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누군가는 가정의 차별적인 환경에 의해, 누군가는 직장 내 성차별에 의해, 누군가는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과 같은 사회적 이슈를 통해 페미니스트가 된다. 나의 경우는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사는 삶이 어떤 건지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학교 다니고 회사에 다닐 때까지는 이렇다 할 차별을 경험하지 못했다. 차별이 있어도 참을 만했고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큰 불만 없이 잘 먹고 잘 살았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를 경험하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근원적인 여남 불평등을 급격하게 느끼게 되었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기혼여성의 틀에 맞춰 하나씩 경험하게 되는 불평등은 숨이 턱턱 막혔다. 며느리의 역할, 엄마의 역할, 아내의 역할에 충실할수록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결혼해서 꾸리게 되는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의 기준은 '남성의 집안'이었고, 평화로운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성인 '나'의 인내, 양보, 희생, 침묵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했다.

사회적으로 기혼, 출산 여성인 내게 쌓여가는 차별과 혐오의 장벽 또한 너무 높고 견고했다. 결혼과 출산을 선택함과 동시에 나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무능'과 '혐오'라는 낙인이 필수옵션으로 따라온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출산을 하면서 당연하게 여성인 내가 주양육자가 되었다. 일 년만 키우고 복직할 예정이었지만 아이는 생각보다 손이 아니, 세심한 사랑과 관심이 많이 필요한 존재였다. 양가의 도움을 받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종일 맡기고 싶지 않아서 회사를 그만두고 직접 돌봤다.

육아에 전념하며 6년이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남편은 월급이 오르고 경력이 쌓여 더 유능한 사회인이 되었고, 나는 재취업이 어려운 '경력단절 여성', 제 3의 성이라 불리는 '아줌마' '도로 위의 폭탄 김여사', '무개념 맘충'이 되어있었다. 남편이 고생해서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게 커피나 마시는 '맘충'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서럽던지. 억울하고 분해서 한참을 울었다.

나는 왜 무능해졌나? 나는 어쩌다 혐오의 대상이 되었나? 내가 무능해진 것은 정말 내 잘못일까? 아이를 매몰차게 떼어놓질 못해 복직을 포기하고 육아를 선택한 건 나니까, 내 선택의 대가인가?

이 상황이 교사나 공무원처럼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한 개인적 무능인가?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돈 벌어다 주는 남편을 높이고 남편 집안을 우선하며 낮은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나의 돌봄노동은 왜 임금노동만큼 충분히 존중받을 수 없는 건지 끝없는 질문이 이어졌다. 

페미니즘이라는 구원의 손길, 그러나..

 동화책 모임 때, 한 엄마가 다른 엄마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동화를 직접 읽어주고 있는 모습
 '부너미' 동화책 모임 때, 한 엄마가 다른 엄마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동화를 직접 읽어주고 있는 모습
ⓒ 이성경

관련사진보기


그렇게 불만이 쌓이고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져 좌절하고 있을 때, 나를 구원해준 것은 페미니즘이었다. 평소 느끼던 막연한 불편함을 여성주의의 언어로 설명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조금씩 자존감이 높아졌다.

최근 페미니즘이 이슈가 되며, 관련 정보들이 쏟아지고 있다. 특강이나 독서모임 등 온오프라인으로 페미니즘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차별로 가득 차 있는 현실을 직시하며 슬프기도 했지만,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는 과정이 유익하고 통쾌하고 즐거웠다. 페미니즘을 통해 내가 느끼는 분노에 대해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러나 갈증은 여전했다. 다른 측면에서 풀리지 않는 답답함이 쌓였다. 내가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살며 경험하는 여성의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현실 비판이 "비혼, 비출산!"으로 귀결될 때는 허무함이 밀려왔다. 비혼, 비출산의 뜻을 가진 이들을 존중하고 지지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결혼하지도, 아이를 낳지도 마세요!"는 아닌데.

기혼, 출산 여성은 가부장제의 부역자라며 손가락질 하거나 어린 남자 아이들을 '한남유충'이라며 혐오할 때는 어느 정도 그런 표현을 이해하면서도 당혹스럽고 불편했다.

페미니즘 모임에서 '엄마'와 '아내'의 정체성을 온전히 긍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어색했다.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 아이들과 관련된 육아 고민은 꾹꾹 눌러두고 그들과 별개의 존재인 '나'의 성장에 집중해야 페미니스트답게 보였다.

