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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첫 시집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를 출간한 시인 황종권.
 최근 첫 시집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를 출간한 시인 황종권.
ⓒ 정현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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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경우가 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의 '문장'에 먼저 매료될 때.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는 그런 사례가 드물어진다. 글 사이 행간을 살피는 감식안이 경험과 독서량의 축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 인용하는 정도의 문장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함께 읽어보자.

깜빡 잊은 어제의 표정이
소문으로 떠돌기 시작하면
나는 은유가 긁적이는 세계가 무서워진다.
- 황종권의 시 '뿔' 중 일부.

피가 마르는 배롱나무, 그늘을 켜고 있다
나이테는 빗소리로 그려진 텅 빈 금관악기
비는 나무 안쪽을 짚어보려
이목구비 없는 얼굴을 두드린다.
- '죽지 않는 여름' 중 일부

나는 울음으로 존재하는 검은 섬
어깨를 들썩거리지 않는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자랐으므로
눈 감고도 물고기의 음계를 짚을 수 있다.
- '거문도 운지법' 중 일부.

이제 막 생의 첫 시집을 내놓은 30대 작가의 노래라고 하기엔 과도하게 세련됐다. 또한 그 '세련됨'이 제스처가 아닌 오래 묵힌 고민 속에서 형성됐다는 것에 짐작이 이르자, 시인 황종권이 궁금해졌다.

그는 어디서 '떠돌던 소문'이 은유로 전이되는 것을 본 것인지, '피가 마르는 배롱나무'는 누구의 눈앞에서 눈부시게 흐드러졌던지, 서럽게 '울고 있는 섬'을 진짜로 만난 적이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천년의시작)를 쓴 키 크고 잘 생긴 사내에게. 아래는 지난 2일, 흔쾌히 통화에 응한 황종권이 들려준 시와 인간, 세상과 상처, 연혁(沿革)과 꿈에 관한 이야기다.

- 데뷔 8년 만에 첫 시집이다. 어떤 느낌인가?
"시를 쓰고 난 느낌부터 말하는 게 먼저일 수 있겠다. 시를 쓰고 난 느낌은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내가 쓰고자 하는 통증이 심화되었다는 느낌과 통증으로부터 죽었다 살아났다는 느낌이다. 이 두 가지 느낌이 없으면 시라고 여기지 않는다. 첫 시집이 너무 늦게 당도했지만, 시간의 문제로 제압할 수 없는 통증이 있었다. 첫 시집을 묶고도 통증은 여전하다."

- 시에 관심을 가진 계기나 어떤 사건이 있었던 건가. 언제부터 시를 썼고 시인이 되고 싶었는지?
"시는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 필사노트로 처음 접했다. 그때 바이런, 랭보, 엘리엇, 괴테 등의 시를 보았다. 어머니의 한 시절까지 녹아있는 필사노트를 보며 시의 황홀경에 빠졌다. 자연스럽게 시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운동 쪽으로 진학을 준비했음에도 대학을 문예창작학과로 갔다. 작은 노트 하나가 운명을 바꾼 셈이다.

그러나 학교생활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단체생활에 익숙했던 터라 개성을 강화하는 문예창작학과는 맞지 않았다. 전국에서 잘 쓴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초라할 때가 많았다. 세계와의 불협화음, 한없이 바닥을 쓰는 초라함, 청춘의 열패감 덕분에 시를 썼다. 사랑받는 것보다 소중한 내 감정을 지키고 싶었고, 잘 쓰는 사람보다 잘 버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시인이 되었다."

- 우문이다. 현답을 부탁한다. 시란 무엇이고, 시인은 어떤 존재인가?
"죄송하지만 현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다만, 시는 감동받는 능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비명이거나 다짐일 수는 있겠다. 소중한 내 삶을 세상의 척박한 논리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용기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시는 나를 가장 나다운 인간으로 살아가게 해준다. 이제 겨우 첫 시집을 내놓고 시인에 대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하나, 바라는 시인은 있다. 시와 삶이 가까운 시인이 되고 싶다. 시가 뒤처지지도 않고, 시인이 시를 휘두르지도 않는...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자세를 지켰으면 좋겠다."

황종권 시집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
 황종권 시집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
ⓒ 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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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 '이팝나무에 비 내리면' 꼭 읽어줬으면

-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 그러나 특별히 아끼는 손가락은 있기 마련이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 1편만 골라보라. 그리고 선택의 이유를 말해주면 좋겠다.
"데뷔작인 '이팝나무에 비 내리면'이다. 내 유년의 그리움이 출렁이는 시이자, 시인을 만들어준 시이다. 다른 시들도 많았지만 무슨 예언처럼 데뷔작은 꼭 이 시가 되길 바랐다. 필요 이상으로 시가 길기도 하고, 덜 여문 표현도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나의 '첫' 상처를 오롯하게 담아낸 시라고 생각한다. 다시는 깨끗하게 상처와 마주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 이 시에 가장 애착이 간다."

