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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위험을 피해 제주로 온 예멘 난민들은 위험을 이유로 혐오가 정당화되는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이미 많은 난민들이 함께 살고 있었음에도 인식하지 못했던 한국사회이기에, 난민들을 접했을 때 '낯섦'과 더불어 '두려움'이 터져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가? '두려움'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혐오가 아닌 더 많은 평등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난민혐오에 대한 세 차례의 기획연재를 통해 두려움의 선동에 맞서는 평등과 인권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 기자말

'딱 하나만' 바뀌면 되는 사람

인권운동으로 삶이 나아지는 사람은 누구일까? 모든 사람일까? 미국의 한 법학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딱 하나만 바뀌면 문제가 해결되는 사람입니다." 다른 조건들은 모두 괜찮고, '딱 하나'만 문제되는 사람. 그 '딱 하나'만 해결되면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 혜택을 입는다고 했다.

예컨대 성소수자에 대해 생각해보자.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통해 모든 성소수자의 삶이 나아질까? 그 성소수자가 난민이라면? 장애인이라면? 여성이라면? 비정규직이라면? 노숙인이라면? 청소년이라면? 다른 모든 조건은 이미 주류에 속해 있고 '성소수자'로서 받는 차별 '딱 하나'만 바뀌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사람만이, 그 변화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성운동의 경우에는 어떨까? 여성의 권리가 신장된다고 해서 '모든' 여성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좋은 가정환경, 좋은 학력, 좋은 경제적 배경 등 모든 것을 갖추었는데, 딱 하나 '여성'이라서 문제되는 사람이 그 수혜자가 된다. 소득, 학력이 낮거나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인 여성 등은 여성운동만으로 그다지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비관적인 이야기였다. 인권운동으로 일구어내는 변화가, 상대적으로 부족함이 덜한 일부의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정도라니 말이다. 여성운동이 '모든' 여성의 삶을 낫게 하지 못하고, 성소수자 운동이 '모든' 성소수자의 삶을 낫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약한 고리를 파고든 공포의 괴물

"저는 여성이고 동성애자인데 제 인권을 반으로 자를 수 있습니까?" 어느 여성단체 행사에서,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선언하던 당시 문재인 전 대표를 향해 한 성소수자 여성이 외친 소리였다. 이 소리에 청중은 '나중에! 나중에!'라는 외침으로 화답했다. 여성으로 그 자리에 있지만 성소수자로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을 드러내는 듯했다.

여성운동의 일각에서는 사회적 소수자인 사람도 여성이 아니라면 경계하는 태도가 나타났다. 게이도 결국 남성으로서 여성을 억압하는 존재라고 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진짜 여성'이 아니라며 '위장한 남성'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트랜스젠더를 포용하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필요하다는 목소리에 성범죄의 공포를 떠올리며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이런 공포가 제주도의 예멘 출신 난민을 둘러싼 일부 여성들의 반응에서 극대화되었다. 성차별적인 문화로 알려진 아랍국가에서 온 무슬림 남성에 대한 공포는, 예멘이 어떤 상황인지, 왜 이들이 난민이 되었고 어떤 처지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질문조차 생각나지 않게 했다. 이들을 잠재적인 성범죄자라고 단정하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 자체를 위협으로 간주하며, 이들의 입국을 반대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물론 예멘 난민에 대한 공포가 여성만의 것은 아니다. 난민으로 인해 '일자리를 빼앗긴다', '세금이 탕진된다', 무슬림은 '테러리스트이다', '살인을 밥 먹듯 한다'는 등 난민의 사회적 '해악'을 주장한다. 이런 '가짜' 말들이 실업, 가난, 죽음의 불안에 직간접적으로 당면해 있는 시민들에게 '진짜' 위협으로 전달되는 듯하다. 무슬림 난민이라는 낯선 존재는 사회의 약한 고리에 파고들어 각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모양의 괴물로 둔갑하고 있다.

공포의 공식

유통되는 공포의 말들은 무시무시하지만, 사실 '공포의 공식'은 꽤 단순하다. 성폭력을 저지른다, 범죄위험이 있다, 가난하다, 세금을 가져간다, 질병을 옮긴다, 기존 문화를 훼손한다는 등의 몇 가지 이유를 적절히 혼합하면 표적 집단에게 적합한 모양의 공포를 '제조'할 수 있다. 여기에 그 위험이 그 자신이나 가족에게 미친다는 점을 강조하면 된다. '이슬람이 들어와 여러분의 아들을 죽이고 딸과 며느리를 강간할 것'이라는 말은, 공포의 공식에 충실한 구호이다.