때로 답답하고 힘들기는 하지만 나는 결혼, 임신, 출산, 육아를 선택한 내 삶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이와 함께' 더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한 아이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인 내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며 페미니즘 논의를 이어가고 싶었다.

'엄마' 페미니즘 탐구모임 '부너미'를 만들다

SNS에 "함께 페미니즘 공부하실 엄마들을 찾습니다"라는 공고문을 올리며, 기혼, 출산 여성들과 페미니즘 토론을 하고싶다는 뜻을 알렸다.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갈증을 느끼던 엄마들의 문의가 이어졌고 열 명 남짓의 멤버가 구성됐다. 모임 이름은 따뜻한 페미니즘을 지향하며 <부너미>로 정했다.

한옥에서 추운 겨울 집안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궁이에 불을 피워야 한다. 아궁이에서 나뭇가지, 장작, 나뭇잎 등 땔감을 불태우면 그 뜨거운 연기가 '부넘이'를 지나 구들장을 달궈 윗목과 아랫목에 온기를 전한다. 불이 넘어가는 고개와 같아 '부넘이', '부넘기', '부넹이', '불고개'라 하고 좁혀진 목구멍 같다 하여 '불목'이라고도 한다.

이 장치는 연기의 역류를 방지하고 열기가 고래 속으로 순조롭게 빨려들도록 돕는다. '부넘이'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면 아궁이에 불을 피워도 따뜻한 연기가 역류하여 방을 데우기 어렵다. 사소한 장치처럼 보이지만 역류를 막아주는 '부넘이'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온 집안이 따뜻해진다.

한옥에서의 '부넘이'처럼 페미니즘이 역류하지 않고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실천적인 논의를 하자는 뜻을 모아 이름을 짓고 활동을 시작했다. 페미니즘 이슈를 엄마들의 시선과 마음으로 다시 해석해보고 각자의 가족공동체를 더 평등하게 변화시킨다면 나아가 우리 사회도 지금보다 더 따뜻한 사회가 되지 않겠나 하는 기대를 담았다.

지난해 12월. 생전 처음 보는 엄마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모여 모임 방향과 진행 방식을 정했다. 두꺼운 옷이 얇아지는 동안 내면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 관계에 대한 신뢰, 공부하는 재미, 삶에 대한 열정, 다름에 대한 이해 등 많은 것이 쌓였다.

아이 셋을 독박육아 중인 엄마,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직장에서 해고된 엄마, 남편과 역할을 바꿨지만 임금노동과 돌봄노동에 이중으로 시달리고 있는 엄마, 경력단절로 취업이 어려워지자 아니꼽고 치사해서 직접 창업을 한 엄마 등 다양한 엄마들이 함께하고 있다.

각기 다른 성향의 엄마들이 한 달에 한두 권 씩 같은 책을 읽고, 온라인으로 독후감을 공유한 후 스터디카페에 모여 토론한다. 참여하는 누구나 '부너미 호스트'라는 거창한 중책을 맡게 되는데 호스트는 토론할 책을 선정하고, 과제를 내주고, 해당 책에 관련한 중요 토론거리를 모아 당월 모임을 진행하는 역할을 한다.

호스트를 맡은 엄마는 평소 관심 있던 주제를 주도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호스트 외의 엄마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뜻을 따르며 타인의 고민을 함께 사유한다. 호칭은 선생님의 약칭 '샘'을 사용하는데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의 엄마가 아닌 독립된 주체로, 서로를 배움의 상대로 바라보자는 의미다.

<아내가뭄>을 읽고 돌봄 노동이 가치 절하 되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에 대해서 토론을 할 때는 '경력단절여성', '워킹맘/전업맘', '도와줄게' 등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사소한 용어 하나 하나 짚어보면서 생각을 나누기도 하고, <슈퍼우먼은 없다>를 읽고 만나 각자 가정에서 어떻게 페미니즘을 적용하고 실천하는지에 대한 노하우를 나누기도 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모임은 <엄마는 페미니스트>라는 책을 읽고, 각자 자신의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와서 낭독을 했던 시간이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모임은 <엄마는 페미니스트>라는 책을 읽고, 각자 자신의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와서 낭독을 했던 시간이었다
ⓒ 민음사

관련사진보기


특히 인상적이었던 모임은 <엄마는 페미니스트>라는 책을 읽고, 각자 자신의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와서 낭독을 했던 시간이었다. 엄마들은 아들에게, 딸에게. 왜 엄마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는지, 왜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지, 어떤 아이로 성장했으면 좋겠는지 진심을 담아 공유했다.

