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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직은 처음이라 당신 신세를 지지만
이제 두고 보라구요.


드디어 부에노스 아이레스.
기다려, 이제 날 알게 돼.
나에겐 스타의 자질이 있어-


(What's new Buenos Aires!
I'm new, I wanna say I'm just a little stuck on you
You'll be on me too

I get out here, Buenos Aires
Stand back, you oughta know whatcha gonna get in me
Just a little touch of star quality)


- 영화 '에비타' 중

영화 '에비타'에 삽입된 마돈나가 부른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커버사진이다.
▲ 마돈나가 열연한 영화, '에비타' 중에서 영화 '에비타'에 삽입된 마돈나가 부른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커버사진이다.
ⓒ 영화 '에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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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초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입성한 에비타(마돈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고향의 흙먼지를 미련없이 떨쳐낸 그녀는 옆에서 고개만 절레절레 젓는 내연남 마갈디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가득했고 부푼 가슴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아 보였다.

단언컨대 나는 결단코 에비타의 팬은 아니다.(마돈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영화 속 그녀처럼 그런 기대감을 안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한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실제로는 공항 내 인파에 치이고 바깥의 날씨에 완전히 녹 다운 (Knock down)되는 현실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오늘 아침엔 동이 트기도 전에 멘도사(Mendoza)의 호스텔을 나섰다.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고요한 새벽 공기를 갈랐다. 잠은 덜 깼지만 무의식적으로 가방을 더듬었다. 아래쪽에서 만져지는 크래커에 휴- 하며 안심했다.

그런데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 노총각 기사 아저씨의 하소연같은 연애상담을 해주느라 그 크래커를 만지작거리다 어딘가에 놓고와버렸다.(원래 손에 든 물건을 잘 흘린다) 그렇게 비상식량을 잃은 나는 말 그대로 배가 등짝에 붙어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평소에 잘 안하던 짓을 했다. 그건 바로 '공항 식당가 이용'. 대개 현지 물가보다 비싼 게 보통이고 맛도 어중간한 편이라 좀 참고 밖에서 해결하는 편이다. 그리고 '여행지에서의 첫끼'는 개인적으로 정말, 정말 중요하다. 사람의 첫인상이 겉모습이나 인사성에 좌지우지 된다면 여행지의 첫인상은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과 혀로 맛보는 두 가지에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 후덥지근의 끝판왕급 날씨에 내 내세의 업보 같은 짐을 끌고 숙소로 향하다가는 병원 신세를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래서 무난하게 스파게티 하나를 시켰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양은 3분 요리처럼 적은데 맛은 그것보다도 더 나을 게 없다.

분명 메뉴에는 크림 파스타라고 적혀있고 가격도 '착하지' 않았는데 내 눈에 보이는 거라곤 스파게티 면발과 콩국수 국물같은 소스 뿐이다. 원래 공항 음식이 정말 이런 걸까. 아니면 맛집으로 도배된 인천공항이 너무 훌륭한 탓일까. 어쨌든 혀로 느끼는 첫인상은 확실히 별로인 듯하다.

다시 피난민처럼 짐을 이고지고 식당가를 나섰다. 이제 드디어 바깥으로 나갈 차례다. 이번에는 이 도시에게 내 첫인상을 어필할 차례다. 내가 만만한 하수가 아니란 걸 똑똑히 보여주겠다. 지금 나는 최고로 경제적인 비용으로 다운타운 쪽으로 향하려 한다.

멘도사에 있을 때 이곳을 거쳐온 여행자들을 몇 만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공항 셔틀버스는 비싼데다 시내버스와 별반 차이가 없고 택시는 흉기만 안 들었지 자체 미터기로 날강도가 따로 없다고 했다. 그래서 최고의 방법은 공항 내에서 교통카드를 만들어 공항 근처의 시내버스 정류장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교통카드를 '수베(Sube)'라고 부른다. 키오스크(Kiosk; 구멍가게 쯤 되겠다)를 발견해 카드 하나와 충전을 부탁했다. 아르바이트 중인 듯한 소년은 귀의 이어폰도 빼지 않고 고개만 까딱한다.

서툰 스페인어로 충전도 했냐고 재차 묻자 그제야 짜증스러운 얼굴로 내 손의 카드를 낚아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뒷목을 잠깐 잡았지만 그냥 홱하니 나와버렸다.

버스에 올라 어깨를 짓누르는 60리터 배낭 먼저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어 옷매무새를 정돈하니 어느새 내 셔츠 목 언저리가 축축하다. 버스를 기다리느라 겨우 10분간 바깥에 있었지만 그 짧은 시간에 내 얼굴과 목에 홍수가 난 모양이다.

뻑뻑한 창문을 더 열어 얼굴의 땀을 말렸다. 나는 멍한 얼굴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대한 전체적인 첫인상을 종합진단해 보았다. 음식은 맛없었고 서비스는 형편없었으며 날씨는 내 몸안의 수분을 제로로 만드려는 데 혈안이다.

설상가상으로 버스는 교통체증에 시달리느라 아예 그냥 시내 한복판에 멈춰 서있다. 사람들은 정류장마다 더 꾸역꾸역 밀려들어오고 그럴 때마다 매캐한 매연과 먼지바람도 세트로 합류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뜻이 '좋은 공기'라던데 나는 순간 이게 무슨 반어적인 이름인가 진지하게 생각했다.

장기 체류할 목적으로 아르헨티나에 입국한지라 나는 한숨를 길게 내쉬었다. 갑자기 내 귀에 중독성 강한 마돈나의 노래가 다시 이어 들리는 듯하다.

복잡하고 소란한 도시의 열기
그 힘찬 율동에 절로 흥이 나네
이 흥분을 감출수가 없어, 정말 감동적이야
역시 여긴 내가 살만한 곳


(Fill me up with your heat, with your noise
With your dirt, overdo me
Let me dance to your beat, make it loud
Let it hurt, run it through me.
Don't hold back, you are certain to impress
Tell the driver this is where I'm staying)


내 곁에 에비타의 혼이라도 떠도는 걸까. 그렇다면 그녀는 아마 그녀의 도시에 혹평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아마 나는 그녀가 생전 언급했던 것처럼 '환상 없이는(긍정적인 면을 보지 않고는) 하나도 성취할 수(이도시를 좋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이 도시와 나, 우리는 서로에게 마음을 좀 더 열어야할지도 모르겠다.

- 2018년 2월 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입성하면서.


태그:#여행, #남미, #아르헨티나, #수도입성, #에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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