 메뉴판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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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외워 온 "나마비루 쿠다사이"를 써먹은 뒤 메뉴판을 정독했다. 적은 양의 안주 두어 가지 주문했는데 하나하나가 다 맛있다. 할머니 손이 닿지 않는 우리 테이블까지는 바에 앉은 손님들이 접시를 전달해 주었다. 일본인은 역시 친절해.

우리 뒷자리 테이블에 앉은 젊은이들은 취해서 맥주병을 깨고 난리가 났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일본인이라도 젊음의 혈기는 역시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꼬인 혀로 스미마셍을 연발하지만 주인 할머니는 너희 같은 녀석들을 내 평생에 걸쳐 봐 왔다는 듯이 시크한 반응.

주소도 이름도 모르는 곳. 그야말로 발길 닿는 대로 찾아간 할머니의 작은 노점은 어떤 유명 맛집보다도 특별한 추억의 장소로 남았다. 아케이드 상가 여기저기를 쏘다니다 들어간 골목길 어귀 첫 번째 집. 별다른 선택지도 없어 그냥 들어간 가게에서 꼬질꼬질한 한국어 메뉴판을 만나는 일 같은 '세렌디피티(우연한 행운)'를 어떻게 잊을까.

스마트폰 시대 이전의 여행에서는 이런 우연을 좀 더 자주 마주쳤던 것 같다. 성능 좋은 내비게이션이 생기면서 길을 잃는 일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이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을 모두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여유를 가지면 여행이 한결 풍성해진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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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되는 거라고 믿는 사람. <청춘, 내일로>,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쓴 여행작가. 제4회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상(2010), 청춘 기자상(2013) 등 수상. 현 제주도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