그러니 공포의 공식이 언젠가 내가 속한 집단을 향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특정 출신국가, 특정 출신지역, 특정 가정환경, 특정 학교, 특정 직업, 특정 인종·민족, 특정 언어, 특정 연령 등에 어떤 공포가 만들어질지 누가 알까. 이미 공포의 씨앗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으며, 누군가 공포를 제조하려고 나서고, 미디어를 통해 성공적으로 퍼지기만 한다면, 차별과 배제 혹은 거대한 왕따의 시나리오는 생각보다 쉽게 구현될 수 있다.

누가 이 공포를 만들까? 전모를 알 수 없지만 드러나는 몇 가지 현상은 있다. 예컨대 지난 총선 때 출범한 기독자유당은, '대한민국을 테러 위험국으로 만들고 여성에 대한 성폭행을 급증시키는 이슬람 반대'의 공약을 선거공보물에 담아 전국의 유권자에게 배포했다. 일부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기독교 교리에 근거해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 호응을 얻기 위해 '공포'를 도구로 사용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언론에서 만들어지는 공포도 무시할 수 없다. 여기에 시민들이 소셜미디어와 댓글로 가담하고 있다.

'되게 할 수는 없지만 망하게는 할 수 있는' 권력?

상황은 정신없이 복잡해졌다.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차별받는 여성과 성소수자가 갈등하는 듯 보이더니, 이제 여성, 무슬림, 난민이 갈등하는 듯 보인다. 집단 '간'의 갈등처럼 보이지만 집단 '안'의 갈등이기도 하다. '난민이 아니고 무슬림이 아닌 여성'이 자신의 공포를 이유로 예멘 난민을 반대하는 동안, 무슬림이거나 난민인 여성이 한국 사회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커진다. 이 상황에서 국가는 예멘 난민이 더 이상 입국하지 못하도록 정책적 선택을 한다.

제주도 예멘 난민을 반대하는 글에서 보았듯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는 누군가의 권리를 호소하는 글도 많지만, 누군가의 권리를 반대하는 글도 적지 않다. 종종 '역차별'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한다. '여성의 인권 향상은 남성에 대한 역차별', '난민·이주민 지원은 자국민 역차별', '장애인을 위한 정책은 비장애인에 대한 역차별' 등 이런 식이다. 인권은 제로섬 게임이라고 전제한 듯, '당신의 이익은 나의 손해'라는 단순한 도식의 주장을 편다. '모두'의 인권을 어떻게 향상할 수 있을까라는 사회 정의에 대한 고민과 시민적 책임의식은 부족하다.

상황은 복잡하지만 결과는 단순하다.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거부'는 쉽고 '찬성'은 어려워졌다. 소수자의 권리를 거부해야 할 이유는 대중적으로 빠르게 확산되는데, 공존과 인권을 말하는 목소리는 미약하다. '딱 하나' 바꿀 수 있어도 충분치 않은데, 그 하나 조차 바꾸기 어렵게 됐다. 시민의 권력이 '되게 할 수는 없지만 망하게는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힘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해야 모두가 '되게' 만들도록 이 흐름을 바꿀 수 있을까?

평등은 수많은 사람들의 '딱 하나'가 모여 완성된다

공포의 공식은 차별받는 사람들을 서로 분열하게 만든다. 일부 여성이 무슬림 난민이라는 다른 소수자를 배척하게 된 지금의 이 상황이 우연은 아니다. 하지만 공포의 언어를 역으로 들여다보면, 누가 약자이고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지 보인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의란 누구를 탓해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무엇 때문에 공포가 생겼는지, 누가 공포를 이용하는지에 눈을 돌려야 한다. 공포에 이용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차별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어 보자. 차별은 이분법적인 싸움이 아니다. 성별, 종교, 나이, 장애, 국적, 민족, 가족형태,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학력 등 많은 '차별의 사유'는 한 개인을 구성하는 다중의 측면들이다. 차별은 여러 사유가 중첩되고 교차하여 경험될 수 있다. 그래서 다양한 층위의 소수자 집단이 만들어지고 차별과의 싸움은 복잡해진다. 그만큼 차별이 많다는 뜻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모든 차별에 반대하여 모두의 삶을 나아지게 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세우려는 것이다. 나와 관계없어 보이고 때론 불편해도, 공정한 규칙으로서 평등에 동의하고 차별에 함께 맞서는 것이다. 평등을 향한 행진은, 여성의 안전을 함께 외치고, 성소수자 축제에 참여하고,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위해 함께 시위하며, 난민의 상황을 질문하고 함께 고민하는 등, 우리가 서로 교차하고 연결되어 있음을 표현하고 연대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누군가를 위한 '딱 하나'의 변화로는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딱 하나'를 모으고 이어가며 완성시켜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지혜님은 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 교수입니다. 평등UP 기고글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홈페이지 equalityact.kr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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