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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극적인 삶을 산 사람이 있다. 인류 정치 역사에서 이런 인생사는 매우 드물다. 은행원의 딸로 태어나 무용수가 된 뒤 전직 대통령 부인이 되고, 뒤이어 부통령과 대통령이 됐다가 쿠데타로 물러났다. 그가 대통령이 된 날이 44년 전인 1974년 6월 29일이다. 현대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여성이 대통령이 된 최초의 사례였다.

1931년 출생한 그는 30세 때인 1961년 결혼했다. 남편은 대통령 임기 중에 쿠데타를 당해 해외 망명 중인 사람이었다. 그는 남편의 세 번째 부인이었다. 36세 연상인 남편은 그와 함께 고국으로 귀환해 다시 대통령이 됐다. 이때의 러닝메이트가 그였다.

주인공은 이사벨 페론. 남편은 후안 도밍고 페론(1895~1974)이다. 오늘날 개혁정권들이 경제민주화 조치를 시행할 때마다 나오는 소리가 "경제대국이었던 아르헨티나가 몰락한 것은 포퓰리즘 때문이었다"라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포퓰리즘은 '페론주의' '페로니즘'으로 불린다. 이사벨 페론은 후안 페론과 함께 페론주의의 핵심 당사자다.

후안 페론 하면 흔히 "아르헨티나여, 날 잊지 말아요"(Don't cry for me Argentina)라는 말로 유명한 에바 페론(에비타 페론, 1919~1952)을 연상한다. 에바는 후안의 두 번째 부인이고 이사벨은 세 번째 부인이다.

쿠데타로 망명 온 전직 대통령과의 만남

이사벨 페론.
 이사벨 페론.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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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식민지였다가 1816년 독립한 아르헨티나는 유럽에 대한 식량 수출로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됐다. 하지만,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고 경제가 추락하면서 정치도 만성적 불안정에 빠졌다. 1930년 벌어진 호세 펠릭스 우리부루 장군의 군사정변 이후, 이 나라는 쿠데타가 빈발하는 곳이 됐다.

후안 페론도 48세 때인 1943년, 군사 쿠데타에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노동부 장관이 되고 부통령이 됐다. 이 시기에 만난 사람이 연예인인 두 번째 부인 에바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이 시절에도 노동부 장관은 노동자의 편이 아니라 사용자의 편이었다. 그런데 후안 페론은 노동자 편을 들었다. 노조를 대신해 고용주와의 단체교섭까지 중개할 정도였다.

후안은 노동자들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고, 1946년 대통령선거에 승리했다. 그 뒤 자립경제와 사회보장제에 주력했다. 일반 대중을 위해 병원도 4000여 개나 지었다. 포퓰리즘이라는 비난 속에, 대통령 부인 에바도 경제민주화에 적극 나섰다. 에바는 남편보다 더 큰 인기를 누렸다. 후안은 1951년 대선에서 에바를 부통령으로 내세워 연임에 성공했다.

하지만 1952년 33세의 에바가 자궁암으로 사망하면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후안의 첫 번째 부인도 암으로 죽었다. 후안보다 에바의 인기에 더 의존했던 페론 정권은 에바의 죽음으로 동력을 상실했다. 이 틈을 타 군부는 1955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후안은 파나마로 망명했고 거기서 세 번째 부인이 될 사람을 만났다. 이사벨이 후안과 혼인한 과정은 이렇다.

"1955년 23살 때 이사벨은 세르반테스극장 순회공연 댄서로 입단하여 이듬해에 파나마 공연을 갔다가, 거기서 아르헨티나로부터 망명 온 전직 대통령 후안 페론을 만났다. 당시 두 번째 부인 에바 페론을 잃고 독신으로 지내던 후안 페론은 이사벨의 젊음과 미모에 빠져들었고 이사벨을 자신의 개인 비서로 채용했다. (중략)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지내다가 35세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이듬해(1961년)에 마드리드에서 정식으로 결혼했다." - 박영만의 <세계의 여자 대통령 - 17인의 파노라마> 중에서

이사벨은 후안의 부인 역할뿐 아니라 정치적 메신저 역할도 함께했다. 선거가 있을 때면 아르헨티나로 들어가 남편 쪽 후보들의 선거 유세를 도왔다. 페론은 쫓겨났지만, 그의 집권에 향수를 느끼는 대중이 많았다. 이사벨은 그들에게 '제2의 에바'로 다가가 남편 시절의 추억을 상기시켰다.

1973년 3월, 기회가 왔다. 페론의 개인 비서였던 엑토르 호세 캄포라가 대통령에 당선했다. 못다 한 경제민주화를 다시 추진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런데 캄포라가 취임 2개월도 안 돼 사임하면서 대선이 다시 열렸고, 9월 대선에서 후안과 이사벨이 정·부통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이때 후안은 78세, 이사벨은 42세였다.

사망한 대통령... 위태위태하게 지킨 대통령 자리

후안 페론.
 후안 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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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복귀한 후안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건강 문제가 심각했다. 바이러스성 폐렴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대통령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고, 후안을 대신해 이사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974년 7월 1일 후안은 세상을 떠났다. 이사벨이 43세였을 때다.

후안을 잃은 이사벨은 열악한 상황에서 대통령 자리를 지켜야 했다. 페론 정권의 마지막 주역이 돼 경제민주화를 완성시켜야 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및 물가 상승에다가 정치적 혼란이 너무 극심했다. 이사벨은 이런 난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탈리아에 묻혀 있던 에바의 유해를 송환하는 등, '제2의 에바' 이미지로 난국을 타개해보려고도 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1976년, 군부 쿠데타로 그 역시 쫓겨났다. 