여기서 황 시인이 자천한 시를 잠시 맛보고 다음으로 건너가자.

당신은 육지를 떠나기 전이면 뒤뜰에 있는 이팝나무 아래로 불러내곤 했지요. 이팝나무 한 뼘 위를 회칼로 그으며 그만큼 자라면 온다고 무슨 굳센 다짐처럼 말하곤 했지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팝나무 아래에서 키를 재어 보았는데요. 키 대신 등짝에 파도소리가 자라곤 했었지요. 해가 기울수록 길어지는 그늘은 내가 미리 살아버린 주름이었을까요 이팝나무는 꽃을 버릴 때마다 나이테가 늘어갔던 거예요.

먼 바다에서 당신배가 물결을 가를 때마다 일어나는 물살이 제가 엉덩이 깔고 앉아 있는 포구 끝에도 닿는 것일까요.…(후략)
- 위의 책 중 '이팝나무에 비 내리면' 일부.


- 모범으로 삼았거나 닮고 싶었던 시인이 있는가. 있다면 왜 그를 흠모하는가.
"나의 스승님 송수권 시인이다. 송수권 시인은 시대의 거대한 울림통이었고, 제자에게는 지리산같이 산세 깊은 분이었다. 스승님의 시를 떠올리면 남도의 가락, 뻘, 황토, 대나무, 느림의 미학, 빨치산, 우리말 지킴이, 음식 맛, 풍류 등이 떠오른다. 한 세계에만 천착해서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주제를 설정하고 다양한 창작기법을 보여주었다. 이는 어떤 현실에도 안주하지 않고, 자기 발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스승님이 보여준 시에 대한 절대 성실성은 아름다운 죽비로 남아 여전히 나를 가르치곤 한다. 살아생전에 내 첫 시집을 못 바친 것이 후회될 뿐이다."

- 갑자기 궁금해졌다. 1980년대는 '시의 사회적 발언'이 의무처럼 주어진 시대였다. 21세기는 많이 달라졌다. 1980년대에 시인으로 활동했다면 어땠을 것 같은가.
"시의 사회적 발언을 가장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았을까. 시가 그저 당대의 무덤으로 사라져도, 내가 추구하는 시보다 시대가 추구하는 시를 발표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남도의 뜨거운 피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시대가 원하는 시도 못 쓰는 시인이라면, 홀로 높은 문학적 성취를 이룬다고 해도 별 의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나는 시가 삶으로 증명될 때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 주목하는 동료작가 있는지, 있다면 누구이고 주목의 이유는 뭔가?
"이병철, 강민구(강백수) 시인을 좋아한다. 사실 대놓고 친한 시인들이라 여수 말로 좀 거시기하다. 좀 거시기해도 미사여구를 마구 가져다가, 더 거시기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싶다. 이 친구들은 문학에 대한 진정성뿐만 아니라, 삶의 멋이 있다. 이병철 시인은 낚시로, 강민구 시인은 노래로 자기 욕망에 답할 줄 안다. 가방 끈이 길어도 현학적 포즈보다, 유머를 잃지 않는 데 노력한다. 유머는 정신성에서 기인하고, 문학을 지치지 않게 하는 힘이다. 나는 문학을 지치지 않고 끝까지 함께할 동료가 중요하고, <삼국지>의 '도원결의'처럼 이미 만났다."

- 최근 결혼을 한 것으로 안다. 아내가 생기기 전과 생긴 이후 '시를 쓰는 태도'나 '문학적 관점'에 변화가 있는지.
"아직 신혼이라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하게 바뀐 건 있다. 밤새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자유롭게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결혼 전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이 혼술이었다. 이제는 자유로운 시 쓰기도, 혼술도 불가능하다."

황종권은 말한다. 자신의 첫 시집은 "눈물 많은 사내의 위로의 묵시록"이라고.
 황종권은 말한다. 자신의 첫 시집은 "눈물 많은 사내의 위로의 묵시록"이라고.
ⓒ 황종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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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여수 섬달천은 내 시의 심장"

- 이제 시집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황정산은 당신의 시를 지칭해 '낮은 곳'을 지향한다고 했다. 동의하는가. 그렇다면 '낮은 곳'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황정산 평론가가 세심한 눈으로 잘 짚어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바닥을 딛고 서있다. 아무리 높은 곳에 있어도 중력의 힘을 거스를 수 없다. 그럼에도 고위직, 고층 빌딩, 고액 연봉 등 욕망의 높이는 끝을 모른다. 나는 사람이 가장 괴로운 순간이 있다면 욕망과 능력의 거리가 멀 때라고 생각한다.