낭독 시간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편지 낭독을 듣다 보면 '엄마'가 딸인 '나'에게 해주는 다정하고 따뜻한 응원의 말 같아서 눈물이 나고, 살면서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할 우리 아이들이 떠올라 울컥했다.

지난달에는 <마틸다><종이봉지공주> 두 권이 선정도서였다. 호스트가 내준 과제는 다른 엄마들에게 페미니즘 동화 추천하기, 불편한 동화를 성평등 동화로 각색하기였다. 이 모임이 끝나자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좋은 동화책 목록이 쌓였다.

이 밖에도 <랩걸>을 읽으며 '꿈'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쁜 페미니스트>를 읽으며 스스로 알면서도 극복하지 못하는 여성혐오적인 부분들에 대한 고백을 나누기도 했다. 읽어볼 만한 책이나 기사가 있으면 서로 공유해주고, 함께 볼만한 영화나 특강을 추천하며 서로에게 페미니즘 이해를 넓히는 성장 촉진제가 되어주고 있다.

그동안 함께 읽고, 쓰고, 토론한 내용은 <부너미>라는 제목의 책자로 엮었다. 정식 출간은 아니지만 엄마들이 스스로 모여 페미니즘을 탐구한 시간들이 고스란히 남아 의미가 크다.  

더 많은 엄마들이 연대하기를 바라며

엄마페미니즘 <부너미> 문집 함께 읽고, 쓰고, 토론한 내용을 책자로 엮었다
▲ 엄마페미니즘 <부너미> 문집 함께 읽고, 쓰고, 토론한 내용을 책자로 엮었다
ⓒ 이성경

관련사진보기


모두에게 페미니즘이 필요하지만 누구보다 페미니즘이 절실한 사람들이 엄마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혼, 출산 여성이 결혼제도 안에서의 여성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페미니즘 실천을 하려고 하면 가까운 가족들과의 갈등을 피하기 어렵다. '엄마', '아내', '며느리'의 역할을 수행하며 여성차별 현실을 개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페미니즘을 교육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솔선수범하며 가족들이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 길은 험난하다. 아이에게 페미니즘 교육을 하겠다거나 가족 안에서 발생하는 차별과 편견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는 (나보다 더 적극적인 페미니스트 남편을 두지 않는 이상) 필연적으로 외롭고 어려운 길이다. 페미니스트 엄마들이 '함께' 연대해야 하는 이유다. 

'엄마'의 힘은 세다. 페미니즘이 성별 갈등을 조장한다거나 여성 우월주의라는 비난을 받지만 우리 아이들이 사는 세상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되길 바라는 엄마들이 모여 페미니즘을 탐구하는 일은 성차에 대한 문제제기를 뛰어 넘는 논의가 가능하다. 아들이든 딸이든 존중과 배려가 자연스러운 세상을 살아가길 바라는 게 엄마들 마음 아닌가.

'함께'의 힘은 세다. 함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이고, 함께 울고, 웃고, 깨닫는 시간은 서로에게 큰 위로와 성장이 된다. 책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 소통하는 시간은 단순히 활자의 내용 이상의 감동을 가능케 한다.

많은 엄마들이 페미니즘의 언어를 통쾌해 하면서도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욕먹거나 유별나 보이기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슷한 입장의 엄마들이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며 서로의 지혜를 모으다 보면 좀 더 유쾌하고 즐겁게 페미니스트 엄마로 살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내게 엄마 페미니즘 탐구모임은 안전하고 즐거운 놀이터이자 든든한 피난처다.

더 많은 엄마들이 페미니즘을 만나면 좋겠다. 더 많은 페미니스트 엄마들이 함께 연대하면 좋겠다. 그렇게 서로에게 얻은 긍정적 에너지로 '나'의 삶을 찾고, 다시 삶으로 돌아가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차가운 구들이 따끈해지듯이,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도 좀 더 따뜻하고 평등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댓글19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