5년간 가택연금을 당한 이사벨은 재임 중의 부패혐의로 징역형을 받은 뒤 가석방돼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1989년에 페론 지지자인 카를로스 메넴이 대선에 승리한 뒤 잠시 귀국했지만, 발을 붙이지 못하고 스페인으로 되돌아갔다. 2007년에는 재임 중의 의문사 연루 혐의로 아르헨티나 정부가 이사벨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스페인 정부는 응하지 않았다.

에바 페론.
 에바 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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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은 남편에 이어 그 자신까지 쿠데타로 쫓겨났기 때문에 '패자의 잔'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 자기에게 불리하게 기록되는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후안 그리고 에바 때문에 아르헨티나 경제가 망가졌다는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나라뿐 아니라 한국 같은 먼 나라에서도 툭하면 '페론주의 같은 포퓰리즘이 나라를 망친다'고 비난하는 것을 묵묵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 100년간의 아르헨티나 역사를 보면, 이 나라 경제위기의 원인이 어디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세 명의 페론 때문이 아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제국주의에 기댄 아르헨티나, 경제 붕괴의 배경

페론 정권은 아르헨티나가 장기적인 정치 불안정에 빠져 있을 때 등장했다. 페론 정권의 등장으로 정치 불안정이 시작된 게 아니었다. 1930년 쿠데타 이후로 정치 불안정이 계속되던 중에 두 차례의 페론 정권이 출현했을 뿐이다. 장기간의 불안정 속에서 아르헨티나 경제가 위기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페론 정권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의 원인은, 제1기 페론 정권이 출범한 1946년이나 제2기가 등장한 1973년이 아니라 정치 불안정의 시초인 1930년에서 찾아야 한다. 이때부터 아르헨티나 만성적인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1930년은 아르헨티나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해로 기록된다. 1930년을 전후로 아르헨티나의 역사가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격변의 시기였다." - 알리시아 두호브네 오르띠스의 <에비타 페론-부유한 자들의 창녀, 가난한 자들의 성녀> 중에서

대통령 승계 당시의 이사벨 페론.
 대통령 승계 당시의 이사벨 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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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이 아르헨티나 역사의 분기점인 이유는, 그 전년도의 대공황으로 경제가 무너지면서 군부 쿠데타가 일상화됐기 때문이다. 대공황과 함께 아르헨티나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했던 것이다.

대공황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주도했던 자본주의 체제의 총체적 문제점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기존 방식으로는 자본주의가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음을 보여준 경고였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 제3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1929년 10월 월가의 추락으로 촉발된 대공황이 선진국을 강타했는데, 그 엄청난 충격은 역사상 최대였다.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에서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되는 노동인구가 일자리를 잃었다. 모든 나라가 19세기에 그리고 1930년대 초까지 정부가 경제에 간섭하지 않는 자유방임주의를 고수했는데, 이 전통적인 교리는 영구적으로 신뢰를 잃었다."

대공황으로 총체적 위기에 직면한 이 시대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가진 특징 중 하나는, 세계의 여타 지역을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강제로 재편했다는 점이다. 세계의 여타 지역을 자신들에 대한 식량 및 원료 공급처로 만들고 자기네 공산품 및 금융상품 판매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국주의 국가도 아니면서 이런 체제에 편승해 부를 축적한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포진한 유럽에 곡물을 수출하고 거기서 공산품을 수입하는 방법으로 아르헨티나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이런 식의 무역구조를 가진 나라들이 일방적 착취를 당하던 시절에 아르헨티나는 특이하게도 제국주의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부를 축적했다. 그렇게 거둔 성공이 대공황과 함께 물거품이 되면서 1930년부터 만성적 위기를 겪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경제가 무너진 것은 제국주의 시대의 경제가 몰락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페론 정권이 서민들한테 복지 지출을 늘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경제가 안 돼 서민들의 노동 소득이 감소할 때는 정부가 복지 지출을 늘려 서민들의 생계를 보장해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야 서민들의 반란을 막을 수 있으므로, 이런 복지 지출은 사실은 부유층의 안전을 돕는 길이다. 페론 정권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대공황과 함께 시작된 아르헨티나의 몰락은 제국주의식으로 세계를 착취하는 게 더 이상 힘들 뿐 아니라 그 체제에 편승해 수혜를 보는 것도 더 이상 힘들게 됐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페론 정권은 대공황으로 몰락한 아르헨티나를 수술해보려다 실패했을 뿐이다. 1992년에 <지역연구> 제1권 제2호에 실린 논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페론주의의 등장은 1929년 대공황과 그에 따른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붕괴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 임현진의 '아르헨티나의 정치발전과 사회변동' 중에서

'페론주의'는 죄가 없다

아르헨티나 정치권력이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헤게모니를 상실했고, 이것이 페론주의라는 새로운 해법의 등장으로 연결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르헨티나 경제가 망한 것은 페론 정권 때문이 아니라 제국주의 경제의 몰락과 이에 대한 대응의 실패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을 외면하고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보수파들은 이사벨을 비롯한 세 명의 페론 때문에 아르헨티나 경제가 망한 것처럼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정부가 대중을 위해 복지 지출을 늘리면 아르헨티나처럼 망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풍문을 퍼트리고 있다.

하지만, 세 명의 페론으로 인해 드러난 객관적 진실은, 복지정책이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라는 점뿐이다. 복지 지출을 늘려서 아르헨티나 경제가 망한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고치지 않아서 아르헨티나 경제위기가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태그:#이사벨 페론, #후안 페론, #에바 페론, #포퓰리즘, #페로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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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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