욕망은 끝은 없고, 능력은 한정되기 마련이다. 능력은 발끝에도 못 미치는 데, 욕망은 목구멍까지 차올라있으면 그 생은 위험하다. 내가 지향하는 '낮은 곳'은 생을 버티는 통점이기도 하지만,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낮은 자세에서 기인한다. 스스로를 낮출 때 생의 중심을 비로소 잘 잡을 수 있다."

- 당신의 시 '죽지 않는 여름'을 인상 깊게 읽었다. 선명한 색채와 무채색이 어지럽게 뒤엉켜 독자를 매혹한다. 혹,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가. 또, 시를 쓸 때 색채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는 경우가 많은지 궁금하다.
"그림을 그려본 적은 없지만, 그림을 보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언젠가 내 시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말에 대한 재주는 갖추었으나, 미학이 없으니 미술을 배워보라고 했다. 나는 미학도 모르고 미술도 몰랐지만 왠지 그 말의 뼈가 만져졌다. '현대미술사' 강의를 바로 신청했다. 분명 그림 공부는 시 쓰기에 도움이 되었다. 이미지의 배치와 대비에 대해 신중할 수 있게 되었다."

- 유년을 바다와 함께 살았다. 고향인 여수 섬달천은 당신의 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섬달천은 세계와의 분리를 처음 경험했던 곳이자, 자연과의 일체감을 경험한 곳이다. 감성적으로 말하자면 내 시의 금성이자, 내가 끝내 별자리를 가지게 될 곳이다. 섬달천은 시에 영향을 끼쳤다기보다는 시의 심장일 수 있다."

- 독단인지 모르겠으나 당신 시 전반에서 '죽음의 냄새'가 읽힌다. 동의하는가. 그렇거나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을 알려주면 좋겠다.
"동의한다. 나는 삶의 유한함을 사유하는 편이다. 죽음에 대한 의미보다 끝내 끝나는 삶에 대해 천착한다. 자유롭지 못할 때 자유를 더욱 구체적으로 감각한다고 했나. 내가 유한한 존재라고 느낄 때 무한을 감각하는 게 신비롭고 황홀하다. 만약 내 시집에서 죽음의 냄새를 읽었다면 유에서 무를 창조하고 싶은 욕망을 들켜서 일 것이다."

- 다시 황종권에 대한 질문이다. "유도 선수 출신, 격투기, 파이터 같은 시인"이란 수식이 따라다닌다. 내가 보기엔 당신 시와는 무관한 것인데 마음에 드는가.
"서로 무관하지만, 내 안에 뜨거운 지점을 찾아 간다는 점에서 시와 투기 종목은 닮아있다. 그럼에도 염려가 되는 점이 있다. 괜히 따라다니는 수식어들 때문에 시가 저평가 받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아직 큰 의미를 두지 않지만, 시인은 어디까지나 시로서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덩치 크고 눈물 많은 사내의 위로의 묵시록

- 35살이다. 65살의 황종권의 뭘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 것 같은지.
"그리스의 에게해(海) 물빛을 보며 65살을 맞이하면 좋겠다. 하지만 그리스를 닮은 섬달천에서 작은 식당을 하고 있을 것 같다. 그 식당은 직접 고기를 잡고 요리를 하는 여수의 맛집이 될지 모른다. 아내의 요리 실력과 나의 요리 감각이 더해진다면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 다시 우문이다. 시집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를 통해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뭔가.
"거창하다. 메마른 세상에 낮게 흘러드는 바다의 마음으로 엎드려 우는 존재를 토닥이고 싶었다. 끝도 없는 절망의 바닥으로 내몰린 우리에게, 새로운 위로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었다. 가두리의 벽을 한없이 쓸게 했던 유년, 세상 모든 고독을 짊어진 것 같았던 서울생활, 추억과 충격들, 이 시집은 덩치 크고 눈물 많은 사내의 위로의 묵시록이자, 가장 깨끗하게 상처에 다가갔던 순간들이다. 부디 위로가 있으라."

-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이 있다면.
"이렇게 구체적인 인터뷰는 처음이다. 간단할 줄 알았는데 생각이 걸리는 지점이 많았다. 우문이라고 하지만 나에게 꼭 물어야 질문이었고, 부족한 면을 발견하게 해주는 질문이었다. 다소 거칠고, 현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첫 시집을 펴낸 순정만은 읽혔으면 좋겠다."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

황종권 지음, 천년의시작(2018)


태그:#황종권,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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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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